제35화
“…가만 있어봐.”
축 늘어진 남성국의 처참한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중, 문득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번개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험해볼 요량으로 나는 즉시 낙오자들의 진혼곡을 발동시켰다.
새롭게 얻은 스킬은 써먹어야 제맛이지.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와 동기화합니다.」
시스템 창의 메시지와 함께 가슴께에서 창백하게 시린 황금빛이 번쩍 빛났다.
머릿속으로 낯선 이의 기억이 꿀렁꿀렁 밀려들어왔다.
「이전의 경험으로 인해, 대상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화율이 소폭 상승합니다. 현 동화율을 『15%』입니다.」
이번이 두 번째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인지, 동화율이 소폭 상승했다.
먼젓번엔 밀물처럼 밀려들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덧없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면.
이번엔 썰물 뒤의 갯벌에 고인 웅덩이 마냥, 낯선 이의 기억 중 일부가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타인을 연기하기 위해 생니까지 뽑아가며 독하게 연습했던 기억!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궁중 광대가 되어 원수 옆에서 웃어야만 했던 기억!
왕궁에 아가리를 쩌억 벌린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사람들을 살해했던 기억!
「동화율 15%,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의 스킬 중 한 가지만을 일시적으로 복사합니다.」
「복사한 스킬은 제한시간 『한 시간, 십오 분』 동안 지속 됩니다.」
머릿속에 파편처럼 틀어박힌 낯선 이의 기억과 연이어 떠오른 시스템 창의 복잡한 메시지가 놀라운 시너지를 일으켰다.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저릿한 두통이 찾아왔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나는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로부터 복사한 가면놀이 스킬을 발동시켰다.
-츠리릿!
어디선가 거대한 비단뱀이 전신의 비늘을 곧추세우는 듯한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나 싶더니,
마치 비늘이 곤두서듯 내 몸 위로 남성국의 형상이 서서히 덧칠되기 시작했다.
[그 해괴한 술법은 몇 번을 봐도 불쾌하군, 그 흉측한 모습으로 무얼 하려는 게냐.]
그렇게 내 몸이 완전히 남성국의 모습으로 변하자, 위철용이 입술을 비쭉 내밀며 불만을 토했다.
하승진으로 변장한 모습이 아닌, 남성국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냈기에 위철용의 말대로 현재의 내 모습은 남성국의 그것처럼 굉장히 흉측한 상태였다.
물론, 그가 불만을 표한 이유는 단순히 남성국의 흉측한 외형 때문이 아니겠지….
“해괴한 술법이라니요. 기껏 얻은 스킬 사용하라 조언해 주신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습니다만?”
[그, 그거야. …네놈이 그 술법을 사용할 때마다 어쩐지 불쾌한 느낌이 든단 말이다.]
위철용은 머쓱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며칠 전 내게 해줬던 조언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째선지 내가 낙오자들의 진혼곡을 발동시킬 때마다 굉장히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그가 무인 출신이니만큼, ‘술법’의 영역에 들어가는 스킬엔 거부감을 표할 수도 있긴 하다만….
위철용이 이 낙오자들의 진혼곡에 대해 보이는 불쾌함은 특별히 유난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나 역시 그가 저렇게 유난스럽게 반응할 때마다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뭐, 지금은 좀 봐주십쇼. 모처럼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마당이니까.”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생각했던 대로 행동할 때다.
머리를 휘휘 흔들었다. 불쑥 고개를 들었던 찜찜한 기분을 모조리 털어버렸다.
동시에 잡념뿐만 아니라 모든 생각을 뚝 멈추었다. 무의식에 몸을 맡겼다.
-스르르륵.
『가면놀이』란 ‘접촉한 적이 있던 자를 완벽히 ’흉내 내는‘ 스킬이다.
비록, 대상의 기억을 엿보는 효과까지는 없었지만. 대상자의 몸에 각인된 습관을 재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무릇 습관이란 놈은 딱히 의도치 않아도 자연스레 몸에 배어들어 각인된 기억을 토해내기 마련이거든.
몸에 힘을 빼고 연극배우가 대본에 몸을 맡기듯, 남성국의 몸에 각인된 습관에 몸을 맡기자, 남성국의 육신이 지닌 기억에 따라 내 몸이 스르륵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하는 짓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거 차암 보기 좋구나. 혹시 네놈 그런 취미가…?]
“…저라고 좋아서 하는 건 아니니까. 조용히 하십쇼. 좀.”
제어에서 슬쩍 벗어나, 무의식의 영역에서 멋대로 움직이는 내 육신은 놈이 생전에 이곳, 집무실에서 행했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정말 시시콜콜한 것까지 그대로.
남성국의 습관에 따라 내 육신이 허리를 앞뒤로 들썩거리며 독특한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꺼떡거리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그 괴악한 모습을 목격한 위철용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위철용의 웃음소리에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순간적으로 발끈했지만, 이내 다시 힘을 쭈욱 빼곤 다시 무의식의 세계에 몸을 맡겼다.
“…….”
그런식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남성국의 은밀한 사생활 습관들을 전부 재현해낸 끝에…,
“빙고.”
제멋대로 움직이던 내 몸이 마침내 그럴듯하게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쩔그럭!
남성국이 숨겨두었던 함정들을 점검하기 시작한 것!
철두철미하고 꼼꼼한 성격의 남성국답게 자신이 설치한 함정을 점검하는 것 역시도 습관의 영역이 되어있는 것이었다.
[허, 거 잔머리 하난 비상하게 돌아가는 놈답게, 그걸 그런 식으로 활용할 줄이야.]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기색을 감지한 위철용이 짧게 탄성을 토했다.
그리곤 그는 웃음기를 싹 지운 채, 진지하게 내 몸의 행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
그렇게 숨겨진 함정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던 내 육신이 별안간 특이한 반응을 보였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몸짓, 유난히 주의를 기울이는 듯한 손짓에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신중하게 주변의 진동을 확인하는 발짓까지!
다른 곳을 점검할 때와는 아예 격이 다를 정도로 굉장히 신중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다.
[책장? 예나 지금이나 머리 깨나 굴린다는 것들은 하나같이 고전적인 장소를 선택하는구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재현하던 내 몸이, 살금살금 함정이 설치된 책장으로 다가갔다.
…책장 속에 숨겨진 비밀공간이라니. 위철용 말대로 굉장히 고전적인 취향이로군.
-달칵.
그리곤 책장에 꽂혀있는 얇은 잡지 한 부를 살며시 당겼다.
얇디얇은 패션잡지가 당겨진 순간, 책장 내부에서 무언가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우두둑
바로 그 순간!
내 육신이 잽싸게 고개를 옆으로 홱 꺾었다.
어찌나 빨리 재빨리 움직였는지,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였다.
-찌직 찍!.
마치 물총이 발사되는 것 같은 찌직 소리와 함께, 홱 꺾은 고개 옆으로 축축한 액체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콧구멍이 뻥 뚫릴 정도로 시큼한 부식액 냄새!
이토록 고전적이면서도 치명적인 함정이라니, 역시 교활한 성격의 남성국다웠다.
놈의 치밀한 준비성에 속으로 감탄을 표하며, 나는 드러난 금고에 손을 뻗었다.
남성국의 습관을 모사한 손이 능숙하게 움직여 금고의 비밀번호를 풀어내었다.
[자신이 똑똑하다 자부하는 놈들은 어찌나 이리도 한결같은지 모르겠구나. 대체 왜 저렇게 중요해 보이는 자료를 굳이 남겨두는 거지?]
“덕분에 일이 쉬워졌으니, 지금은 그 ‘똑똑함’에 감사를 표해야죠.”
각종 비자금이 담긴 통장에 산처럼 쌓인 신분증과 다양한 기종의 스마트폰에 척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인장이 박힌 두툼한 서류 봉투까지.
위철용의 장난기 어린 탄식대로 금고 속의 내용물은 굉장히 알차 보였다.
“그래, 이런 걸 남겨두지 않았을 리가 없죠.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못 믿을 물건인데.”
아무리 남성국이 철두철미한 성격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영 신뢰성이 떨어지는 물건이다.
게다가. 사교도 집단 중에서도 제법 큰 축에 속하는 체체파리 클랜의 지부장급이나 되는 인물이니만큼. 남성국이 다뤄야 할 정보의 양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
그 막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기억해두기보단, 이런 식으로 자신과 가장 가깝고 안전한 곳에 서류를 보관해두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예상보다 더욱 괜찮아 보이는 수확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내 얼굴에 번져나갔다.
그렇게 봉투의 봉인을 뜯으려는 순간!
-쾅!
박살 난 책상이 든든하게 막아선 문에서 둔중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곧이어 인기척과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청객이로군. 하긴, 그렇게 요란을 떨어 댔으니….]
공격대장의 집무실이 본관에서 멀리 떨어진 별관에 위치해있었다지만,
쿵쿵거리는 소음과 찢어질 듯한 비명을 완전히 막진 못한 것 같았다.
“하 대장님? 하승진 대장님? 문 좀 열어보십쇼!”
다급한 목소리와 쩔그럭거리는 문고리 소리가 저너머에서 들려왔다.
불청객들의 침입이 임박해 왔다.
“이거 귀찮아지겠는데….”
남성국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35분 남짓.
그렇다면….
끔찍하게 훼손된 남성국의 시신과 바닥에 버려진 하승진의 가면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눈을 빛냈다.
****
-우지지직!
요란한 굉음과 함께 튼튼한 철문이 경첩채로 와드득 뜯어졌다.
통일된 디자인의 갑옷을 차려입은 사내 네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사방을 경계하며 서둘러 돌입해온 사내들은 선두에 선 대머리 사내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한 몸놀림으로 방진을 구성했다.
“하 대장님…? 이,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행의 리더격으로 보이는 대머리 사내의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칼밥 먹고 살아가는 게 헌터의 삶이라지만, 게이트 밖에서까지 사방이 피 칠갑이 되어버린 살인현장을 접하는 건 달갑지 않기 마련이다.
널부러진 시신을 발견한 대머리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용호 헌터로 변장해 이곳에 침투한 사교도가 나를 습격했네.”
대머리 사내에게 대꾸하는 내 입에서 하승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면놀이의 효과로 남성국의 생전의 습관뿐만 아니라, 그의 연기 솜씨 역시, 그대로 재현되었다.
공격대장(?)의 시신을 목격하여 잔뜩 흥분한 공격대원을 상대하는 것은 외부인에겐 상당히, 아주 상당히 귀찮고 어렵기만 한 일이기 마련이다.
복잡한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곤혹을 치루는 것보다야 차라리 의문의 방문객에게 습격당한 공격대장을 연기하여 일단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이 곱절은 더 쉬운 일이었다.
가면놀이라는 쓸 만한 스킬까지 있는 마당에, 이 편이 훨씬 낫지 뭐.
“스, 습격이라니! 괜찮으십니까?”
대머리 사내는 비명을 지르듯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뾰족한 소리를 내질렀다.
곧이어 그는 과할 정도의 호들갑을 떨며 내 몸 구석구석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물론, 그러면서도 리더의 본분을 잊지 않았는지, 그는 나머지 인원들에게 슬쩍 눈짓으로 남성국의 시신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 얼굴이!”
“사교도답게 독한 놈이야, 변장을 위해 자신의 얼굴가죽까지 벗겨낸 것 같군.”
시신에 접근한 인원 중, 유난히 두꺼운 뿔테 안경을 착용한 사내가 신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교도 중 일부는 자신의 얼굴가죽을 벗겨내, 다른 이로 손쉽게 변장하곤 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군, 설마하니 화제의 그 설용호 헌터로 변장했을 줄이야….”
“그래, 그 ‘얼굴천재’ 설용호 헌터로 변장해서 들어왔으니, 대장님도 방심하셨을 수밖에 없지.”
뿔테 안경의 사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남성국의 시신을 신중하게 수색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동료와 속닥거린 대화 내용에 왜인지 괜한 민망함이 느껴졌다. 가면 밑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놈의 얼굴천재, 도대체 어떤 놈이 붙인 별명이야?
“이, 있습니다! 과장님! 체체파리 클랜의 표식입니다!”
마침내, 뿔테 안경이 남성국의 종아리 뒤편에 새겨진 표식을 발견했다.
비단, 체체파리 클랜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무리 지어 활동하는 족속들은 확인하기 편하면서도 은밀하게 감춰진 곳에 문신을 새겨놓기 마련이다.
때문에, 사교도를 식별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특유의 표식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뿔테 안경 역시, 제법 숙련된 헌터였기에 남성국의 훼손된 시신에서 체체파리 클랜을 상징하는 문신을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제법 지위가 되는 놈인가 봅니다. 표식이 정교해요.”
뿔테 안경은 대머리 사내에게 경어를 표하며 침중한 목소리로 경고를 전했다.
“어쩐지 한동안 조용하더라니….”
뿔테 안경에게 보고를 받은 대머리 사내는 음울한 목소리로 신음을 토했다.
한동안이라….
그래, 아마 체체파리 클랜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대 침식의 혼란 이후였었지?
-이거, 지부장 맞지?
-…맞는 것 같군.
…잠깐만.
회귀 전, 과거를 더듬어 체체파리 클랜의 행보를 기억해 내려던 순간!
갑자기 수상쩍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동시에 침중한 표정으로 남성국의 시신을 살펴보던 공격대원 한 명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대머리 사내 곁에 서서 뭔가를 기록하던 공격대원이 그 묘한 눈빛에 화답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들의 눈빛엔 복잡한 신호들이 오갔다.
깜짝 놀란 듯 살짝 치켜뜬 눈, 수축된 동공 속엔 음흉한 음모와 음험한 모략의 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척 봐도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모습이다.
“이봐…. 잠깐!”
수상한 기운을 물씬 풍기는 공격대원들의 태도에 뭐라 반응하려던 찰나!
-푸화하학!
놈들이 먼저 선수를 쳤다.
대머리 사내 곁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만년필을 까딱거리던 사교도의 만년필에서 뭔가가 발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