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어디보자…. 튜토리얼에서부터 S급? 이야아! 이거 처음부터 아주 화려하게 시작하셨네! 아주 그냥 튜토리얼 타워에서 금수저를 물고 나오셨어.”
언뜻 듣기엔 칭찬 같지만 사람의 속을 득득 긁어대는 능글맞은 말투.
집무실에 들어선 이후부터 하승진은 계속 이런 식으로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거만을 떠셨어요? 어이쿠! 이걸 어쩌나. 댁은 일개 방문객이고, 나는 이곳을 총괄하는 담당자인데.”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지만, 내용은 항상 똑같았다.
‘갑질한 헌터에게 역으로 갑질해서 혼내주는 공격대장님의 속 시원한 역관광 사이다 썰.txt ’
인터넷에 잊을 만하면 올라오곤 하는 흔하디흔한 패턴의 이야기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언제나 ‘먼저 갑질한 헌터가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애걸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었지만.
애석하게도 난 그런 흔해 빠진 이야기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없었다.
“…….”
하승진이 뭐라고 떠들던 나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면이라도 뒤집어쓴 듯 무표정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듯 시선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거 봐. 이거 봐. 요즘 애송이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니까? 나 때는 말이지….”
하승진 역시, 내 무심한 반응에 별달리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버텨봐야, 시간을 끌수록 주도권은 자기에게 넘어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수없는 표정으로 슬슬 눈웃음을 치는 그의 입에선 또다시 시간 끌기용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대체 왜 조용히 있냐고 묻고 있지 않으냐! 지금 뭘….]
‘가만있어 보세요. 다 생각이 있으니까.’
갑갑한 이야기가 계속되자, 위철용이 반응을 보였다.
성을 내며 재촉해오는 위철용에게 조용히 속삭여 답해준 뒤 그동안 꼼꼼히 관찰해온 집무실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았다.
배치된 가구의 전반적인 생김새와 그것들의 배치상태부터 시작해서 아무렇게나 방치되듯 어질러져 있는 사무용 집기들의 생김새까지.
집무실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 산산이 해체되고 재조립되었다.
머릿속을 팽팽 굴려 가며 놈이 즐겨 사용하는 함정과 집무실의 모든 것들을 일일이 대조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나는 집무실 곳곳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여섯 개의 함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실하군, 이제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겠어.
“그렇게 조개처럼 입 꾹 다물고 있으면 그쪽만 손해일 텐데? 응? 길드장님 특별 지시가 있다면서?”
확신이 든 이상. 이젠 행동에 나설 시간이다.
슬슬 눈가에 웃음을 지운 하승진이 협박하듯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꽈아아앙!
꽈악 틀어쥔 주먹으로 벼락처럼 책상 모서리를 힘껏 내려쳤다.
일반인의 수배는 됨직한 초인적인 괴력이 발휘되었다.
-우지끈!
책상 모서리가 움푹 함몰됐다. 육중한 책상이 번쩍 들린다. 싶더니,
이내 함몰된 방향으로 확 기울어졌다. 집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내 쪽으로 넘어질 듯 기울어진 책상의 평평한 면을 힘껏 걷어찼다.
-꽝!
폭음! 굉음!
걷어차인 책상이 굉음과 함께 집무실의 문 쪽으로 폭발하듯 날아갔다
-콰콰콰콱!
어찌나 세게 걷어찼던지, 무거운 책상이 콘크리트 벽에 반쯤 파고들었다.
책상이 파고든 단단한 철제 문짝이 기묘한 모양으로 구겨졌다.
그렇게 집무실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문이 완벽하게 봉쇄되었다.
좁디 좁은 집무실은 이제 완벽한 밀실이 되어버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행패야! 감찰팀 만나보고 싶어? 응?”
돌발적인 행동에 기함하며 바닥에 구르듯 몸을 피한 하승진은 꼴사나운 목소리로 꽥꽥 고함을 질러댔다.
-뿌드득!
“끄아아아악!”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창날이 하승진의 어깨에 콰악 틀어박혔다.
기껏 차려입은 검은 가죽 갑옷이 맥없이 뚫렸다. 단단한 어깨뼈가 과자처럼 부서졌다.
놈은 갑갑했던 위철용의 속이 확 풀어질만큼 우렁차기 짝이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어따 시원하다. 진즉 이렇게 개운한 짓을 좀 해보지 그랬느냐.]
“너,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읍! 으읍!”
나는 갓 만든 곤충표본처럼 버둥거리는 하승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쫙 편 손바닥으로 놈의 얼굴 전체를 덥썩 움켜쥐고 잡아 뜯듯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부우우욱!
흡사 종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하승진의 얼굴 가죽이 맥없이 벗겨졌다.
아니, 정확하겐 하승진의 얼굴을 본따 만든 가면이 부우욱 찢어졌다.
찢어진 가면 아래로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오랜만이야. 남성국.”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하승진, 아니 남성국을 바라보며, 나는 진심 어린 반가움을 담아 히죽 미소를 지었다.
****
벗겨진 가면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참으로 끔찍했다.
얼굴 전체를 대패로 거칠게 깎아내기라도 한 듯 코, 눈꺼풀, 입술, 등 툭 튀어나온 모든 요철들이 사라진 흉측한 모습이었다.
조금 끔찍하니 부담스러운 생김새이긴 하나, 이 역시 차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먼젓번의 한라 공격대 사건에서 엮였던 사교도 집단 체체파리 클랜의 서울 지부장.
‘천의 얼굴.’ 남성국.
‘천의 얼굴’이란 이명답게 놈은 다양한 인물로 변장하여 음모를 꾸미는 이간질의 고수였다.
[크, 크흠! 본존 역시 놈이 남성국인 줄 알고 있었느니라. 여, 역시 네놈은 계획이 다 있는 모양인 게로구나.]
남성국의 특성 트리는 이명에 걸맞게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에 특화된 특성 트리였다.
위철용마저 순간적으로 속아넘길 정도로 그의 변장은 감쪽 같았다.
사교도 특유의 기운은 완전히 감추면서 대상의 기운을 그대로 복제하는 변장술이니, 위철용 역시 깜빡 속아넘어갈 수 밖에 없지.
“도대체 이 빚을 어떻게 갚나 싶었는데. 이런 곳에 숨어 있었네?”
나 역시, 남성국에게 빚이 좀 있었다.
협회 직원으로 변장한 남성국의 간악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엉뚱한 공격대를 사교도로 오해해 공격한 적이 있었거든. 덕분에 선량한 이들이 내 손에 목숨을 잃었고 말이지.
“…….”
…젠장.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속이 쓰렸다.
속을 콕콕 쑤셔오는 과거의 아픔이 증오가 되어 광기로 번져나갔다.
남성국을 바라보는 내 눈이 살기를 품고 황금빛으로 이글거렸다.
“…어떻게 눈치 챘는진 모르겠다만. 제법이로구나. 내 변장을 꿰뚫어 보다니.”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체를 발각당한 남성국의 태도는 오히려 느긋했다.
여전히 창날이 어깨에 틀어박힌 채로 구속된 상태였지만, 놈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눈꺼풀이 없어 마치 유리알 같아 보이는 눈에선 호기심이 슬쩍 내비쳤다.
“새끼가. 까고 있긴.”
물론, 나는 놈의 ‘뭔가 있어 보이는’ 여유로운 모습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해묵은 빚과 오래된 원한을 담아, 나는 시원하게 놈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짜아아악!
남성국의 고개가 우두둑 소리와 함께, 홱 돌아갔다.
입술이 없는 입에서 폭죽 터지듯 요란하게 핏물이 터져 나왔다.
이빨도 몇 개 부러진 모양인지, 누리끼리한 무언가도 후두둑 떨어졌다.
“그렇게까지 자만하신 것 치곤 많이 어설프셨어. 시간 끄는 게 눈에 훤히 보였거든.”
비웃음을 가득 담아 이죽거리자, 남성국의 흉측한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 변장을 눈치 챈 건 제법 칭찬해줄 만한 일이다만, 내가 누군지는 모르는 모양이구나. 시건방지게 내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여?”
-왜애애앵
남성국이 음울하게 중얼거리자, 파리의 날갯짓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놈의 몸에서 스멀스멀 거무튀튀한 기운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네놈이 누구냐고? 잘 알지. 역겨운 파리 새끼를 추종하는 이상 성욕자. 구라쟁이 남성국. 아니, 곤충 성애자 파리박이 성국이라고 해 줄까?”
회귀 전, 남성국이 가장 싫어했었던 별명을 도발하듯 이죽거리자 놈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두 눈엔 서서히 살기가 피어올랐다.
“네놈이 감히!”
-왜애애애앵. 왜애애애앵!
남성국의 분노에 찬 외침 소리에 호응하듯 희미하게 들려오던 파리의 날갯짓 소리가 선명해졌다.
남성국의 입이 비현실적으로 쩌억 벌어진다. 싶더니, 목구멍에서 엄청난 숫자의 파리 떼가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풀려나온 파리 떼는 순식간에 남성국의 전신을 뒤덮었다.
-쩌적! 쩌저적!
순간, 무언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파리 떼에 시커멓게 뒤덮인 남성국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단면에서 거대한 파리 한 마리가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다.
《시건방진 필멸자 놈, 네놈의 방정맞은 주둥이를 갈가리 찢어 내 아이들의 먹이로 주겠다!》
거대한 파리로 변해버린 남성국이 포효하듯 소리를 지르자 어마어마한 살기가 짓쳐들어왔다. 놈의 몸에서 풀려나온 파리 떼가 위협하듯 내 몸을 스치고 날아다녔다.
《후회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도다. 필멸자여. 네 오만함과 방만함에 눈물 흘릴 시간이 도래하였노라!》
-부와아아아앙!
집무실 전체를 집어삼킨 거대한 파리 형태의 괴물. 남성국이 비대한 몸을 놀렸다.
어지간한 아름드리나무만큼이나 거대한 앞다리 두 개가 공기를 찢었다.
흉험한 공격이 내게 거칠게 쇄도해왔다.
“아 그러셔요?
위협적으로 휘둘러진 앞다리가 코앞까지 다가온 위기의 상황!
하지만 난, 딱히 놈의 공격을 피하려고 들지 않았다.
처음 서 있던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상태로 가볍게 고개만 살짝 옆으로 젖혔다.
-후오옹!
흉측하게 번들거리는 남성국의 앞다리가 내 머리를 깔끔하게 관통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리를 꿰뚫린 나는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그저 요란스러운 바람만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네, 네놈 어, 어떻게…!》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해서일까?
남성국이 비대한 몸을 푸들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필멸자니 뭐니하며,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던 괴악한 말투 역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게 크게 동요한 채로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남성국에게 비릿한 비웃음을 날린 뒤.
-핏
조금 전에 붙잡은 무언가를 남성국이 원래 쓰러져 있었던 곳에 슬쩍 집어 던졌다.
“끄아아아아악!”
집채만 한 파리 형태의 육신은 여전히 내 눈앞에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지만. 남성국의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이따위 눈속임은 내겐 통하지 않거든?”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 얼핏 보기엔 텅 비어있는 공간을 바라보며,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서늘하게 이죽거렸다.
-츠츠츠츠,
화안금정이 발동되어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시야로 텅 빈 것처럼 보였던 공간에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남자의 형상이 비쳤다.
-콰악
나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남자, 남성국에게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놈의 목덜미를 콰악 움켜쥐었다. 그리곤 남성국의 비루한 육신을 번쩍 치켜들었다.
-뿌좌자자작!
“끄아아아악!”
그 무식한 충격에 남성국의 어깨가 끔찍한 소리와 함께 찢겨나갔다.
창날에 고정되어 있던 어깨뼈가 완전히 박살나며 절단 되었다. 뻐끔 벌려진 남성국의 입에선 혼이 나가버릴 듯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믿고 있던 구석이 고작 이따위 눈속임이 전부였다면….”
나는 목이 쉬어라, 비명을 질러대는 남성국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말하는 단어에선 섬찟한 살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내력과 괴력이 주입된 손가락이 처참하게 찢겨나간 남성국의 어깨를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콰드드득!
“끄, 끄읍! 끄아아악!”
그렇게 파고든 손가락이 남성국의 상처에서 큼직한 살점을 하나 뚝 떼어냈다.
혼이 나가버릴 듯한 비명을 질러대는 놈을 내려다보며, 나는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 차례겠지?”
몽글몽글 피어오른 살기는 이내, 이성을 활활 불사르는 광기가 되었다.
나는 거리낌 없이 치밀어 오른 폭력적인 광기에 몸을 맡겼다.
****
광기와 살의가 범벅된 폭풍 같은 시간이 흘러간 뒤.
나는 힘없이 추욱 늘어진 남성국의 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교도 집단의 간부급 지부장치곤, 남성국은 심각할 정도로 허약했다.
체체파리 클랜의 다른 지부장들과는 달리 남성국은 무력이 아닌 지략과 음모로 지부장의 자리까지 올라간 케이스였다.
그래서일지 놈의 신체 능력은 다른 헌터에 비해서도 한심할 정도로 약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허약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제할걸 그랬나.
“쯧, 허약하긴.”
뒤늦게 엄습해오는 후회와 아쉬움에,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상대의 무력을 가늠하는 것 또한, 무인의 기본 소양 아니겠느냐. 헌데 그거 참 의외로구나. 안종훈이라니….]
“제 기억에 의하면, 놈은 분명히 사교도와는 접점자체가 전혀 없었는데…. 이거, 어쩌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안종훈 그새끼가 상상을 초월하는 개자식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조금 전, 남성국을 고문하던 도중 나에 대한 정보를 누구한테 얻었냐고, 배후나 한번 불어보라고 조롱하듯 남성국의 육체를 파괴하던 과정에서 안종훈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솔직히, 남성국쯤 되는 인재라면 최후의 계략을 짜내 나와 안종훈을 이간질 시킬 심산으로 그런 말을 지껄였을 수도 있었기에….
화안금정을 사용해 진위여부를 가늠해 봤지만 최후의 순간, 남성국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단어는 『진실』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겠는데요?”
제대로 캐묻기도 전에 남성국이 사망해버렸기에,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난 놈들의 관계에 관해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생각 외의 소득이에요. 안종훈과 남성국이라….”
하지만, 내게 있어선 사교도인 남성국이 안종훈을 ‘언급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지 않아도 재수 없었던 안종훈을 사교도와 엮어 완전히 몰락시킬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남성국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내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