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으허어허헉!”
강제로 수장된 의식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혔던 숨을 한 번에 터뜨리듯 몰아쉬며,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번쩍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 순간.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게냐?]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위철용의 목소리와 함께. 낯익게 못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구긴 채,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어쩐지 ‘뭔가’가 생각났다.
보통은 그런 ‘뭔가’가 떠올라도 조심스레 마음속으로만 주워 삼켰겠지만.
“…녹차 맛 찐빵?”
잠이 덜 깨서일까?
이번엔 녹차 맛 찐빵이 연상됨과 동시에 무심코 그것의 이름을 입 밖으로 스르륵 내뱉고야 말았다.
[뭐?]
졸지에 찐빵 소리를 들은 위철용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이 고리 모양으로 휘며, 은은한 노기를 발산시켰다.
“끄으으응! 아닙니다.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났지 뭡니까.”
아차! 싶어 기지개를 켜는 척. 잠에서 아직 덜 깬 척 대충 얼버무렸다.
혹시라도 위철용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할까. 싶어. 재빨리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좋은 생각. 좋은 생각! 마음이 따뜻해지는 좋은 생각!
[…너 이따 저녁에 보자.]
당연히, 내 어색한 얼버무림은 위철용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그는 이내 살벌하게 씨익 웃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다음 수련을 고대하라 속삭였다.
젠장맞을. 또 신명나게 얻어맞게 생겼군.
“으으으윽!”
-우두두두둑
한숨을 내쉰 뒤. 힘차게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자, 뼈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심상세계에서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위철용에게 정신없이 얻어맞은 여파인지, 현실에서도 온몸이 찌뿌둥했다. 몸 구석구석에서 희미하게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정말이네.”
잠에서 깨기 전, 심상세계에서의 일을 생각하자 새삼스럽게 아쉬움이 밀려왔다.
위철용의 일갈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고, 덕분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스킬 중 하나인 화안금정의 사용처를 깨우치긴 했다만….
심상세계에서 위철용이 말한대로 성좌들과의 소통 공간은 완전히 맛이 가버린 것 같았다.
성좌들의 반응이 가득했던 채널은 마치 심상세계의 그것처럼 회색 연기로 꽉 들어차 있었다.
젠장. 이래서야. 당분간은 성좌들의 반응을 볼 수도 없겠군….
[뭘 그리 시무룩하고 있는 게냐? 어긋난 것을 복구하는데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그리 일렀거늘….]
내 시무룩한 반응에 위철용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북북 긁었다.
심상세계에선 내가 성좌에게 너무 의지하느니 뭐니 호통을 쳐댔던 위철용이지만, 아무래도 일말의 미안한 감정은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본존의 조언대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지 않았더냐?]
“그렇긴 해도 어르신 몸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지만요.”
심상세계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긴 했으나, 애석하게도 위철용을 상대하기엔 아직 무리였다.
그렇게까지 발악했지만, 심상세계 속에서 난 단 한번도 위철용에게 유효타를 먹이지 못했으니 말이지.
폭풍처럼 엄습해오는 눈속임의 향연 속에서 위철용의 진정한 움직임을 화안금정을 사용해 포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운룡보를 해괴망측하게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그의 몸놀림을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비록 이 꼴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본존은 한때 천마라고 불렸던 몸이니라. 네놈의 어설픈 손속으론 백년은 이르지!]
…다음엔 기필코! 저 얄미운 얼굴에 창날을 박아 넣어주겠어.
팔장을 낀 채로 콧방귀를 껴대는 위철용의 도발섞인 광오한 발언에 나는 속으로 이를 북북 갈았다.
“…풉.”
위철용을 말없이 노려보던 나는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순간적으로 치솟은 투쟁심이 아쉬운 감정을 말끔히 날려버렸다.
그래, 성좌들의 반응을 당분간 확인하지 못하면 좀 어떠냐!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받은 후원 포인트들 소화시키는 것만 해도 벅찰 지경이었으니, 이 기회에 온전히 소화해 보실까?
“…?”
어라? 잠깐만 이 옷은 또 뭐람?
마음을 고쳐먹고 주먹을 불끈 쥐려던 순간, 허옇고 나풀나풀한 소매가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내려 몸을 내려다보니, 어째선지 난 갑옷과 장비가 벗겨진 채 허연 환자복만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아, 설용호 헌터님? 일어나셨네요?”
현재 내 상태에 의문을 표하려던 찰나 침대를 둘러싼 녹색 커튼이 홱 하니 젖혀졌다.
그러더니 커튼 사이로 새하얀 의료가운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이곳 의무실을 담당하고 있는, 의무실 실장 임영성입니다.”
의무실 실장. 요컨대 의사 양반이라는 뜻이다.
임영성은 어딘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이트에서 나오기 무섭게 쓰러지신 뒤로, 지금까지 죽은 듯 잠만 주무시던데 몸은 좀 어떠십니까?”
임영성의 입에서 ‘지금까지 죽은 듯 잠만 잤다.’라는 말이 흘러나온 순간. 내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 빌어먹을 심상세계에서 시간을 많이 소모하긴 했었지….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러버렸을까?
“주, 죽은 듯 잠만 잤다구요? 호, 혹시 제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을까요?”
모름지기 근육을 최고의 값어치로 삼는 보디빌더에겐 근손실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인 만큼, 향상심을 모토로 자신의 발전에 몰두하는 헌터에겐 경험치 손실만큼 두려운 것도 없는 법이다.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임영성에게 내가 얼마간 잠들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리…. 오래 누워계시진 않았습니다. 한 일곱 시간 정도 주무셨겠네요.”
내 눈빛이 오죽 절박해 보였던 것일까?
임영성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프로 의료인답게 그는 이내 표정을 바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정신을 잃은지 일곱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일곱…. 시간이요?”
뭐라고? 일곱 시간? 심상세계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고작 그거밖에 안 됐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일곱 시간이란 단어를 되되자, 임영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걱정이 가득한 어투로 나를 찬찬히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설용호 헌터님. 아무리 헌터로 각성하셨다지만, 하루에 일곱 시간 이상은 푹 주무셔야 일상에 지장이 없습니다. 듣자 하니, 지난 사흘 동안 하루에 세 시간도 안 주무셨다죠? 그러니까 이번에 그렇게 픽 쓰러지신 게 아니겠습니까.”
휴식을 권하는 임영성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군. 내가 경악한 포인트는 그쪽이 아닌데 말이지.
심상세계에선 못해도 일주일은 있었던 것 같은데. 고작 일곱 시간 밖에 흐르질 않았다니 어떻게 되어먹은 시간 관념이야.
[현실에서의 시간의 흐름과 심상세계에서의 시간의 흐름은 엄연히 다른 법이니라. 그래서 말하지 않았더냐. 뭔가를 수련하는데 그곳 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뭐…. 그렇긴 하네요.”
“예, 그렇죠. 앞으로 좀 휴식 좀 넉넉히 취하시면서 건강하게 활동하십쇼. 아무리 헌터라고 해도 그렇지. 젊을 때, 그렇게 무식하게 몸을 놀리시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계속해서 이어지는, 임영성의 잔소리에 가까운 덕담에 적절히 맞장구를 쳐준 뒤.
나는 침대 밑에 곱게 개어있던 장비들을 모조리 챙겨,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저, 저기 설용호 헌터님 아냐?”
“세상에 어쩜!”
의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주섬주섬 장비를 모두 착용한 채 로비로 들어섰다.
로비에 들어서자, 순간적으로 주변의 이목이 내게 확 집중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잘 생겼을까.”
“괜히 별명에 ‘얼굴’이 들어가겠어? 아아…. 한번 손이라도 잡아봤으면.”
…착각은 아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계속해서 나를 소재로 한 가십거리들이 들려왔다.
구석에서 은은하니 들려오는 루머와 가십거리의 향연에 정신을 잃으려던 찰나….
“이야아! 이거 설용호 헌터님 아니십니까. 어제 쓰러지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몸은 좀 어떠십니까?”
게이트 관리소의 소장 허준범이 내게 안부 인사를 건네왔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뭣보다 길드장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오늘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윽 오글거려.
허준범의 환대에 가식적인 미소를 지은 나는 공명심에 취한 신입 헌터의 모습을 연기했다.
속이 절로 느끼해질정도로, 내 정신건강 및 소화 사정엔 영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관리소장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이 정도 수고는 충분히 감내할 만한 일이었다.
“세상에 요즘 세상에 이처럼 성실하시다니. 정말이지 용호 씨는 요즘 헌터들 답지 않으시군요! 과연, 길드장님께서 게이트 패스를 선사하신 분 답습니다.”
공명심에 절은 초보자 행세가 잘 먹힌 것일까?
처음엔 나를 반쯤 자살희망자 내지, 특이한 별종으로 취급했었던 허준범의 눈빛이 우호적으로 변했다.
그의 눈빛엔 성실한 후배를 바라보는 선배의 기특한 감정이 듬뿍 묻어 있었다.
“그럼. 게이트 좀 열어주시렵니까? 어차피 재생성까지 이틀 남았으니. 마지막까지 힘내봐야죠.”
****
《메히요오오옷!》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극도로 흥분한 램 헤드는 나를 향해 달려들어왔다.
욕구에 지배당한 놈의 움직임은 역시나 이번에도 살벌할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잔뜩 흥분을 머금고 붉게 달아올라 번들거리는 근육은 사람 한 명쯤은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 죽여 버릴 정도의 완력과 순발력을 머금고 있었다.
먼젓번이라면 흥분한 램 헤드의 움직임에 쉽게 압도당했겠지만….
-츠츠츠츳
“이번엔 다르지!”
나직하게 뇌까리며, 나는 화안금정을 발동시켰다.
화안금정이 발동되며 눈에서 황금빛 안광이 뿜어졌다. 시야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난폭하게 달려드는 램 헤드의 일거수일투족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램 헤드가 어디를 노리는지!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올 예정인지!
황금빛으로 물든 시야 사이로 수없이 많은 정보가 말 그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부우웅!
나와 강렬한 포옹을 하기 위해 달려드는 램 헤드의 손길을 미끄러지듯 여유 있게 피해 냈다.
곧이어 욕망과 분노에 취한 램 헤드가 마구잡이로 내지르는 손길 역시 스르륵 미끄러지듯 움직여 멋들어지게 모조리 피해 냈다.
마치 구름 속을 거니는 한 마리 용처럼 스르륵 스르륵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운룡보!
운룡보를 습득한 덕분에, 나는 램 헤드의 공격을 더욱 수월하게 피하고 있었다.
이렇듯 화안금정과 운룡보. 이 두 가지 스킬이 엄청난 시너지를 불러일으켰다.
궁합이 잘 맞는 스킬을 동시에 운용하는 시너지 효과는 덧셈이 아니라, 곱셈이 되었다.
나는 어제와는 다르게 완벽하게 램 헤드의 움직임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야 좀 쓸 만해 보이는군.]
위철용은 퍽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메헤헤헷!》
램 헤드는 뒤늦게 폭발하여 씩씩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재빨리 내게 뛰어왔다.
하지만, 내겐 놈의 움직임 자체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보였기에 놈은 내게 어떠한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운룡보를 사용해 황금빛으로 물들어버린 시야 속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구름 속을 신비롭게 거니는 한 마리의 용처럼. 나는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램 헤드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다.
-투콰카카칵
램 헤드의 지척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심상세계에서 미친 듯이 연습했던 연포. 오룡격이 펼쳐졌다.
창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섯 마리의 용이 아가리를 쫙 벌린 채 램 헤드를 물어뜯었다.
《메헷!》
램 헤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아든 창의 몸통을 붙잡으려 했지만….
《메에?》
소용이 없었다.
허공을 허무하게 손짓한 램 헤드의 입에선 이내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휘청!
날아든 다섯 마리의 용 중, 네 마리는 눈속임!
거하게 허공에 헛손질한 램 헤드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몸을 휘청거렸다.
육중한 몸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콰드드득!
나는 그 거대한 몸이 기우뚱 기울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네 개의 눈속임 속에 가려졌던 공격이, 램 헤드의 숨통을 와드득 물어뜯었다.
단단한 가죽이 부욱 찢어졌다.
《메에에에엑!》
****
“이걸 전부 판매하시겠다구요?”
마지막까지 램 헤드들을 탈탈 털어먹은 뒤.
나는 그동안 모아온 램 헤드의 정수를 모조리 거래소 직원 앞에 와르르 쏟아내었다.
알록달록한 구슬모양 정수의 개수는 물경 예순 개였다.
지난 5일여간의 결실이 자그마한 데스크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세상에. 정말 포인트로 안 바꾸셔도 되겠어요? 이걸 전부 판매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점원은 별 별종을 다 본다는 눈빛으로 계속해서 내 의사를 물어댔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포인트는 괜찮습니다. 아직 여유가 좀 있거든요.”
포인트?
성좌님들의 넘치는 사랑으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 바로 존재력 포인트였다.
비록 위철용의 활약(?)으로 당분간 채널을 확인할 수 없게 되긴 했다만, 그래도 아직까진 충성심 넘치는 우리 성좌님들께서는 내게 맹목적인 후원을 보내오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포인트 따위가 아니라 돈이었다.
기본적으로 길드에 상납해야 하는 2할의 소득을 제하고 나면 매니저와의 수익분배는 기본적으로 3대 7이다.
게이트 알선, 등 기타 귀찮은 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매니저는 3을 뗴준 뒤 남은 7의 비율이 내 몫이다.
거기에 세금이니 뭐니, 떼야 할 게 많으니까 당분간은 돈을 축척하는 게 우선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실천하려면 상당히 돈이 많이 들 예정이거든.
“죄다 현금으로 바꿔주십쇼.”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돈을 요구하자, 관리소 직원은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