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메호호홋호! 호홋호!》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잔뜩 흥분한 듯한 램 헤드의 울음소리에, 등에 닿을 듯 말 듯 뜨겁게 뿜어지는 거친 콧김과 심상치 않게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
지금의 난, 잔뜩 흥분한 램 헤드 한 마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부와아앙!
상반신이 선뜩해지는 느낌과 함께 바람을 찢어발기는 듯한 파공음이 들리자,
나는 반사적으로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이로 램 헤드의 근육에 뒤덮인 손이 내 머리 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메호옷!》
[아깝다♡ 라고 하는구나.]
“으어어어 그딴 거 일일이 해석 안 해 주셔도 됩나다아앗!”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도, 친절하게 램 헤드의 언어를 번역해주는 위철용의 친절함(?)에 치가 떨려왔다.
목표 지점에 다다르자, 비명 지르듯 위철용에게 항의 섞인 고함을 내지른 뒤.
-콰악!
몸을 던지듯 날려,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나무의 늘어진 가지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램 헤드 역시 나를 따라 나뭇가지에 매달렸으나, 애석하게도 연약한 나뭇가지로는 300kg가 훌쩍 넘어가는 육중한 근육 덩어리를 버틸 수 없었다.
-우지직
램 헤드가 붙잡은 나뭇가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뚝 분질러졌다.
《메호오오오오오》
놈은 애달플 정도로 가녀린 울음소리만을 남기며, 벼랑 아래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흐어억 흐어어어….”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욕지기가 뒤를 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이번에도 정절을 지키는 데 성공했구나. 에잉! 가끔은 좀 당해줘도 재밌을 것을….]
위철용의 끔찍한 농담을 귓등으로 흘려보낸 채. 나는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최초로 램 헤드의 정수리에 창날을 박아 넣은 이후, 어느새 사흘이란 시간이 지났다.
사흘이란 기나긴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램 헤드를 손쉽게 사냥해왔고, 맛집이란 명성에 걸맞게 레벨도 금방금방 올렸었는데….
사건은 오늘 아침 이곳에서의 네 번째 레벨 업이 끝난 직후 발생했다.
적절히 스탯을 배분하고 평소처럼 램 헤드와 마주한 뒤, 놈이 방심한 틈에 목숨을 빼앗으려던 찰나…!
《메호웃 호홋!》
나와 시선이 마주친 램 헤드의 눈빛이 갑자기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놈은 극도로 흥분한 듯 뾰족한 울음소리를 내지르곤 전신의 근육을 부풀렸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램 헤드의 몸이 폭발적으로 1.5배는 부풀어 올랐다.
초콜릿과 유사한 갈색 빛을 띠고 있던 육체는 이글거리는 눈동자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괴상한 냄새와 함께, 놈의 입가엔 부글부글 게거품이 끓어올랐다.
말 그대로 욕구에 눈이 멀어 광란 상태에 빠져버린 것!
《메헤엣!》
욕구에 지배된 인간은 평소의 일곱 배에 달할만큼 바보 같은 괴력을 낸다고 했던가?
그렇게 욕구에 지배된 램 헤드들은 평소 신체 능력의 족히 여덟 배는 되어 보일 정도로 무식한 힘을 발휘했다.
-우지끈!
낭창낭창 가지를 늘어뜨린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램 헤드의 돌진에 수수깡처럼 우지끈 부러졌다.
램 헤드의 앞을 가로막는 나무들이 말 그대로 분쇄되기 시작했다.
거뭇한 피부를 벌겋게 물들인 채. 콧김을 씩씩 뿜어대며 돌진해오는 램 헤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나와 마주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욕구에 사로잡힌 램 헤드를 상대하는 방법은 딱 하나.
조금 전에 한 것처럼 벼랑 끝으로 놈을 유인해 중력과 가속도의 힘을 빌리는 것뿐!
물론, 광란 상태에 빠진 램 헤드가 고작 이 정도 높이에서 굴러떨어진다고 즉사한다던가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어디 한군데는 부러지는 부상과 함께, 벼랑을 기어오르느라 체력을 소모시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뿌드드득
순간, 나무뿌리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벼랑 아래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양 머리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메. 홋. 호》
굳이 한 글자 한 글자 끊어서 말하는 울음소리.
위철용이 굳이 해석을 해 주지 않아도 대충 무슨 의민지 알 것 같았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겪는 일이지만, 새삼스레 본능적인 위기감이 엄습해왔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빌어먹을. 저 눈빛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군.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눌러 참으며, 나는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호호호홋호!》
동시에, 벼랑을 기어오른 램 헤드가 다이빙하듯 내게 몸을 날려왔다.
확실히, 벼랑을 기어오르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했기 때문인지.
놈의 몸놀림은 아까만큼은 날래지 않았다.
침착하게 놈의 접근을 창으로 저지하며, 놈과의 대치를 이어나간다.
-후옹! 후옹! 후오오옹!
오로지 나를 붙잡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램 헤드의 무식한 손놀림!
단순히 나를 붙잡기 위해 휘두르는 손짓이었지만, 욕구에 지배된 램 헤드의 손짓은 차마 그 궤도를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속도를 자랑했다.
놈의 손이 흐릿해질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까앙! 까앙! 까아아앙!
내력을 집중시킨 창대로 램 헤드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흘려보냈다.
창대를 비스듬히 세워 충격을 최대한 흘려보냈지만, 창대와 램 헤드의 손이 부딪힐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창대를 꽈악 틀어쥔 손아귀가 얼얼했다.
《메호오오옷!》
순간. 뾰족한 울음소리와 함께, 램 헤드가 몸을 숙이곤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어찌나 빨랐는지, 잠시나마 놈의 움직임을 시야에서 놓쳐버렸다.
“치이이잇!”
선득한 기분이 들어 허리를 뒤로 접어버리듯 황급히 몸을 눕혔다.
-후와아앙!
그야말로 간발의 차!
양손을 교차하여 짓쳐들어온 램 헤드의 손길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복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부와아아악!
“치이잇!”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는 램 헤드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지만.
그 손길에 살짝 스친 옷자락은 놈의 괴력을 이기지 못한 채, 부우욱 찢어졌다.
“치이잇!”
옷자락이 찢어져 순식간에 배가 훤하니 드러났다.
울끈불끈. 여섯 조각으로 완벽하게 갈라진 식스팩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합니다! 백합을 손에 쥔 처녀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250 후원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가뭄을 노래하는 시인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200 후원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장미를 두른 과부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250 후원하였습니다.」
…미친.
복근이 노출된 순간. 어마어마한 포인트가 주르륵 들어왔다.
빠른 레벨 업으로 인해, 요 몇일 동안 가뭄 상태였던 존재력 포인트가 순식간에 빵빵하게 차올랐다.
최근엔 좀 조용하게(?) 나를 감상하나 싶었더니, 노출이 드러난 순간 성좌들은 주저하지 않고 내게 후원을 보내왔다.
《메호오…?》
노출에 대한 격한 반응은 비단 성좌들뿐만이 아니었다.
내 노출을 바로 눈앞에서 라이브로 관람한 램 헤드 역시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놈은 잠시 굳어버린 듯 멈칫 행동을 멈추더니….
천천히 시선을 내려. 손에 쥐고 있는 찢어진 나의 옷자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후욱! 후우욱!》
…그리고 기행이 시작되었다.
램 헤드는 갑자기 내 옷자락을 자신의 얼굴 전체에 덮었다.
그리고는 마치 약쟁이가 마약을 흡입하듯 숨을 거칠게 들이쉬기 시작했다.
어찌나 숨소리가 거셌는지, 뜨뜻하고 불쾌한 콧김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후후훗 메훗》
습하 습하 계속해서 숨을 거칠게 들이쉬는 램 헤드의 목소리가 점점 괴상망측해졌다.
보통 이해의 범주를 넘어가는 무언가를 목격한 순간, 혼란에 빠진 이성이 정상적인 사고를 중단한다고 했던가?
지금의 내가 딱 그 짝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초현실주의적 광경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으하하핫. 으하하하핫! 크학 크헥 켁! 으하하하하하]
…지는 중요하지 않겠군.
배를 부여잡고 숨이 넘어가라 웃어 재끼는 위철용의 모습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썅.”
어째선지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강렬한 수치심이 엄습해왔다.
-콰아악!
치밀어 오른 욕지기와 수치심을 원동력 삼아 창대를 불끈 틀어쥐곤, 아직도 자신의 각별한 변태성을 유감없이 선보이는 램 헤드를 살의를 담아 노려보았다.
“…?”
…어? 잠깐만. 쟤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 아닌가?
여전히 얼굴 전체를 뒤덮은 옷자락의 냄새에 심취한 램 헤드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푸우욱!
벼락처럼 놈의 턱 바로 아래에 내력을 듬뿍 주입한 창날을 박아 넣었다.
《꺄호호홋!》
기묘한 비명과 함께, 램 헤드의 얼굴을 덮었던 옷자락이 붉게 물들었다.
다른 놈들보다 유난히 각별한 변태성을 자랑했던 놈답게, 경험치 또한 각별했던 모양이다.
얼굴을 덮은 천을 붉게 물들인 채, 쓰러진 램 헤드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무섭게 상태창에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오기 시작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새로운 특성 포인트가 제공됩니다. 특성 트리를 확인해 보…」
이곳에서만 벌써 다섯 번째로 맞이하는 레벨 업의 순간이 찾아왔다.
「재투성이 부엌의 수호자가 입장합니다.」
「이삭 줍는 소녀의 대변자가 입장합니다.」
언제나처럼 레벨 업과 동시에 채널에 두 명의 새로운 성좌가 또 입장해왔다.
언제나처럼 고개를 꾸벅 숙여, 가볍게 형식적인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레벨 업을 할 때마다 모든 헌터들이 외치는 약속된 단어를 읊조렸다.
“상태창 오픈.”
****
Lv.8 설용호
근력 165 민첩 165
재주 165 체력 165
행운 25 인지 25
내력 165 매력 165
-외모지상주의
-파천 복룡창
-일기당천
-화안금정
-낙오자들의 진혼곡
후원받은 존재력 포인트를 탈탈 털어 넣어 능력치를 올린 뒤.
방정맞게 계속해서 히죽 벌어지는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슬슬 누르며 흐뭇한 표정으로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튜토리얼이 끝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포인트 숍에 정수를 한 번도 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내 상태창의 주요 능력치들은 모두 최대한도까지 찍혀있는 상태였다.
비록 레벨은 여전히 고작 한 자릿수에 불과했지만.
능력치만 봐서는 회귀 전과는 감히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좌 어르신들!”
꽉꽉 들어찬 능력치를 보고 있자니 감격이 밀려왔다.
넘쳐흐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하늘을 향해 넙죽넙죽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거, 오늘따라 유난스럽기는, 그리도 고마우면. 왜. 감사의 의미로 네 몸뚱이라도 제물로 바쳐보지 그러느냐?]
연신 절을 올리느라 정신없이 흔들리는 내 어깨에서 위철용은 용케도 중심을 잡고 드러누워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나의 과민한 반응에 심드렁한 목소리로 비꼬았다.
하지만, 성좌님들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복한 나는 위철용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곤 연신 허리를 굽혀가며 성좌님들께 올리는 절을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북받혀오는 감격을 견디지 못한 나는 한술 더 떠서, 맨땅에 던지듯 몸을 날렸다.
그리곤 물구나무서듯 오직 팔로만 전신의 하중을 지탱하는 궁극의 절을 성좌님들께 올렸다.
[이런 미친…. …끼가.]
격렬한 움직임에 우당탕 넘어진 위철용이 나직한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반응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이 전부 다 성좌님들의 은혜로운 후원 덕분이었으니까!
그분들 덕분에 값비싼 정수를 소모하지 않고도 여유롭게 능력치를 올릴 수 있었으니, 어찌 이렇게 감사를 표하지 아니하리오!
“…….”
순간, 회귀 전의 음울하기만 했던 후원 내역이 떠올랐다.
당시 성좌였던 위철용이 잊을 만하면 조금씩 개미 눈물만큼 후원을 해 주긴 했지만….
그 쥐꼬리만한 존재력 포인트로 능력치를 올리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 시절의 나는 능력치 올리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정수를 구매해야만 했었다.
쓰라린 과거와 빛나는 현실이 교차되었다. 다시금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 존재력 포인트! 그 뜨거운 사랑에 목메여어어.”
[…지랄하지 말고, 딱 거기까지만 해라. 응? 어차피 감사 인사고 뭐고 안 들린다니까?]
다시 한 번 궁극의 절을 올리려는 찰나, 위철용이 서늘한 목소리로 나를 멈춰 세웠다.
“…어, 음. 좀 과하긴 했네요.”
갑자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주는 위철용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 과할 정도로 오버했나 싶어. 뒤늦게 민망함이 슬슬 몰려왔다.
위철용의 따가운 시선에 어쩐지 뒤통수가 간지러워졌다. 멋쩍게 애꿎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래. 그쯤 해두고. 이젠 본존과 약속했던 것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 능력치 배분이 끝난 다음엔 당연지사 특성을 찍을 차례다.
“특성 트리 오픈.”
나직하게 중얼거려 특성 트리를 열자, 시야가 순간적으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이윽고 밤하늘처럼 껌껌하게 물들어버린 시야 사이로 알록달록한 별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오밀조밀하게 떠오른 별들은, 이내 ‘끝없는 고행의 길’ 특성 트리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이번에 찍을 특성은….”
왼쪽 구석. 다른 별들과는 달리, 보랏빛 선으로 연결된 별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초급 창술….”
그동안 찍은 특성을 눈으로 훑어가며, 무심결에 가장 최근에 찍었던 특성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크아아악! 그놈의 초급 창술! 그딴 거 찍어봤자 떠오르는 기억이 거의 없다시피 한단 말이다! 도대체 어떤 자식이 특성 트리를 만들었길래. 그딴 쓸모없는 것들을 그득그득 집어넣어 놔서는!]
‘초급 창술’이란 단어가 내 입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위철용이 발작하듯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투덜거린 것처럼. 아무래도 초급 창술 같은 패시브 형태의 특성에 포인트를 투자해 봤자, 위철용이 되찾는 기억은 거의 없다시피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난 사흘간 줄기차게 ‘초급 창술 같은 패시브 형태의 특성만 찍어왔기에.
지금의 위철용이 패시브 형태의 특성에 노이로제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라? 운룡보네요?”
하지만. 이번에 찍을 특성의 이름은 바로 운룡보였다.
초급 창술, 정밀 타격, 체력 증강 등의 시답지 않았던 특성과는 격이 다른 특성이다.
구름을 거니는 용의 발걸음이란 거창한 이름에 걸맞게, 운룡보는 그야말로 파천 복룡창의 든든한 기초가 되어주는 중요한 특성이었다.
이거라면 위철용도 진짜배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거다. 슬슬 그의 반응이 기대 되는군.
[뭐, 뭣? 운룡보? 그래. 그래! 그런 걸 좀 찍으란 말이다! 나는 기억 찾을 수 있어서 좋고, 너는 유용한 무공 배워서 좋고!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더냐!]
위철용 답지 않게 더듬거리는 말투, 여유를 잃어 다급해 보이는 표정까지.
역시. 운룡보쯤 되는 특성의 이름이 언급되자 위철용은 꽤 볼만한 반응을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운룡보에 포인트를 투자하라며 재촉하는 위철용의 눈빛엔 약간의 광기까지 실려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보는 모습이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모습이란 말이지…. 무인에게 있어 무공에 대한 기억이란 대체 뭘까.
“그렇게 조바심만 내셔 봤자. 다 순서가 정해져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위철용의 어쩐지 ’깨는‘ 태도에 속으로 쓴웃음을 집어삼키며, 나는 운룡보에 특성 포인트를 하나 투자했다.
「운룡보」
등급 : 희귀
효과 : 구름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흉내 낸 보법을 습득합니다.
『“언젠가는 흙탕물을 헤엄치는 잉어조차, 구름을 거니는 용으로 승천할 수 있느니라.”
“그게 참말이에요 스승님? 저도 언젠간 교주님을 모실 수 있을까요?”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제자의 순수한 질문에, 스승은 오늘도 목이 메입니다.
“그, 그럼. 당연하지! 그, 그렇고말고.”
과연, 스승의 말대로 제자는 흙탕물에서 벗어나,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을까요?』
-스파아앗!
운룡보에 특성 포인트를 투자한 순간!
왼쪽 구석의 파천복룡창과 연결된 별 전체가 보라색으로 번쩍 빛났다.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이 밀물처럼 듯 밀려와 각인되기 시작했다.
운룡보의 복잡한 구결과 그것의 신묘한 발놀림을 어찌 응용해야 하는 지에 관한 지식이 습득되었다.
이어서 어떻게 해야 몸을 빨리 놀릴 수 있는지, 또 그 몸놀림을 어찌해야 파천복룡창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번에도 모든 지식들은 머릿속에 각인되기 무섭게 자연스럽게 몸으로도 체득되었다.
“크으으. 그래 이거지! 이거야!”
밀려들어오는 지식의 향연에 벅찬 희열이 느껴졌다.
램 헤드 따윈 이제 정면에서 박살 내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팽배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어떤 가르침을 내려주실….”
[…그래, 어렸을 적의 본존은 그런 꿈을 품고 있었지. 승천이라…. 승천이라….]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지식을 보충하기 위해, 위철용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밀려드는 기억의 파도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운룡보가 파천복룡창의 핵심이 되는 스킬이니 만큼, 되찾은 기억 역시 각별한 것인 모양이었다.
허공에 헛손질까지 해대며 기억의 편린을 더듬는 위철용의 얼굴엔 이제껏 찾아볼 수 없었던 아련한 감정마저 떠올라 있었다.
“…….”
혹시나 추억에 잠긴 위철용을 방해라도 할 세랴.
나는 그에게서 말없이 물러나, 게이트에서 철수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슬슬 해가 저물어 가고 있기도 하고, 오늘은 유난히 힘들었으니….
평소보다 두어 마리 정도는 덜 잡고, 일찍 철수해도 되겠지.
****
-지끈!
보랏빛으로 번쩍이는 게이트에 막 몸을 실으려던 찰나.
갑자기 시야가 어찔하게 흔들렸다. 곧이어 골이 흔들리는 것 같은 두통이 찾아왔다.
“큭! 이, 이건 또 무슨!”
어찔하게 흔들린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두통은 현기증이 되어, 순식간에 내 몸에서 균형감각을 앗아가 버렸다.
허공에 열없이 팔을 허우적거리던 몸이 이내 균형을 잃고 제법 요란하게 넘어졌다.
-콰당탕
한 바퀴 구르듯 화려하게 넘어졌지만,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항거할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아, 안돼… 으득!”
-콰직
폭력적으로 엄습해오는 졸음에 항거하기 위해, 억지로 혀를 깨물었다.
얼얼한 통증과 함께, 약간 이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몸이 물을 흠뻑 머금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젠장. 몸이 완전히 잠에 쩔어 버린 듯한 느낌이군.
왈칵 밀려든 핏물과 욕지기를 꿀떡 삼키며, 나는 보랏빛 균열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뭔가 뜨뜻한 것에 몸을 굴리듯 집어넣은 순간.
-화아아앗!
무거운 눈꺼풀 위로 강렬한 보랏빛 빛무리가 내려앉았다.
[어엉? 뭐야. 왜 네놈과 본존의 심상세….]
“설용호 헌터님?”
어느샌가 정신이 돌아온 모양인지, 뭔가 당혹스러운 어투의 위철용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와 당황한 게이트 관리직원들의 다급한 외침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