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체액을 흩뿌리며 쓰러진 개체를 마지막으로, 침식체로 변이되었던 한라 공격대원들이 모두 무력화되었다.
-콰직!
내력이 주입되어 웅웅 떨리는 창날을 이용.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몸을 꿈틀거리는 침식체의 머리를 하나하나 정성껏 부쉈다.
-꾸르르르륵
침식체의 머리가 완전히 부서질 때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침식체의 몸에서 검은색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더니….
《끼야아아악》
이내, 요란한 비명만을 남기고 하나씩 하나씩 소멸했다.
한라 공격대원들의 거죽 아래서 꿈틀거리던 이계의 존재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역소환 된 것이다.
-스파아아앗.
이계의 존재들이 몸에서 빠져 나가자, 희미한 빛이 번쩍이며 침식체로 변이했던 한라공격대원들의 육신이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애송아?]
침식체로 변했던 한라공격대원들의 시체를 뒤져볼까 생각하려던 찰나.
갑작스레 위철용이 나를 불러 세웠다.
“네?”
생각이 끊긴 탓에 다소 얼빠진 어투로 위철용에게 대답하자.
그는 턱짓으로 내가 등에 메고 있는 배낭을 가리켰다.
[아까 침식체에게 한 대 얻어맞았을 때. 네놈의 배낭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서 말이다.]
뭐?
위철용의 말을 들은 순간 잡스럽던 떠올랐던 온갖 의문들이 뚝 멎었다.
등줄기가 축축해졌다.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에,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초월급 아이템인데 설마…?”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떨리는 손으로 등에 멘 배낭을 벗어들었다.
“그, 그렇죠? 설마하니 부서졌겠어요?”
수전증이라도 걸린 듯, 마구 흔들리는 손으로 배낭을 열어 내부를 확인한 순간!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버렸군.]
사고가 딱 정지했다.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등줄기로 소름이 타고 올랐다.
격렬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울렁울렁 춤을 췄다.
“아, 아니. 이게 어떻게?”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손을 배낭 속으로 쑤욱 집어넣어 별자리 인도석을 집어 들었다.
“미친.”
단말마처럼 멋대로 튀어나온 외마디 욕설이 지금의 내 심정을 대변했다.
한때 일확천금의 상징으로 불렸던 물건이자. 내게 본격적인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줄 예정이었던 별자리 인도석은, 이제 깔끔하게 반으로 쩍 갈라져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쯧쯧 그러게, 조심 좀 하지는]
“아, 아니야 이거! 붙일 수 있어 붙일 수 있어!.”
분노를 받아들이는 5단계 과정의 첫 번째가 부정이었던가?
현 상황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갈라진 단면을 몇 번이나 다시 맞춰보려 시도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깔끔하게 반으로 쩍 갈라진 단면은 무슨 수를 써도 다시 들러붙지 않았다.
[뭐, 그래도 어차피 네놈에겐 별자리 인도석이라는 게, 길드 등급을 올리는 것 외엔 별로 쓸모가 없는 아이템이 아니었더냐?]
위철용은 위로해준답시고 어깨를 툭툭 두드렸지만.
그의 위로는 애석하게도 내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분노의 두 번째 단계가 찾아왔다.
“썅! 말은 쉽지! 이거 말고 대 침식까지 길드 등급을 올리만한 게 몇 개나 있다고!”
속을 활활 태울듯한 분노가 찾아왔다. 솟구치는 분을 이기지 못해.
위철용에게 포효하듯 속사포처럼 짜증을 내뱉었다.
그랬다.
애석하게도 별자리 인도석 만큼 단숨에 길드 등급을 올릴만한, 일확천금의 기회 따윈 당분간 존재하지 않았다.
한 달 후에 일어날 대 침식 전까진 대부분의 게이트 보상이 다 그저 그런 수준에 불과했다.
[대 침식?]
나의 짜증 섞인 분노를, 히죽 웃으면서 능글맞게 받아치려던 위철용이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대 침식’이란 단어를 되뇌어 본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아냐, 지금 단계에 그럴 리가 없지. 애송아. 네놈이 말한 그 ‘대 침식’이란 것이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더냐?]
잠시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린 위철용의 표정은 내가 그동안 봐왔던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지한 표정이었다.
표정만 진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지. 배후령의 작달막한 몸에서 심상치 않은 위압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거 있잖습니까. 게이트가 주변을 침식하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몬스터들의 침공이 시작된 사건.”
갑자기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내게 질문하는 위철용의 모습에 솟구쳤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더듬더듬 대 침식이란 개념에 관해 설명한 순간!
[후우. 그럼 그렇지. 괜한 걱정이었군.]
사방을 가득 메웠던 강렬한 위압감이 순식간에 씻은 듯 사라졌다.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위철용의 얼굴이 예의 그 익살맞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흐음. 네놈들은 그걸 대 침식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불렀나 보군. 고작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 것에 불과하거늘….]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턱을 어루만지던 위철용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엔 신경 쓰이는, 아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단어가 포함되어있었다.
대 침식이 ‘두 번째 단계’라고? 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두 번째…단계요? 그렇다는 건 설마 세 번째. 네 번째도 존재하는 겁니까?”
위철용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필멸자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지. 잘 듣거라 게이트가 출몰한 이유는 원래 비##는 #### #을 ##기 #해…]
마치 라디오 채널을 불완전하게 맞춘 것처럼 위철용의 발언엔 기묘한 잡음이 군데 군데 끼어있었다.
[허허. 이 모양으로 영락하고 나서도 ###에 대해 언급조차 할 수가 없다니…. 뭐, 아무튼 앞으로 그 네놈이 말한 ‘대 침식’ 같은 ‘변화’가 두 번쯤 더 있을 거라, 생각하면 쉬울 게다.]
위철용은 계속해서 잡음이 끼는 것이 아쉬운 모양인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엄청난 발언을 내뱉었다.
“…세상에. 대 격변, 대 침식 같은 비극이 두 번이나 남았다니….”
대 격변 후에 찾아온 대 침식.
대(大)라는 단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대 격변으로 인류가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면.
대 침식으로 인류는 더는 이 행성의 주인이 아니게 되어버렸으니까….
게이트에 거점까지 세워놓고 신간 편하게 소재들을 채취하는 짓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대 침식 이후는 지옥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언제 어디서 게이트가 열려, 주변이 침식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되었으니까.
그런데, 그 정도 규모의 비극이 두 번이나 남았다고?
“…그렇다면, 정말이지 어떻게든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는 소리네요.”
순간, 절망 비스무리한 감정이 찾아올 뻔…. 했으나.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뭐 때문에 기껏 회귀까지 했으면서 계속해서 고생을 자처해왔던가.
우드득
뼈마디에서 우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주먹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내력이 요동치며, 말아쥔 주먹에 파괴적인 힘이 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놈이 믿었던 별자리 인도석이 깨져버린 판이니,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겠지.]
피시식
막 마음을 다잡고, 나의 굳은 맹세를 만천하에 알리려던 찰나.
위철용이 시기적절하게 찬물을 끼얹었다.
“…예. 상기시켜 주셔서 고맙네요.”
그래. 문제는 별자리 인도석이 깨어져서, 빠른 성장을 위한 게이트 출입권을 얻을 길이 요원해 졌다는 것.
“게다가. 안종훈 그 새끼한테 물려서 몇 달, 아니 어쩌면 몇 년이나 시간을 낭비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실제로 원 역사에서 나는 태백에 들어온 지 석 달이 채 못 돼서 안종훈 손에 누명을 쓰고 노예 신분으로 영락하고야 말았다.
대 침식 이후, 헌터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대가 찾아와, 일선에서 수많은 공을 세워 간신히 노예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만….
위철용의 말대로 앞으로 재앙이 계속해서 닥쳐올 것을 알아버린 이상. 그 행보를 밟기엔 죽어도 싫다.
“그렇다면 방법은 성실하게 레이드 팀에 합류하여 공을 세우는 것뿐인데….”
[그래, 때로는 정석적으로 단계를 밟아가는 길이 빠른 경우도….]
“하지만 그래서는 늦죠. 아마 안종훈 그 새끼가 어떻게든 수작질을 시도할 텐데.”
순간적으로 안종훈의 재수 없는 낯짝이 떠올랐다.
그렇다. 뭣보다 가장 큰 문제는 안종훈의 존재다.
어떻게든 하루빨리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회귀 전 역사에서처럼 놈의 마수가 내게 뻗쳐올터!
놈이 개수작을 부리기 전에, 하루빨리 강해져야 하는데 말이지.
톡톡
과거의 지식을 빠르게 훑어가며, 애꿎은 별자리 인도석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반으로 박살 난 단면을 까드득 까드득 문지르며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내력을 실으니….
반짝.
내력이 주입된 인도석의 파편에서 희미하게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내력이 이런 식으로 주입되면 예쁜 황금색 광채가….
“으응? 잠시만 황금색 광채?!”
인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색 광채를 목격한 순간, 머릿 속에 벼락이 쳤다.
보통의 경우 부서진 아이템은 파손된 즉시 그 값어치를 잃어버린다.
손상된 아이템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이 빠져 나가, 한낱 잡동사니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지.
내력을 주입하든, 마력을 주입하든, 차크라를 주입하든.
이미 부서져서 마력이 빠져 나간 아이템은 돌멩이나 마찬가지라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상식인데….
“꿀꺽.”
긴장감에 침을 꿀떡 삼키며.
조심스럽게 부서진 인도석의 파편에 내력을 조금씩 조금씩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부우우웅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물이 스며들 듯.
부서진 인도석의 파편은 나의 내력을 끊임없이 갈구하며, 게걸스럽게 탐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파아아아앗!
“크읏!”
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황금빛 광채가 인도석의 파편 두 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초월급 성유물. 별자리 인도석이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버린 세상 속에서, 시스템 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신규 스킬 ‘낙오자들의 진혼곡’을 습득합니다.」
「낙오자들의 진혼곡」
분류 : 발동형
등급 : 초월
효과 : 멸망한 세계에서 끝까지 분투했었지만, 끝내 낙오해버린 낙오자들의 힘을 빌려옵니다.
두 눈을 멀게 만든 금빛 광채가 사라지자, 시스템 창의 메시지가 똑똑히 보였다.
시스템 창을 가득 메운 ‘스킬 습득’ 메시지를 확인하자 순간적으로 사고가 뚝 멎었다.
“뭐, 뭐라고?!”
화안금정에 이어, 회귀 전에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기묘한 스킬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낙오한 자들의 힘을 빌려 온다고? 대체 이건….
“…!”
의문을 품은 순간, 내 눈앞에 새로운, 반투명한 창이 떠 올랐다.
다른 것과는 달리 새롭게 떠오른 시스템 창은 은은한 황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접촉할 수 있는 낙오자들의 명단을 불러옵니다.」
간략한 메시지와 함께 황금빛 시스템 창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수레 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경고. 사용자의 레벨이 낮습니다.」
「경고. 사용자의 레벨이 낮습니다.」
바퀴가 얼마간 회전한 순간, 갑자기 경고 메시지가 시스템 창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뭐지? 사용자의 레벨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스킬인가?
「사용자의 현 레벨에 맞춰, 접촉 가능한 낙오자들의 명단만이 표시됩니다.」
「현재 접촉할 수 있는 낙오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물에 투신한 황녀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
-동백나무에 목을 맨 직공
…뭐가 이렇게 음울해?
약간의 대기시간 끝에 표기된 접촉 가능한 낙오자들의 명단은 ‘낙오자’라는 음울한 이름 탓일까? 어째선지 하나같이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와 동기화합니다.」
“동기화라는 게 대체 무엇….”
말을 끝맺을 새도 없이, 머릿속으로 새로운 기억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황금빛 시스템 창 위로도 정신없이 새로운 메시지들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경고, 대상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동화율이 낮습니다.」
「동화율 10%,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의 스킬 중 한 가지만을 일시적으로 복사합니다.」
「복사한 스킬은 제한시간 『한 시간』 동안 지속 됩니다.」
시스템 창의 메시지대로 동화율이 낮은 것 때문인지.
물밀 듯 밀려왔던 기억들을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마치 꿈이라도 꾼 듯 정신 없이 밀려왔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던 기억과 정신없이 주르륵 올라가던 메시지가 뚝 멈추자.
황금빛 시스템 창엔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에게서 복사한 것으로 추측되는 스킬 하나만이 떠올라 있었다.
「가면 놀이」
분류 : 발동형
등급 : 영웅
효과 : 한 번이라도 접촉한 적이 있는 사람을 완벽하게 흉내 내는, 궁중 광대의 기본 소양입니다.
“대체 이건 또 무슨….”
폭풍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간 뒤,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그래, 도대체 또 뭔 일을 겪었길래 정신나간 놈처럼 제자리에서 부르르 떨기만 했느냐?]
옆에서 위철용의 약간 걱정 냄새가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말이죠. 새로운 스킬을 얻었는데…. 크윽!”
위철용에게 새로 얻은, 스킬. 낙오자의 진혼곡에 대해, 막 설명하려던 찰나.
머리가 욱신거리는 느낌과 함께 뒤늦게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를 부여잡을 새도 없이. 머릿속으로 스킬 ‘가면놀이’에 대한 지식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함부로 만지면…]
위철용은 옆에서 뭔가 걱정 섞인 조언들을 계속 늘어놨지만, 그의 조언을 들을 만큼 내 머릿속은 여유롭지 못했다.
계속해서 지식이 주입되는 사이. 머릿속을 번뜩 스치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어라? 잠깐만. 한 번이라도 접촉한 적이 있는 사람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다고?
두통으로 욱신거리는 시야 사이로 나영욱의 처참한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