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VIP 휴게실의 욕실은 어지간한 고급 스파 부럽지 않았다.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널찍한 욕조에 누워 휴식을 취하려니, 위철용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계획인가 뭔가를 어떻게 앞당길 생각이더냐.]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는 위철용에겐, 계획을 앞당긴다는 것 자체가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인지. 그의 눈빛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는 회귀 전에 했던 것처럼 차근차근 의뢰를 수행해서 계급을 올린 뒤, 게이트 출입권을 확보할까 생각했었는데….”
[생각했었는데?]
“생각이 변했어요. 내일 날 밝는 대로 본사에 달려가서 공격대에 합류할 겁니다.”
[공격대? 혼자서 다 독식하겠다는 놈이 공격대에 들어가?]
공격대에 합류한다는 말이 못마땅한 모양인지, 위철용의 말투엔 묘한 불만이 묻어 있었다.
“안종훈이 저를 노리고 있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급을 올리다간 늦어요.”
그랬다.
감찰팀인 안종훈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나를 노리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게이트 출입권을 획득하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컸다.
때문에, 그의 눈을 피해, 계급을 올리는 방법을 모색하던 도중.
앞으로 한달 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놨던 그 물건이 번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앞으로 한 달 후에 발견될 ‘그것’을 제가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면. 안종훈 따위의 눈치 따윈 볼 필요 없이 한방에 높은 자리로 도약할 수 있죠.”
[그것…? 서, 설마 네놈 그걸 차지하려고!]
반응을 보아하니,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위철용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것 같았다.
그래, 헌터 업계를 그렇게 뒤집어 놓은 물건이니, 성좌라는 양반이 모를 리가 없겠지.
“예, 공격대에 들어가는 이유도 그겁니다. 지금 ‘그것’이 잠들어있는 게이트는 그 공격대에서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허나, 네놈도 알지 않느냐?. 회귀 전, 그때 ‘그것’을 손에 넣은 녀석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론 잘 알고 있다.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르고, 거대한 유명세엔 거대한 음모가 꼬이는 법!
업계에 둔중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물건이니만큼, 그것을 손에 넣은 이들은 엄청난 유명세를 획득할 수 있었지만,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영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고야 말았었다.
“이미 각오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고작 그 정도 유명세로 만족할 생각 따윈 제 계획에 없으니까요.”
내 목표는 ‘어설프게’ 유명해지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 누구의 눈치 따윈 볼 필요 없을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
‘그것’을 획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명세조차, 내겐 그저 잠시 지나쳐 나가는 단계에 불과하지!
중소 규모의 길드를 거대 길드의 한 축으로 성장시킨 유명세조차.
내게 있어선 고작해야 안종훈의 견제를 피하기 위한 수단 이상의 가치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래야지!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하는군!.]
내 포부에 만족한 모양인지, 위철용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크게 만족을 표했다.
****
“허. 설마 이런 것까지 준비해 뒀을 줄은 몰랐는데.”
휴게실에 마련된 욕실에서 목욕을 즐기고 나온 뒤,
욕실 바로 옆에 비치된 옷장 문을 열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것? 고작해야 옷 아니더냐.]
“이게 평범한 옷은 아니라서요.”
제법 큼지막한 옷장 속은 유명 브랜드의 옷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헉 소리가 나올법한 고가의 명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회귀 전에도 여벌옷을 제공해주긴 했으나, 기껏해야 제휴 업체에 협찬 받은 운동복 정도였지.
이런 식으로 옷장 속에 명품 옷이 가득 차 있는 광경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휴게실 앞에서 헤어지기 직전, 신지현이 지었던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봐선 그녀가 준비한 것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사이즈까지 딱 맞네.”
회귀 전부터 신지현의 행동력이 대단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긴 했지만.
벌써 내 속옷 사이즈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엔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신지현과 접촉한 것이 오늘 점심께였지 아마?
그녀의 수완에 감탄과 소름을 동시에 느끼며, 옷장에서 옷을 아무거나 하나 꺼냈다.
“세상에.”
매무새를 고치기 위해 거울을 바라본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가뭄을 노래하는 시인이 당신의 미색을 소재로 한 시를 짓습니다.」
「백합을 손에 쥔 처녀가 쉴 새 없이 당신의 모습을 찬미합니다.」
「당신의 미색에 장미를 두른 과부의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녀가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축하합니다! 백합을 손에 쥔 처녀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200 후원하였습니다.」
『나, 나는 이제 죽어도 좋아.』
「축하합니다! 장미를 두른 과부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200 후원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훈훈한 복장을 입었으면 좋겠구나. 예쁜 아이야.』
「경고. 존재력 포인트 최대 한도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초과한 존재력 포인트 50이 자동으로 환불처리 됩니다.」
「고통을 모르는 병사가 가슴을 부여잡습니다.」
「가시나무를 짊어진 노인이 당신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성좌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이 증명하듯,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예술 그 자체였다.
한 폭의 화보와도 같다는 관용구 정도로는 지금의 내 모습을 충분히 묘사하지 못할 정도!
두 성좌의 열성적인 후원 덕분에 존재력 포인트 또한 순식간에 가득 채워졌다.
고작 옷 좀 잘 입었다고 400이나 준다고?
허, 참….
[네, 네놈 그게 대체 무슨!]
그 위철용마저도, 잘 차려입은 내 모습을 보고 말을 더듬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빈말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옷을 차려입은 나는 평소의 몇배에 다다르는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애초에 못생긴 얼굴 탓에 패션과는 담을 쌓고 살았거니와.
잘생겨진 이후에도 이것저것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꾸며본 적이 없었기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거, 앞으로 패션에도 좀 관심을 가져봐야 하나?
-똑또독똑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독특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 들어오세요.”
빠끔 열린 문 너머로 나타난 얼굴은, 그 놀라운 수완의 주인공인 신지현이었다.
“와씨 대박.”
방 안으로 들어온 신지현 역시, 내 모습에 홀랑 넘어갔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몽롱하게 풀렸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경박한 단어의 조합을 내뱉었다.
“신 팀장님?”
신지현이 한참이나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자, 나는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손을 맞부딪혀 짝짝 소리를 냈다.
“예? 어? 어머, 내가 지금 무슨….”
그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신지현은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하여 허둥거렸다.
그새 침까지 흘린 모양인 양, 그녀는 서둘러 입가를 훔쳤다.
[그 사갈 같이 표독했던 계집에게 이런 얼빠진 모습이 있다니. 사람 일이라는 게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고.]
신지현의 멍하니 바보 같은 모습이 퍽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는지, 그녀를 그토록 싫어하던 위철용마저 킬킬거리며 웃었다.
“휴, 휴게실은 어떠셨나요? 따 따뜻한 물은 잘 나오던가요?”
“아, 예 신경 써 주신 덕분인지 뜨뜻하게 잘 나오더라구요.”
허둥대며 화제를 돌린 그녀의 말을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받아주자,
역효과가 일어났다. 슬쩍 새빨개졌던 신지현의 얼굴이 잘 달궈진 쇠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 아무튼, 본론으로 넘어가서 저를 찾으셨다는데, 그 이유를 좀 여쭤봐도 될까요?”
“태백 길드의 공격대, ‘한라’에 가입하려는데 절차가 뭔지 궁금해서요.”
내 입에서 ‘한라’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신지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그 충격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한라요? 다른 좋은 곳도 많은데 왜 하필, 그 꼴통 새끼들…. 어머. 실례. 흐흠. 흐흐흠!”
그들에 대해 영 좋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어선지, 순간적으로 그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나름대로 이미지 관리에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신지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올 정도라니.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연신 헛기침을 하는 신지현의 모습에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흐음…. 하지만, 한라에서 공략 중인 게이트를 가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푸흡!”
계시라는 소리에, 신지현이 막 들이켜려던 물을 거칠게 내뿜었다.
그러면서 사례라도 들린 모양인지, 그녀는 연신 기침을 계속해댔다.
“흐. 흐흡 하아. 죄송합니다. 지금 계시라고 하셨나요?”
“네, 성좌께서 그쪽 게이트로 들어가라 계시를 내리셔서….”
계시.
간혹가다 성좌가 내려주는 특별임무를, 헌터들은 ‘계시’라고 불렀다.
성좌쯤 되는 존재가 극소수에게만 내려줬기에, 그 계시를 해결하고 받는 보상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때문에, 신지현이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계약한 헌터가 성좌에게 계시를 받아오다니!
아마 그녀의 심장은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일걸?
“하아…. 어쩌지. 길드장님께선 절대 한라로 신규 인원들을 보내지 말라고 하셨었는데.”
길드장에게 뭔가 지시를 받은 것이 있는지, 계시라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언급했음에도 불구.
신지현의 얼굴엔 일말의 망설임이 남아있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신지현이 계속해서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눈을 크게 뜨고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간절함을 가득 담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흡! 으으…어쩌지. 하, 할수 없죠. 제가 다 알아서 진행해볼게요. 내일, 내일 정도에 본사 건물에 들러 제 사무실로 와주시겠어요?”
눈빛 공격이 제법 효과가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신지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작별인사와 함께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계시라니! 미친놈아. 사기 칠 게 따로 있지 계시를 함부로 입에 담아!]
그녀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위철용이 고함을 내질렀다.
“어차피 성좌 그 양반들 필멸자들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다면서요?”
자신을 후원해주는 성좌들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하는 헌터들에게 있어.
‘계시’를 사칭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 행위로 받아들여질 만큼 엄청난 짓이었다.
나 역시, 위철용이 ‘성좌는 필멸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라고 증언해주지 않았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방법!
[끄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계시’로 사기를 친 놈은 역사상 네놈이 최초일 게다.]
“그래서 신지현이 껌뻑 넘어간 거 아니겠습니까. 아마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서는 못 배길걸요?”
****
VIP 휴게실의 푹신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날이 밝자마자 짐을 챙겨, 태백 길드 본사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려, 태백 길드의 으리으리한 본사 건물에 들어선 순간.
“…세상에.”
누군가의 탄성과 함께, 웅성거리던 소리가 딱 멎었다.
본사 건물 로비엔 상당히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음에도 불구, 로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 집중되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야?”
“대박.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이네, 그래픽!”
일부는 나의 외모에 경탄했는지, 다소 무례하게 느껴진다. 싶을 정도로. 내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외모에 대한 감상을 수군거리고 있었고.
“혼자서 피켈 무리를 전부 쓰러뜨렸대.”
“미친, 특성도 없는 상태로 피켈 무리를 상대했다고? 저거 미친놈 아냐?”
튜토리얼에서 파란을 일으켰다는 신지현의 말이 사실인 듯.
일부는 내가 튜토리얼에서 보여준 업적에 대해 수군거리며,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회귀 전엔, 길드 로비에 들를 때마다. 동물원에서 탈출한 침팬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었는데 말이지….
단박에 집중된 시선이 괜스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왠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세상에! 그분께서 방금 나를 보셨어!”
“아니야, 네 뒤의 안내 포스터를 보신 거야.”
“저길 봐! 지금 내게 손을 흔들어주셨어!”
“아니야. 당신의 곁에 붙은 파리를 쫓으신 거야.”
…가볍게 손만 흔들었을 뿐인데. 상상외로 큰 소란이 벌어졌다.
광기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 표정으로 깍지낀 양손을 들어 올리려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도망치듯. 로비를 지나. 신지현의 사무실로 향했다.
****
“길드에서 헌터님의 인기가 보통이 아닌가 본데요? 오늘이 첫 출근 아니었던가요?”
사무실로 들어서자,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신지현이 짓궂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하하, 그러게요. 제게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실 줄은 몰랐는데.”
신지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사무실의 얇은 벽 저편으로는, 내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어제 말씀드린 건 어떻게 되었는지….”
내 입에서 매니저라는 세 글자가 튀어나온 순간, 신지현의 눈빛이 일순 몽롱하게 풀렸다.
싱긋 미소를 짓고 있던 입 역시 순간적으로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아유, 아무렴 우리 헌터님 부탁이었는데, 당연히! 출근하자마자 연락드렸었죠.”
신지현은 서랍에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냈다.
“인사명령서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