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세상에! 설용호 헌터님! 이렇게 연락에 응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미리 연락받은 대로 고풍스러운 식당 앞에 도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단정해 보이는 검은 정장 차림의 여인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깐깐해 보이는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연신 호들갑을 떨며, 나를 반겨주는 젊은 여인.
태백 길드의 헤드헌터 신지현.
[이 계집은 그때 네놈에게 그런 짓을 했던 계집이 아니더냐?]
위철용의 말처럼 회귀 전에도 면식이 있었던 인물이다.
정확하게는 그냥 면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와 전속 계약을 맺고, 매니저로 들러붙어 내 일거수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던 인물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태백 길드가 보낼만한 팀장급 헤드헌터는 그녀밖에 없으니까요.’
[쯧. 그 계집에게 그렇게 뒤통수를 맞아놓고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던 추억 탓인지. 위철용의 말투엔 불쾌한 기색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때 실컷 당했으니. 이번엔 다를 겁니다.’
물론, 나라고 오늘의 만남이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시 태백 길드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 시점에서 신지현과 접촉할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그녀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직접 대면하자. 해묵은 증오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속이 메슥거렸다. 뜨끈한 것이 뱃속 깊은 곳에서 요란하게 마구 요동쳤다.
“이렇게 환대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반갑습니다. 설용호입니다.”
불쾌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저희 길드를 선택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태백 길드 영업팀의 팀장 신지현입니다.”
이쪽이 인사를 건넨 것에 화답하듯. 신지현은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였다.
회귀 전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녀의 정중한 인사에 내 눈이 살짝 커졌다.
시종일관 깐깐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신지현에게 이렇게 공손한 면이 있었나?
“하하, 사내라면 모름지기 최고를 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핸드폰 하면 금성! 헌터 하면 태백! 한국에선 상식이지요!”
계속해서 밀려들어오는 과거의 잔향을 머릿속에서 애써 털어버린 채.
이번엔 가벼운 농담과 함께 신지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머나. 무슨 말씀을…. 헌터님과 인연을 맺게 되어 오히려 저희가 영광이지요.”
그녀는 송구스럽다는 듯 연신 허리를 굽실대며, 공손하게 두 손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정말이지 뱀처럼 간교한 계집이로다. 이 계집이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보일 정도라니. 튜토리얼 타워에서 뭔가 대단한 짓을 저지른 모양이로구나.]
회귀 전, 신지현의 모습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태도에 위철용이 질렸다는 듯 비아냥 섞인 감탄을 표했다.
‘그것보다는 윗선에서 제게 그만큼 상품 가치가 있다고 여긴 거겠죠.’
[상품 가치라고?]
‘제가 팔릴 만하다고 평가내린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지현쯤 되는 인간이 저렇게 고개를 숙일 리가 없거든요.’
회귀 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신지현의 태도를 접하자 입꼬리가 절로 비틀렸다.
S급을 획득해버렸기에, 어느 정도 저쪽에서 저자세로 나올 것은 예상했는데….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신지현이 이런 태도를 보일 정도란 말이지.
[상품 가치는 얼어 죽을! 그냥 쳐들어가서 시원하게 골통을 결딴내자니까. 복잡하게 생각하기는…. 에잉!]
아직도 내가 태백 길드에 가입하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은지, 위철용의 말투에서 불쾌한 기분이 뚝뚝 묻어나왔다.
뭐, 나라고 꼬장꼬장한 간부 놈들의 머리통을 때려 부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내로라하는 길드들이 게이트를 독점하고 있는 현시대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전엔 적절한 길드를 이용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하물며, 지원을 빵빵하게 넣어줄 수 있는 길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헌터님?”
내가 마음속으로 위철용과 대화하고 있는 사이.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기 때문인지.
신지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하하, 팀장님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아차 싶은 마음에 임기응변이 절로 발휘되었다.
초면에 대단히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을 만큼 느끼한 멘트였지만, 잘생겨진 외모가 무서운 시너지를 발휘하였다.
그 위력은 매사에 깐깐한 신지현마저 사춘기 여학생마냥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게 만들 정도!
“흐읍. 여,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쪽으로 드시죠.”
그녀는 내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화제를 돌려 식당 안으로 들어갈 것을 제의했다.
“그러지요. 안내해 주시겠어요?”
신지현의 제의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녀는 살짝 허둥대며 나를 식당 내부로 안내하였다.
기억 속의 신지현답지 않은 너무도 이질적인 태도에 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녀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단 말이지….
어쩌면 일이 좀 더 쉬워지겠어.
****
“여, 여기가 헌슐랭 3 스타를 받은 식당이라고 하더라구요”
너스레를 떠는 신지현의 말처럼, 만남 장소로 예약된 식당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호오….]
못마땅한 표정으로 뚱하니 있던 위철용 마저 나직하게 감탄을 터뜨릴 정도.
전통적인 분위기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거대한 정원 사이로 자그마한 별채들이 군데군데 퍼져있는 독특한 구조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이 정도 부지의 식당이라니….
“저희 태백에선 설용호 헌터님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고급스럽게 꾸며진 별채에 들어가자. 신지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튜토리얼에서 보여주셨던 인상적인 활약에, 길드장님께서도 부족하지 않게 접대하라, 특별히 지시하셨을 정도였거든요.”
길드장이 직접 지시했다라….
태백 길드의 길드장 강태백의 노회한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노친네가 직접 나섰을 정도라면, 튜토리얼 타워에서 열심히 구른 보람이 있었군. 그래.
“하하, 그 정도였습니까. 이거 영광이네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신지현을 바라보자, 그녀는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설용호 헌터님꼐서 튜토리얼 타워에서 보여주셨던 모습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으니까요.”
미소에 직접 노출된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신지현은 잠깐이나마 말을 더듬었다.
회귀 전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에 내 눈이 다시 한 번 이채를 띠었다.
“과찬의 말씀을. 운이 좋아서였죠.”
시험 삼아 다시 한 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신지현의 눈을 그윽하게 마주 보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역시, 이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그녀의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바라보는 내 눈이 교활함을 머금었다.
“저, 저희 길드에서 헌터님께 보장해드릴 수 있는 내역입니다.”
그렇게 한창 고개를 푹 수그린 상태로 얼굴을 붉히던 신지현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봐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
그녀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들고, 길드장 직인이 찍힌 문서 내용을 대충 눈으로 슬쩍 훑었다.
“확실히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라고 할 만한 혜택들이로군요.”
빈말이 아니었다.
대충 읽었음에도 불구, 당장 눈에 들어오는 내용 하나하나가 기가 막혔다.
회귀 전과는 감히 비교 자체를 불허할 정도.
말도 안 되는 비율의 수익 배당에, 명품 장인 길드에서 장비를 무상으로 협찬해주는 데다. 뭣보다 계약금이 그야말로 억 소리 나는 수준이었다.
하나같이 초보 헌터에게 지원해주는 것이라 보기엔 과할 정도였다.
“헌터님께선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계시니까요.”
계약서를 훑어보는 사이, 어느새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은 모양인지.
신지현의 얼굴이 원래 색을 되찾았다. 목소리엔 여유가 살짝 묻어나왔고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까지 감돌았다.
회귀 전. 질리도록 봤었던 그녀 특유의 ‘사람 좋은 표정’.
그땐 표정에 속아 넘어가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었던 서류에 도장을 꽝 찍고야 말았었다.
증오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그녀의 표정을 보자, 속이 메슥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와는 다르지. 칼자루는 내 손에 있으니까.
“확실히 괜찮은 조건들이긴 합니다만….”
살짝 기대의 빛을 띠고 있는 신지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일순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신지현 팀장님.”
남성 특유의 매혹적인 중저음이 나지막하게 퍼져 나갔다.
독을 품은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목소리가 신지현의 귓가를 간질였다.
“네, 네?”
그 목소리에 애써 페이스를 되찾은 신지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화악 붉어졌다.
“솔직히 제 입장에선 영광이긴 합니다만…. 팀장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는 신지현에게 그윽한 시선을 보내며, 가볍게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손 위로 은근슬쩍 손을 포갰다.
“흐이익?”
당황한 그녀의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행동이었음에도 불구, 그녀는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제 생각보단, 우선 팀장님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요.”
“제, 제 생각이라뇨?”
“아시다시피, 저는 이쪽 업계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신지현의 얼굴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포갰던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손에서 전해지는 따듯한 온기에 그녀의 눈이 순간 몽롱하게 풀렸다.
“팀장님께선, 앞으로 계속해서 저를 업계에서 이끌어주실 ‘소중한’ 분이니….”
다시 한 번 말꼬리를 흐린 채.
은근슬쩍 그녀 본인과의 ‘전속 계약’을 암시하였다.
고랭크 헌터와의 전속 계약.
쉽게 말해서 잘 나가는 헌터의 개인적인 매니저가 되는 것이다.
헤드헌터로 일선에서 뛰는 영업팀이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내용이 은근슬쩍 암시된 순간.
멍하니 풀렸던 신지현의 눈빛이 조금씩 욕망의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계속이요?”
멍하니 되묻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를 부드럽게 끄덕였다.
그 간결한 행동에, 멍하게 풀렸던 신지현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게다가. 앞으로 어쩌면 ‘개인적인’ 만남도 자주 있을 터이니….”
내가 내뱉었지만. 신지현에게 건넨 작업멘트는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허나, 현재의 내 외모는 그 어설픔마저 독특함으로 포장할 만큼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다.
“흐읍.”
그 증거로 욕망으로 물들었던 신지현의 눈빛이 정욕에 휩싸여 다시 흐리멍덩해졌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강렬해졌다. 달뜬 호흡이 테이블 너머까지 느껴졌다.
“그러니까. 잘 좀 부탁드릴게요. 우리 신지현 매니저님. 아니, 팀장님만 믿겠습니다.”
굳이 실수한 척, 매니저라는 칭호까지 사용하여 신지현의 욕망에 기름을 부었다.
“사, 사실은 이게 보장해드리는 것은 많아도 업계 표준 계약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불공정한 사항이….”
되었다. 욕망을 부채질한 보람이 있었다.
마침내, 무엇보다 원리원칙을 따져대는 깐깐한 영업팀장의 입에서 스스로 작성한 계약서의 허점을 자백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역시. 우리 신지현 팀장님께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길 잘했네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칭찬하자, 신지현의 입에서 계속해서 그녀의 욕망만큼이나 뜨거운 열변이 토해졌다.
표준 계약서는 무엇이 불공정하며, 길드에서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는지, 계약서에 숨겨진 함정이 무엇인지 등등 유용한 내용이 신지현의 입에서 좔좔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저희 길드와 전속 계약을 맺으시게 된다면 이런저런 혜택들을….”
은근슬쩍 전속 계약을 언급하며 은근한 욕망을 드러내는 신지현의 모습에 실소가 지어졌다.
전속 계약? 까짓거 해 주마.
어차피 회귀 전에도 신지현과 전속 계약을 맺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회귀 전엔 그녀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에 속아 넘어가, 많은 것을 빼앗겼었지만….
“…거기에 가입 시험에서도 제 재량으로 이 정도 장비들을….”
이번엔 내 차례라는 거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열변을 토하는 신지현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입꼬리를 뒤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