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정리 (4)
“에단 도련님…….”
휴고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그는 울먹이는 얼굴로 에단을 향해 다가왔다.
“아, 앉아 봐도 되겠습니까?”
“……이것들이 하나같이 왜 이래? 징그러우니까 꺼져.”
에단이 질색하면서 휴고를 밀어냈다. 휴고는 서러움이 뚝뚝 묻어 나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잔뜩 풀이 죽은 휴고를 보고 있자니, 에단의 마음도 썩 좋지 않았다.
실소를 터트린 에단이 휴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걸로 만족해라.”
“……헤헤.”
휴고가 해맑게 웃었다.
“다 큰 놈이 좋아하기는.”
피식 웃은 에단이 훈련하는 수인들을 바라봤다.
“훈련 중인가?”
“네, 렉사르 님이 지도 중이십니다.”
“짜식…… 그렇게 튕기더니 결국에는 하는구만.”
“헤헤. 렉사르 님한테 은근히 그런 면모가 있죠.”
“어? 지금 렉사르 뒷담하는 거야? 이거 안 되겠네…… 렉사르한테 다 말한다.”
“아, 아니…….”
휴고가 크게 당황해하며 이리저리 팔을 휘저었다. 그 순수한 반응에 에단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놀라기는. 가토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아…… 가토는 아마 지금 검술 지도를 하고 있을 겁니다.”
“짜식, 많이 컸는데? 새파랗던 애송이가 이제 누굴 가르치기도 하고 말이야.”
“헤헤. 저도 신기합니다. 지금 가토 보러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러려고. 너도 갈래?”
“가겠습니다!”
휴고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휴고는 아직 에단에게 듣고 싶은 말들이 많이 있었다.
* * *
“거기, 자세가 무너진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정신 안 차려?”
연무장에 날카로운 지적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토는 매서운 눈으로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토는 아주 사소한 실수들도 놓치지 않았다. 학생들의 얼굴에는 짙은 긴장감이 서렸다.
지적을 당하는 것은 두려웠지만, 그만큼 날카롭고 정확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훈련에 임하고 나면 항상 실력이 향상된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휘둘렀다.
연무장은 학생들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지만, 분위기는 싸늘했다.
가토는 한기가 흐르는 눈으로 학생들을 주시했다. 학생들은 지적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같이 이를 악물었다.
끼익.
연무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가토의 고개가 돌아갔다.
가토가 눈매를 찌푸렸다. 수업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한마디 해야겠어.’
휴고가 조급해하듯이 가토도 최근 예민한 상태였다.
한층 까칠해진 가토의 태도 탓에 학생들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열리는 곳을 가만히 차갑게 노려보던 가토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오랜만이다?”
에단이 손을 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가토는 입을 벌린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훈련을 멈추고 가토 쪽을 바라봤다. 가토는 급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오늘은 자율 훈련이다. 내가 없다고 게으름 피울 녀석은 없다고 생각한다.”
날카롭게 학생들을 훑어본 가토가 그렇게 연무장을 나섰다.
“오, 많이 컸는데? ‘내가 없다고 게으름 피울 녀석은 없다고 생각한다.’ 큭큭큭.”
“……놀리지 마십쇼.”
가토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가토는 에단과 휴고를 번갈아 바라봤다. 눈앞에 에단이 있음에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계획은 어떻게 된 거죠? 무사히 성공한 겁니까?”
“성공했으니까 이렇게 있겠지? 그나저나 나 없이도 잘 지냈나 본데.”
에단이 기특하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둘이 작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본 기념으로 가볍게 몸이나 풀까?”
뜻밖에 제안의 가토와 휴고가 서로를 바라봤다.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던 둘이 씨익 웃었다.
“……자신 있으십니까?”
“와…… 너네 아주 자신감이 가득하다?”
“흐흐…… 예전에 저희를 생각하시면 아주 큰코를 다치실 겁니다.”
“어쭈.”
가토와 휴고 모두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셋은 자리를 옮겼다. 굳이 이목이 쏠릴 만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셋이 향한 장소는 과거 드레이가 머물던 폐건물이었다. 그곳은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적당한 공터에 자리를 잡은 에단이 몸을 풀었다.
휴고와 가토는 비장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기긴 힘들어.’
‘지금 도련님은 최소 마스터의 경지.’
둘은 아직 마스터의 벽을 뚫지 못했다. 마스터와 최상급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굳이 이기려고 할 필요는 없어.’
‘딱 한 방. 딱 한 방만 먹이면 돼.’
가토와 휴고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함을 넘어서 비장함까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둘의 얼굴을 본 에단이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뭐, 나한테 원수졌냐? 왜 그렇게 진지해?”
“……각오하십쇼.”
“그동안 저희도 놀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휴고와 가토는 치열하게 훈련해 왔다. 둘은 매일 같이 서로 대련을 했고, 기회가 되는 날에는 첸과 네이드와의 대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히 결과는 참패였지만, 강자와의 대련은 둘을 성장하게 만들었다.
휴고와 가토는 지금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조급해하고 있었지만, 둘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네이드 님이나, 첸 경도 이제는 우리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버거워하셔.’
‘한 번 먹이는 것쯤은.’
“표정 살벌한 거 봐라…… 너희들 자신은 있냐?”
““네. 자신 있습니다.””
에단의 물음에 둘이 동시에 답했다.
“그럼 나도 안 봐준다?”
에단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오싹한 미소였지만, 휴고와 가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입니다.””
휴고와 가토가 동시에 에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휴고와 가토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둘의 동공이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대련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압도적인 패배.
결착은 순식간이었다.
휴고는 야수화를 한 채로 돌진했고, 가토는 오러를 끌어내며 모든 기교와 기술을 선보였지만, 에단이 뻗은 손을 피할 수 없었다.
가토는 손목을, 휴고는 발목을 붙잡혔다. 어떻게든 떨쳐 내려고 해봤지만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쾅! 쾅! 쾅!
에단이 둘을 사정없이 바닥에 내리쳤다.
그렇게 대련은 허무하게 끝났다.
대련의 결과보다 과정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기막혔다. 누구한테 보여 주기도 민망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질 수가 있지?
너무 황당한 나머지 별다른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냐?”
“…….”
휴고와 가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치열한 공방이라도 주고받았으면 그나마 할 말이 있었을 텐데 이건 너무 부끄러운 패배였다.
“실망이 큰데…… 내가 개같이 구르고 있을 동안 제대로 놀고먹었나 봐?”
“…….”
에단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둘은 역시나 할 말이 없었다.
“하, 한 번 더 가능하겠습니까?”
가토가 자존심을 버린 채 부탁했다.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 억울했기 때문이다.
“싫은데? 너 존나 약하잖아.”
“…….”
에단의 신랄한 거절에 가토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가토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본 에단이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농담이야. 근데 대련은 못해 줘. 갈 곳이 있거든.”
“……갈 곳이 있다고요?”
“어, 지금 막 돌아왔잖냐. 할 건 해야지.”
“지금 가시는 겁니까?”
휴고와 가토가 불안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어쩐지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에단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뭔가 이대로 훌쩍 떠나 버릴 것만 같았다.
“…….”
에단이 휴고와 가토를 바라봤다. 둘의 애처로운 눈빛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내가 뭐 죽으러 간다고 했냐? 징그럽게 왜들이래.”
“……일은 언제 끝납니까?”
휴고가 물었다. 에단은 잠깐 입을 다물다가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조금 미루면 안 됩니까?”
“안 돼.”
에단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둘의 눈이 또다시 흔들렸다.
“……돌아오시는 건 맞죠?”
에단은 태연하게 대답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거짓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에단이 침묵하고 있자, 둘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희한테는 말할 수 없는 일입니까? 왜죠? 저희가 약해서인가요?”
“…….”
“설령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듣고 싶습니다. 저희는 도련님의 기사니까요.”
휴고와 가토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많이 컸네.’
묘한 기분이다. 필요의 의해서 데려온 녀석이다. 겁 많은 하인과 콧대 높은 수습 기사.
그랬던 애송이들이다.
이 둘도 처음에는 에단을 많이 경계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진심을 다해서 에단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건 뭐라고 할까…… 꽤나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에단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
“…….”
휴고와 가토는 그 말이 거짓말임을 직감했지만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웃는 에단의 표정이 굉장히 슬프고 쓸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둘을 놔둔 채 에단은 어디론가 향했다.
* * *
에단은 곧장 빈센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빈센트는 돌아오자마자 온갖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집무실의 문은 첸이 지키고 있었다. 집무실에 있는 빈센트와 문을 지키고 있는 첸.
이 광경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으면서도 정겹게 느껴졌다.
늘 삭막한 표정을 짓던 첸이 에단을 보며 미소 지었다.
“반갑군요.”
“아버지 좀 뵐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첸이 슬며시 자리를 비켜 주자 에단이 노크했다.
“들어가겠습니다.”
빈센트의 대답도 들려오기 전에 에단이 문을 열었다. 빈센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버릇없는 놈.”
“뭐, 하루 이틀입니까?”
에단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아주 당당하구나.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지?”
“당분간 어디로 좀 떠날 생각입니다.”
“떠난다고? 어디를?”
빈센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있습니다.”
“……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에단은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빈센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아하니 허락을 구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통보를 하려고 왔군.”
“역시 아버지십니다.”
“이제 가주라고 부르지도 않는 거냐?”
“원래 저희 가훈이 그런 거 아니었습니까?”
“호오…… 지금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말을 하는 건가?”
“그럼요.”
에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조금 의심스러우면 보여 드릴 수도 있는데…… 한 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필요 없다. 괜히 아들한테 망신을 당하고 싶지는 않군.”
빈센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에단의 경지가 정상적인 범주를 뛰어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강자와의 대련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아비로서 아들에게 패하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