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6화] 정리 (2)
빈센트, 크리스토, 오르번과 헨리.
네 사람이 눈을 뜬 장소는 지하가 아니었다.
푸른 하늘, 화창한 날씨, 그리고 산뜻한 공기.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쾌청한 공기와 익숙한 마나가 느껴진다.
죽은 마나를 다루는 흑마법사인 오르번이 피식 웃었다.
“지하는 정말…… 못 살겠군.”
“큭큭큭, 흑마법사가 그런 소리를 하니 어이가 없군.”
크리스토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끝난 건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반복되는 삶.
그리고 거듭되는 실패.
크리스토는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감정이 닳고 닳아서, 이제는 타인의 죽음을 보아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과연 이게 옳은 삶인가?
크리스토는 한때 너무나 지쳐 죽음을 바란 적이 있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발악하고 발버둥 쳐도,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과거로의 회귀는 저주와도 같았다.
크리스토에게는 안식이 필요했다. 육체적인 그의 나이는 어렸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백 년을 가볍게 넘겼다.
그렇기에 실감 나지 않았다.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나.’
크리스토가 한 것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에단을 경계하고 방해했다.
명확히 적대적인 관계에서 협력을 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에단의 계획은 너무 무모했으며, 실현 가능성도 매우 낮았으니까.
하지만 시도해 보고 싶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결말은 예정되어 있었다.
에단에게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에단은 보란 듯이 계획을 성공시켰다.
괴물 같은 대군주를 굴복시키고, 고대의 힘을 손에 넣었다.
수차례 삶을 되풀이한 크리스토가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성공시킨 것이다.
대군주는 죽었다.
후에 또다시 지하의 침공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건 지금 걱정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뭐…… 준비는 해 둬야겠지.’
일단…… 일단은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동안 벌여 둔 일들을 수습하려면 급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뭐……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크리스토는 권태롭고 오만한 황자였다. 가신들과 귀족들에게 크리스토는 오만방자한 천재이자 황족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크리스토는 단 하루도 편히 쉬어 본 적이 없었다. 늘 조급했다.
정보를 모으고, 멸망에 대비하기 위해 잠을 줄였다.
크리스토는 냉혹하면서도 포악한 성징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단기간에 제국을 휘어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크리스토의 나이는 어렸고, 오랜 세월 동안 대륙의 주축을 차지하고 있던 귀족들은 하나같이 노회했다.
그들은 비정했고, 교활했다.
삶을 반복해 온 크리스토는 그러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뱀처럼 혀를 놀리는 노괴들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크리스토도 괴물이 되어야만 했다.
황자라는 신분일 때, 제국을 휘어잡고 영향력을 행세했다.
그 비정한 행보에 신하들이 두려움에 떨었지만, 크리스토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대륙을 지키는 것.
알량한 정의와 도덕관념으로는 대륙을 지킬 수 없었다.
인간의 본성은 추악하다. 크리스토는 인간의 욕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들을 억누르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공포와 권위가 필요했다. 그리고 크리스토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활용했다.
그렇게 옥좌에 올라섰다.
모든 계획이 틀어졌고, 실패를 직감했지만, 마지막이 되어서 모든 게 바뀌었다.
그야말로 전화위복.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
크리스토가 피식 웃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크리스토가 주위를 둘러보며 좌표를 찾았다.
부상은 모두 회복되었다. 자잘한 내상은 남아 있었지만 마법을 시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멀리에도 떨어트려 놨군.’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펼쳐진 갈대가 전부였다.
‘그래도 뭐…… 나쁜 기분은 아니군.’
공기는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연기한 여유가 아닌, 진짜 여유가 느껴졌다.
휘잉.
산뜻한 바람이 불자 갈대가 춤을 췄다. 크리스토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걸을까?’
제국의 황제로서 수습해야 할 일들은 많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무책임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머리 아픈 생각을 좀 내려놓고 싶었다.
“어떻게 할래?”
크리스토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빈센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크리스토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뭐, 우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만…… 좀 걸을까? 날씨도 좋은데.”
“…….”
빈센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목적이 같았기에 잠시 협력을 했지만, 빈센트는 아직 크리스토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저는 좋습니다.”
빈센트가 입을 다물고 있자, 헨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모처럼 날씨도 좋은데, 그냥 돌아가면 아쉽잖아요.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죠.”
“……하아.”
빈센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가끔은 그런 날도 있는 법이지. 어때, 자네도 같이 걷겠는가?”
“이미 알아서 결정해 놓고 빨리도 묻는군. 나도 이런 날씨를 싫어하지는 않아.”
오르번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
“컨셉 좀 지키지? 명색이 흑마법사면서 말이야.”
“선입견이 너무 심하군. 그렇게 따지면 그쪽도 흑마법을 다루지 않나?”
“나는 좀 다르지. 나는 두루두루 쓸 수 있잖아?”
“허, 언데드 군단과 데스 나이트를 다루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없군.”
“왜 지나간 얘기를 꺼내고 그래? 그때는 다 사정이 있었다고.”
“시작은 자네가 먼저 하지 않았나?”
“쯧, 그래. 내가 잘못했다. 이제 됐지? 옹졸하기는…….”
“지금 누구더러 옹졸하다는 거지? 내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런 소리는 지금 처음 듣는군. 오히려 옹졸함으로 따지면 네놈이…….”
“네놈? 지금 제국의 황제를 앞에 두고 평대를 하는 걸로도 모자라 네놈이라고 한 거야? 와……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그깟 신분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황제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그래, 나이 많이 처먹어서 좋겠다.”
“……방금 발언은 굉장히 불쾌하군.”
크리스토와 오르번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빈센트와 헨리가 기막힌 표정으로 바라봤다.
기분이 묘했다.
과연 정말 끝난 걸까?
아직 제대로 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군.’
빈센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무인으로서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뤘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주책이군.’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한계.
그것은 대체 누가 규정지었단 말인가? 빈센트는 스스로의 한계를 재단하고 말았다. 그건 넘을 수 없는 벽이라 단정 지은 것이다.
하지만 빈센트의 벽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었다.
빈센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카무잔의 싸움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군주끼리의 전투는 압도적이었다. 가히 신들의 전쟁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천지가 진동하는 싸움.
빈센트는 가슴이 뛰었다.
아직 나아갈 수 있다. 내 한계는 여기가 아니다.
빈센트가 쓰게 웃었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가주의 자리를 내려놓아야겠군.’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그는 가주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실패뿐인 인생이었다. 무인과 가주의 삶은 달랐다.
검사로서의 빈센트는 뛰어났지만, 가주로서의 빈센트는 부족한 것 투성이었다.
‘나는 떠날 것이다.’
개인의 욕심을 앞세운 무책임한 행동이었지만, 빈센트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홀가분했다. 늘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과 압박감이 없어졌다.
‘운으로 부지한 목숨이다.’
빈센트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교전 중에 뜯겨져 나갔던 오른손은 무사히 자리해 있었다.
목숨을 부지한 것도, 무인으로서의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모두 에단 덕이었다.
‘가주로서도, 아비로서도 실격이군.’
결국 이번에도 에단에게 의지하고 말았다.
“……저기 뭐가 오는 것 같은데?”
크리스토가 미간을 좁히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빈센트는 크리스토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정말이군.”
검은 무리가 접근하고 있었다.
말을 탄 무리였다. 추레하고 덥수룩한 행색과 말을 탄 것을 보아하니 도적들인 것 같았다.
“진짜 어이가 없네.”
크리스토가 실소를 터트렸다. 모처럼 여유를 만끽하나 했더니 이렇게 훼방을 당하게 될 줄이야.
“아…… 기분 엿 같네.”
크리스토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던 헨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제가 대충 돌려보낼까요?”
“됐어. 대충 내가…….”
크리스토가 신경질적으로 나서려 하자 빈센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가지.”
“……내가 간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내가 간다고 했을 텐데.”
크리스토와 빈센트가 서로를 노려봤다.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던 둘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쯧.”
“에휴.”
빈센트는 혀를 찼고, 크리스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캬하하하!”
“이게 웬 횡재야!”
도적들은 일행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도적의 삶은 궁색하다. 모든 생활이 약탈로 이루어지는 특성 탓이었다.
노력 없이 남의 것을 빼앗은 만큼 쉽게 없어지기 마련이다.
애초에 생각이 제대로 박인 이들이라면 도적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먹잇감이 가까워진다.
상대는 고작 네 명. 부담되지 않는 숫자였다.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죽이기에 충분하다.
“오, 계집도 있군. 너희들 복 받은 줄 알아라! 크하하하!”
도적들의 두목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도적들도 뒤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킥킥! 형님! 저 새끼들 칼 들고 있는데요?”
“크하하하! 머저리 같은 새끼들. 곱게 죽을 기회를 저버리는구나!”
“카핫! 애초에 곱게 죽일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까?”
“눈치 빠른 놈!”
도적들이 시시덕거리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상대가 무기를 들고 있는 건 중요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유무는 전투에 있어서 매우 큰 요소였다.
어설프게 칼을 휘둘러 봤자 말을 탄 상대에게는 피해를 입히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괘씸한 것은 사실이었다.
도적들이 입술을 핥았다.
그들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도적들은 대부분 매우 잔혹하고 비틀린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비명 소리 먼저 들어 볼까?”
이들은 비록 도적이었지만, 꽤나 실력이 있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적 중 한 명이 활시위를 당겼다. 말 위에서 활을 쏜다는 것은 결코 쉬운 행위가 아니었다.
활을 당긴 도적이 입맛을 다시며 활시위를 놓으려던 그때.
툭.
“어?”
도적이 멍청한 음성을 흘렸다.
활을 쥐고 있어야 할 자신의 팔이 없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