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5화] 정리 (1)
에단과 카무잔의 입장이 바뀌었다.
서열이 달라졌다. 카무잔은 서열이나 권위 따위에는 욕심이 없었다.
상황이 바뀌었다면 수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약자였고, 약자가 취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스윽.
카무잔의 상체가 낮아졌다. 속도에 치중된 위태로운 자세였다. 하지만 카무잔은 개의치 않았다.
맹수 같은 눈이 에단을 포착했다. 이제 에단은 카무잔을 상대로 긴장하지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카무잔을 바라봤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카무잔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며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먼저 끈을 끊은 자는 카무잔이었다.
쐐액!
카무잔이 쏜살처럼 질주했다.
허초나 속임수 따위는 섞지 않았다. 카무잔은 그런 잡다한 기술이 필요 없을 정도의 강자였다.
도전자가 달라졌다.
카무잔의 주먹에 검붉은 기운이 덧씌워졌다. 능히 산 하나를 무너트릴 힘이 카무잔의 손에 깃들었다.
눈으로 좇는 것조차 힘든 공격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카무잔의 눈이 짙은 흉성으로 번들거렸다.
공격의 궤적은 단순하다. 하지만 내포된 힘과 속도는 단순하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에단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카무잔을 상대할 때만큼은 무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에단이 몸을 움직였다. 카무잔의 공격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아무리 발악해 봤자 몸이 젖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빼곡한 공격에는 빈틈이 없다.
카무잔은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과거의 에단이었다면 스치는 것만으로도 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은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단이 한 손으로 카무잔의 공격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에단의 손에 은은한 빛이 스며들었다.
두 다리를 지면에 고정시킨 채 에단이 손을 움직였다.
스르륵.
신묘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물 위를 유영하는 것 같았다.
에단의 행동에는 조급함이나 다급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카무잔의 주먹이 밀려난다. 반발력은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격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과도 달랐다. 막강한 힘을 내포한 카무잔의 주먹은 대기조차 찢어발겼으니까.
카무잔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지 이건?’
실력 차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결과였다.
카무잔의 동요를 읽은 에단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된다. 이런 전투는 이제 에단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파밧!
카무잔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오르며 오러가 활화산처럼 분출했다.
“크아아아아―!”
카무잔이 괴성을 내질렀다. 공격이 거세지자 에단이 방법을 달리했다.
스윽.
에단의 발이 카무잔의 중심을 무너트렸다. 단순한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카무잔의 중심이 무너졌다.
‘뭐에 당한 거지?’
카무잔은 중심을 잃으면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인지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의 카무잔이라면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조잡한 공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조잡한 공격도 에단이 사용하면 달라졌다. 카무잔의 중심이 붕 떠올랐다.
카무잔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카무잔 수준의 경지라면 구태여 바닥에 발을 디디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카무잔이 순식간에 중심을 잡았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거리를 벌리려고 하자.
에단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붙잡고 그대로 당겼다.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무잔은 그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쑤욱!
어떠한 힘에 의해 카무잔의 몸이 끌려갔다. 저항은 의미 없었다. 그 힘은 감히 저항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니.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카무잔이 에단의 얼굴을 응시했다.
“하하.”
카무잔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에단의 표정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이거…… 내가 실수했군.”
카무잔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내가 오만했어.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상심하지는 말라고.”
“상심? 너는 아직 나를 잘 모르는 건가?”
카무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매우 호쾌하게 웃었다.
“‘지금은’ 내가 밀릴 뿐이야. 결국에는 내가 이긴다.”
에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무잔의 모든 공격을 읽은 에단이었지만, 지금 이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평소의 에단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카무잔이 에단의 얼굴을 보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 표정을 짓는군.”
“원래는 이상했나?”
“상당히. 너답지 않은 매우 엿 같은 표정이었지. 궁상맞은 얼굴을 한번 후려치고 싶었는데 아쉽군.”
“……쉽지는 않을걸.”
“조만간이니 기다리고 있어라.”
카무잔은 압도적으로 패배했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뭐, 그러면 열심히 해 보라고.”
“……이거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상당히 묘한데?”
“사실 나도 그래.”
피식 웃은 에단이 카무잔의 이마를 향해 딱밤을 날렸다.
콰앙―!
딱밤을 맞은 카무잔이 날아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에단이 손을 털어 내며 시선을 돌렸다. 아모드라와 두 명의 군주들은 경악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아모드라는 결과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유추했지만,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에단은 훨씬 높은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저건 대체…….’
범주를 넘어선 규격외의 힘이었다.
‘정말 신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아모드라는 평소에 평정심을 잘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 괴물 같은 카무잔이 아무것도 못 하고 패배했다. 전력으로 발악했지만 에단은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보다도 극명한 격차였다. 에단은 아직 지닌 힘의 절반도 끌어내지 않았다.
저런 존재가 신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아모드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러한 힘을 손에 넣었단 말인가?
‘하지만…….’
아모드라는 구태여 그것을 묻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깨달은 지혜였다.
아모드라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다. 이제 귀찮고 피곤한 것들은 사양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지?”
아모드라는 어서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회담지에서 벌어진 사건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 두 대군주가 사망했다.
욕심 많은 군주들은 공석이 된 대군주의 자리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아모드라도 적절한 대응을 취해야 했다. 갓 대군주의 위치에 오른 애송이는 꼭 사고를 치고는 했으니.
‘자칫하면 큰 전쟁이 벌어지겠어.’
벌써부터 귀찮음이 밀려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카무잔처럼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죄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모드라는 그런 대군주였으니까.
에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아모드라를 지그시 바라봤다.
“……뭘 그렇게 보고 있지?”
“알아서 가.”
“뭐? 지금 나랑 장난…….”
“농담이야.”
“…….”
까드득.
아모드라가 이를 갈았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감히 나를 능멸해?’
노기가 치밀었지만,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에단이 아모드라보다 강해졌기 때문이다.
간신히 분을 삭인 아모드라가 에단을 힐긋 바라봤다.
씰룩씰룩.
‘아…….’
에단의 표정을 보니 다시 한번 화가 치밀었다. 현기증이 들 정도였다.
“자, 그럼 이제 가자. 카무잔은 뭐…… 알아서 오지 않을까?”
“……그래.”
아모드라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카무잔은 어디서는 살아남을 녀석이었다.
적어도 이 지하에서는 카무잔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녀석을 제외하면.’
아모드라가 에단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에단이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그렇게 일행은 아모드라의 성으로 간단하게 복귀했다.
‘……결계 마법도 의미가 없군.’
자그마치 대군주의 성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마법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에단은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다.
기막힘과 허무함 따위의 감정이 밀려왔다.
“아모드라 님?”
로이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모드라를 바라봤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놀라웠는데, 그보다도 아모드라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로이드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아모드라를 모셨지만, 저렇게 피곤한 얼굴은 지금 처음 봤다.
“……잠시 쉬고 싶군.”
아모드라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드는 다급하게 말했다.
“이,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잠깐.”
에단이 아모드라를 멈춰 세웠다.
아모드라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에단을 노려보는 아모드라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또 뭐지?”
“얘들는 어떡할 거야?”
에단이 로이마르티와 록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둘을 힐긋 바라본 아모드라가 얼굴을 구겼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그걸 너한테 묻지 누구한테 물어? 난 이제 떠날 거야. 이제 쓸모없으면 그냥 여기서 죽이든가.”
흠칫!
로이마르티와 록사자가 화들짝 놀랐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이용해 먹을 만큼 이용했으니,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인가?
둘은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아무리 지하가 악랄하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둘의 눈시울이 벌게졌다.
억울함과 배신감, 서러움 따위의 감정이 북받쳤다. 툭 건드리면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
아모드라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록사자와 로이마르티를 바라봤다. 솔직히 이 둘이 죽든 말든, 아모드라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모드라는 자비롭지 않았다. 오히려 지하의 대군주다운 냉혹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설령 그 대상이 군주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상 저 표정을 보니,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라.”
“오…… 의외인데?”
“너는 대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지?”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이런 빌어 처먹을…….”
아모드라가 에단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아모드라가 에단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할 말이 끝났으면 빨리 꺼져라. 나는 좀 쉬어야겠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너희들은 잘됐다?”
““…….””
로이마르티와 록사자는 기막힘과 배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저게 할 말이란 말인가?
하지만 둘이 어떤 감정을 품든, 에단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에단은 록사자와 로이마르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난 간다.”
“……빨리 꺼져라.”
“튕기기는.”
피식 웃은 에단이 아모드라의 성을 나섰다.
“조금만 더 기다려. 금방 끝나니까.”
에단이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