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3화] 타이탄 (1)
“……큭큭, 내가 실수했군. 주제 파악을 못 했어.”
“그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결말은 예상하고 있지?”
“……죽여라.”
페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쥐었다. 페온은 눈을 감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페온의 행동이 이해가 된 것도 아니다. 아직도 에단은 페온의 집착이 비틀렸다고 생각했다.
그저 에단은 단순한 순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패자의 처분은 승자에게 달려 있었다. 결국에는 끝까지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초연하게 눈을 감은 페온.
은은한 빛을 머금은 에단의 검은, 희지도 검지도 않은 오묘한 색을 띠었다.
스윽.
검 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단순한 직선의 움직임이었지만 깊은 묘리를 품고 있었다.
스르륵.
페온의 목이 저항감 없이 떨어졌다. 깔끔한 절단면.
페온은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에단의 검 앞에서는 해당되지 않았다.
목이 잘리고, 머리가 떠올랐다.
에단은 페온의 잘린 머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고통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에단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에단이 페온의 머리를 응시하자, 이내 검붉은 불꽃이 페온의 몸과 머리를 집어삼켰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은 순식간에 페온을 소멸시켰다. 페온은 잿더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완전히 사라졌다.
싸움은 끝났고, 승자는 에단이었다.
고개를 든 에단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는 아직 어두웠다.
에단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순식간에 어둠이 걷히고 주위가 밝아졌다.
에단은 페온이 소멸한 곳을 흘겨보더니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네?”
“……누구 덕분에.”
“그래도 제때 왔잖아?”
크리스토의 삐딱한 대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다들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한쪽 팔을 잃은 빈센트였다.
빈센트는 멍한 얼굴로 에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딱.
에단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일행들의 상처가 모두 회복되었다. 통째로 뜯겨나간 빈센트의 팔도 되돌아왔다.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정말이지 신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마음 좀 놓으시죠.”
에단은 여전히 특유의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에단이 보여 준 기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일행들은 모두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에단이 보여 준 힘을 봤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이제야 에단다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너는 신이라도 된 건가?”
아모드라가 물었다.
그는 대군주 중 하나였지만, 에단이 지닌 힘이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측정할 수 없는 힘. 마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신은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됐던지 신이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결국에는 성공하다니, 진짜 어이가 없군.”
“내가 성공할 거라고 했잖아.”
에단이 득의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재수 없는 태도에 크리스토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미소 지었다.
“그래. 너 잘났다.”
“나는 원래부터 잘났어.”
“큭큭큭큭.”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던 에단은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주인은 카무잔이었다.
카무잔은 말없이 에단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열의와 열망 따위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에단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카무잔은 정말이지 한결같은 남자였다.
“금방 끝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정말인가?”
“뭐야, 날 못 믿는 거야? 좀 실망인데.”
“아니! 그럴 리가!”
카무잔이 다급하게 반박했다. 그 순수한 모습에 에단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지만…… 조금 미룹시다.”
“그게 무슨…….”
크리스토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에단의 행동이 그보다 빨랐다. 에단이 손가락을 튕기자, 카무잔과 아모드라, 그리고 두 명의 군주와 샤르를 제외한 인간들이 모두 사라졌다.
“……지상으로 보낸 건가?”
“어.”
“맙소사…….”
아모드라는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정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단 말인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듣기 되게 거북하네.”
“말을 달리한다고 무엇이 바뀌지? 지금 네가 보여 준 힘이 이미 신과 같은데.”
“기분이 다르잖아, 기분이. 껄끄럽다니까?”
“……허.”
“나는 달라진 거 없어. 그리고…….”
에단이 말끝을 흐렸다. 이 얘기는 굳이 꺼낼 필요가 없었다.
“일단 그쪽들도 먼저 나가 있어. 나는 얘랑 할 얘기가 조금 있으니까.”
“그게 뭔…….”
에단이 손가락을 튕기자 두 명의 대군주와 두 명의 군주가 모두 자취를 감췄다.
이제 이곳에는 에단과 샤르, 둘밖에 남지 않았다.
“음…… 안녕?”
― 너 말투 존나 역겨운 거 알고 있냐?
“닥쳐.”
아, 키아나는 아직 남아 있었다.
에단은 조금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샤르를 바라봤다.
샤르의 외향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지만, 그녀가 살아온 세월은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샤르는 에단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존재해 왔다.
하지만 일단 그녀의 외모는 귀여운 꼬마 아이였다.
‘이래서 일단 겉모습이 중요하단 말이야.’
에단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 샤르는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에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성공했구나?”
“뭐…… 조금 애매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샤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저 어린아이의 눈초리가 썩 불편했다.
“이름이?”
“음…… 샤르. 친구가 지어줬어.”
샤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친구?”
“응.”
샤르는 에단에게 헨리의 대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에단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참을 웃은 에단이 샤르를 향해 말했다.
“처음 사귄 친구가 그녀석이란 말이지…… 내가 사실 조언을 해 줄 입장은 아닌데 말이야? 친구는 잘 가려서 만나야 한다.”
“……왜?”
“뭐……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네가 여기서 지낸 지 얼마나 됐지?”
“모르겠어.”
샤르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적지 않은 시간동안 이곳에서 홀로 지냈을 것이다.
죽은 나무는 그저 이곳 아래에 존재하고 있었을 테고, 샤르는 혼자서 외롭게 죽은 나무를 지켰겠지.
“아직 볼품이 없군.”
어둠은 걷혔다.
끈적하던 사기와 죽은 마나도 많이 옅어졌다. 모두 에단이 바꿔 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허전했다. 어둠은 걷혔지만 황폐한 땅이었다.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단이 넓게 펼쳐진 지평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떠날 거야?”
샤르가 물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샤르의 말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떠나야지.”
에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곳은 에단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샤르가 가만히 에단을 바라보았다. 샤르의 눈동자는 검고 짙었다.
“왜, 떠난다고 하니까 싫어?”
“모르겠어.”
“무슨 농담을 못 하겠네.”
에단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혼자는 아닐 테니까.”
에단의 말에도 샤르는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금방 알게 될 거야. 혼자 지내기는 쓸데없이 너무 넓잖아? 안 심심해?”
“……심심해.”
“그래, 솔직하니까 얼마나 좋아.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에단이 훌쩍 사라졌다. 이제 거리와 공간은 에단에게 그 어떠한 제약도 되지 않았다.
에단이 향한 장소는 유론다의 천막이었다. 유론다는 에단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공했나?”
유론다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에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담백한 대답.
“허…….”
“뭐야, 설마 나를 못 믿었던 거야?”
“솔직히 믿지 못하기는 했지. 끌끌.”
유론다가 혀를 차며 웃었다. 성공하리라 믿기에는 너무 막연했기 때문이다.
“슬슬 돌아가야지.”
“……돌아간다고? 어디를?”
유론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단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단이 유론다를 향해 목걸이를 건넸다. 빛이 바래 있던 목걸이는 어느새 본래의 아름다운 빛깔을 되찾았다.
목걸이를 받아든 유론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목걸이를 받아 든 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건…….”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이미 말을 해 뒀거든.”
“마을 사람들한테도 말 좀 전해. 이런 건 족장의 몫이잖아?”
그 말을 끝으로 에단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에단을 보고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단! 어디서 나타난 거야?”
“설명하자면 길고, 네빌라는 어딨어?”
“네빌라?”
마을 사람들이 눈을 끔뻑이며 네빌라의 천막이 있는 곳을 알려 줬다.
“오…… 설마 드디어 청혼을 할 생각인가?”
“……혹시 어디 아프냐? 대뜸 뭔 청혼 타령이야?”
에단이 기막힌 표정을 짓자, 마을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었나? 뭔가 기류가 심상치 않던 것 같았던 것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난 바빠서 먼저 간다.”
에단은 마을 사람들의 말들을 무시한 채 네빌라의 천막으로 향했다.
“들어간다.”
에단은 네빌라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네빌라는 천막 안에서 꼿꼿이 앉은 채 명상을 하고 있었다.
감겼던 네빌라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가만히 에단을 바라보던 그녀의 이마에 선이 그어졌다.
“……지금 네 행동이 굉장히 무례하다는 것은 알고 있나?”
“무례해도 좀 참아. 그렇게 따지면 너도 대뜸 칼부터 들이밀었잖아?”
“그건…… 하아.”
할 말을 잃은 네빌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무사히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작전은 성공했나 보지?”
“그래.”
이번 작전에 있어서 네빌라는 배제되었다. 그녀는 담담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에단을 포함한 군주들과 비교했을 때 그녀가 지닌 힘은 있으나 마나 했으니.
전사로서 자존심도 상하고, 자괴감도 들었지만, 억지를 부릴 상황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녀의 수준으로는 계획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랍군. 설마 정말 그 무모한 계획이 성공할 줄이야.”
“어째 말투에 날이 서 있는 것 같다?”
“기분 탓이다. 재수 없는 놈…….”
네빌라가 말끝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자, 그럼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들어 볼까?”
“한 번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에단은 네빌라에게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간추려서 설명했다. 최대한 담백하게 설명했음에도 네빌라의 입은 크게 벌어졌다.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어.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까.”
일방적으로 말을 끝낸 에단이 몸을 일으키더니 천막 밖으로 나갔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좀 일어서지?”
에단이 네빌라를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