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빛의 나무 (2)
아슬란을 꼬나든 에단이 앞으로 나아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발걸음이었지만, 에단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어둠이 물러가며 빛이 피어오른다.
페온을 포함한 모두가 넋을 잃은 채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은 어깨에 검을 걸친 채 휘적휘적 앞으로 나아갔다. 입가에는 사나운 미소를 걸친 채 페온을 응시하는 에단.
“이야…… 꼴이 말이 아니네?”
에단이 이죽거렸다. 페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페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는 피가 흐를 것만 같았다.
“너…….”
페온이 말끝을 흐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다. 그럴 수는 없어. 그럴 수는…….”
페온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순응하기 힘들었는지 그는 쉴 새 없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에단을 응시했다.
겉모습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에단의 모습은 평범했다.
하지만 에단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완전히 달라졌다.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불길한 것도, 신성한 것도 아닌.
마치 붕 뜬 것 같은 감각.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어디에도 속할 수 있는.
페온은 에단을 보자마자 그것을 인지했지만, 동시에 부정했다.
“아니, 아니다. 그 힘은…… 네가 가져서는 안 되는 힘이다.”
크르릉.
페온의 입에서 짙은 흉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에서 선명한 적의와 살의가 피어올랐다.
“진짜 징그럽다.”
에단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페온을 바라봤다. 인상을 쓰며 페온을 응시하던 에단이 카무잔을 힐긋 바라보며 물었다.
“새치기를 하는 것 같아서 좀 걸리는데, 사실 내가 먼저거든. 이해해 줄 수 있지?”
“……나중에 나와 싸워 준다면.”
“하하하.”
에단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기죽지 않다니. 역시 카무잔이었다.
“당연한 소리를.”
“그렇다면 양보하지.”
카무잔이 씨익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아무도 방해하는 자 없이, 에단과 페온은 대치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감히……!”
페온이 불같은 노기를 토해 냈다. 에단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다.
“어디서 역정이야? 지가 먼저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방귀 뀐 놈이 성을 내고 있었다.
에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작 화를 낼 사람을 앞에 두고 역정이라니.
“어째서? 왜 네가 그 힘을 가지고 있지?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다가가면 내가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페온의 눈이 번뜩였다.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페온의 눈빛은 증오를 가득 머금었다.
“너 지금 진짜 추한 거 알아? 역겨울 지경이야.”
잔뜩 얼굴을 구긴 에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키아나, 기분이 어때?”
― 진짜 토할 거 같아.
“나랑 동감이네.”
씨익.
에단이 미소 지었고, 섬뜩한 표정을 짓고 있는 페온이 달려들었다.
페온의 신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히 압도적인 속도였다.
하지만 에단은 페온이 어디서 나타날지, 어떤 공격을 할지를 알고 있었다.
예측하려 하거나, 수읽기를 한 것이 아니다. 에단은 더없이 평온한 상태였다.
그저 인지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페온이 에단을 향해 주먹을 던졌다. 에단은 페온을 바라보지도 않고, 손목을 낚아챘다.
에단은 파괴적인 힘이 실린 페온의 주먹을 아무렇지 않게 붙잡았다.
포악한 오러도, 맹렬한 기세도, 순식간에 흩어지고 말았다.
에단의 눈이 페온의 동공을 응시했다. 페온은 에단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토해 냈다.
“끄아아아악!”
페온이 발버둥 쳤다. 뒤가 없는 것처럼 마나를 폭발시켰다. 마치 악을 쓰며 발악하는 것 같았다.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붙잡은 손목에 힘을 조금 더하자 난폭하게 휘몰아치던 마나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고요함이 찾아왔다. 페온은 떨리는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페온의 눈에 서린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페온은 에단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키아나.”
― 그래.
쫘아악!
검의 옆면으로 얻어맞은 페온은 사정없이 날아갔다. 한참을 날아가던 페온이 바닥을 굴렀다.
“속이 좀 풀리냐?”
― 아니, 아직 멀었어.
“나랑 생각이 같네. 이걸로 끝내기는 너무 괘씸하지.”
씨익 웃은 에단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마치 공간이 접히는 것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에단이 페온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페온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설마 이걸로 끝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한 적 없겠지?”
까딱.
에단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페온의 몸이 끌려 올라갔다.
정체 모를 힘에 의해 끌어 올려진 페온은 증오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에단이 다시금 칼자루를 강하게 붙잡았다.
짜아악―!
페온이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에단이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까딱.
손가락을 까딱이자 순식간에 페온이 끌려왔다.
“이거 좀 재밌는데?”
에단이 피식 웃었다. 실감이 나지 않던 힘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자 묘한 재미가 느껴졌다.
“……재밌다고?”
힘겹게 눈을 뜬 페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에단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 힘을 얻고 나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재밌다고?”
“내가 재밌다는데 왜 또 지랄이야?”
표정을 구긴 에단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페온은 저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고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그 힘은…… 너 따위가 지녀서는 안 되는 힘이다. 너는 정확한 가치를 모르고 있어.”
“가치는 지랄. 내가 모를 것 같아?”
에단의 세상은 부서졌다.
새가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처럼, 에단은 힘을 얻으면서 자신의 세상을 부쉈다.
에단은 모든 흐름과 이치를 깨달았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썩 좋은 기분도 아니었다.
“뭔가…… 되게 귀찮은 것들을 떠안은 기분이야.”
그렇기에 시간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페온을 후려 패고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싶었지만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운이 좋은 줄 알아.”
“……운이 좋다고? 지금 나더러 운이 좋다고 했나?!”
페온이 발버둥 쳤다.
추욱 늘어져 있던 꼬리가 날카롭게 움직였다. 검은색의 오러를 머금은 꼬리가 에단의 가슴팍을 노렸다.
“쯧.”
에단은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차며 꼬리를 붙잡았다.
그 순간, 폭발이 일었다.
극한까지 응축된 힘.
그것은 페온이 구사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페온의 마지막 발악조차 에단에게는 어떠한 피해를 끼치지 못했다.
마치 성냥으로 불을 지핀 것 같았다. 작은 불꽃은 에단이 손짓하자 금세 꺼져 버렸다.
에단이 페온의 꼬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잡아당기자 페온의 꼬리가 주욱 하고 뜯겨져 나갔다.
“끄아아악!”
페온이 비명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 행위를 벌인 에단은 담담했다.
그저 물끄러미 페온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분이 좀 풀리냐?”
― ……빌어 처먹을 새끼. 야, 너는 대체 뭐가 불만이어서 이런 일까지 벌인 건데?
키아나가 페온에게 소리쳤다.
불같은 목소리었지만, 그녀의 말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크흐흐흐…… 멍청한 질문을 하는군. 이제야 기억을 되찾았나, 키아나?”
―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 끝에 뭐가 있다고?
“뭐가 있냐고?”
페온이 고개를 들었다. 파충류 같은 눈이 독기를 머금었다.
“모른다. 쥐어 본 적이 없어서 나도 알지 못해. 그러니까 궁금하군. 에단, 지금 기분이 어떻지?”
페온은 진심을 다해 에단에게 묻고 있었다. 그 광기에 에단은 꺼림칙함을 느꼈다.
“별로 좋지는 않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부러워. 정말 너무 부러워서 미치겠군. 어이, 에단.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말해 봐.”
“그 힘…… 나한테 넘기면 안 되겠나? 부탁이다. 나는…… 나는 그것만을 좇아왔다.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그거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왔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그 힘을 내게 넘겨라.”
페온은 정말로 간절하게 애원했다.
에단은 눈을 끔뻑거리며 페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싫은데?”
“…….”
“내가 ‘들어는 준다’라고 했지, 언제 해 준데? 너 뭐 맡겨 놨냐? 실패했으면 곱게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왜 엄한 사람을 귀찮게 하고 지랄이야? 덕분에 알기 싫은 것까지 알게 됐잖아.”
“그 힘을 얻고 나서도 고작 한다는 소리가…….”
“나도 하나 묻자. 도대체 이런 힘을 얻어서 어디다가 쓸 건데? 뭘 하고 싶은 거야?”
에단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강이라는 타이틀은 확실히 매혹적이다. 모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과했다.
드래곤도, 대군주도 지금의 에단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이게 과연 만족스러운가?
세상의 비밀을 엿보고 진리에 다가선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죄다 딱히 알고 싶지 않던 것들이었다.
모르고 살던 때가 훨씬 속 편했다.
에단은 그냥 적당히 즐기면서 살아가고 싶었다.
썩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은 이제 가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힘을 원한 이유가 뭐냐고?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큭큭큭큭.
페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기막힘과 허탈함, 그리고 광기가 뒤섞인 폭소였다. 한참을 웃던 페온이 어느 순간 정색했다.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올라간다. 강해진다. 그게 바로 생명의 본능이다. 올라갈 방법이 있고, 길이 보이는데 안주하는 게 진정으로 사람의 삶이라고 볼 수 있는가? 도태된 버러지가 아니라?”
“그래서 너는 지금 꼬라지에 만족하나?”
“왜? 지금 모습이 추악하고 역겹기라도 하나? 만족하냐고? 전혀. 나는 결국 실패했다. 내 염원이자 꿈을 너에게 빼앗겼는데 어찌 만족을 할 수 있지? 하지만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페온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도.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실패했을 뿐이야. 만일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면 다시 도전한다.”
“……미리 말해 두는데 썩 좋은 기분은 아니야.”
“그딴 건 묻지 않았다. 판단은 내가 해. 올라선 이후에 내가 생각한다. 그 끝이 파멸이면 뭐가 어떻지?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이 잘못되었나?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파멸을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손을 뻗는다.”
페온의 눈은 에단을 보지 않았다.
에단이 지닌 힘을 바라봤다.
그는 집착과 동경이 뒤섞인 눈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뭐…… 이해한다고 하지는 않을게. 결국 너는 졌잖아? 세상에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겠어. 진 게 병신이지.”
“……큭큭, 냉혹하군. 그래, 그래야 너답지. 같잖은 연민이나 동정을 보였다가는 내가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라는 거야? 주제넘은 소리 하지 마.”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내가 너를 동정하든, 연민하든 그건 내 자유이자 권리야. 패배자는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