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화] 강한수 (3)
“…….”
강한수는 침묵했다. 초월자가 된 그는 이 세계에 류태신을 불러들였다.
자신은 실패했다. 수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실패뿐인 삶. 그 끝에 얻은 힘.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다.
강한수를 제외한 과거는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강한수 자체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인과였기 때문이다.
인과를 비트는 자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그게 곧 이 세계의 법칙이다.
그렇기에 강한수는 다른 인물을 끌어들였다. 강한수가 살아가던 시대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던 인물.
마치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 같은 남자.
류태신이었다.
강한수와는 전혀 반대되는 인물.
학창 시절에 늘 괴롭힘을 당하던 왕따 학생과 늘 만인의 선망을 받던 천재 격투가.
시기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강한수는 궁금했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나는 실패했지만 저 녀석이라면…….’
그렇기에 강한수는 류태신을 끌어들였다. 조금의 짓궂은 악의를 담아,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망나니의 몸에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꽤나 보는 재미가 있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격투가가 비루한 돼지의 몸에 갇혀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썩 볼 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단은 그러한 역경을 가볍게 넘어섰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에단에게 있어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이 연속되었지만 에단은 언제나 스스로를 보란 듯이 증명했다.
질투가 났다. 강한수의 마음은 망가져 있었다.
이 세계는 강한수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얼마든지 만질 수 있고, 조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흔적이 지워지는 걸 보는 게 힘들었다.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이, 자신이 주인공이던 세상은 이미 없어졌다.
강한수는 실패했다.
실패하고서야 비로소 힘을 얻게 되었다.
부질없는 힘이었다.
초월적인 힘을 얻었다. 더 이상 강한수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반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지하의 대군주도 강한수가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죽일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하지만 그게 도대체 어쨌다는 말인가.
강한수는 고독했다. 그는 그저 그곳에서 에단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흔적을 남겨 둔 채.
에단이 흔적을 발견하고 민감하게 반응했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하지만 그 감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에단이 과연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강한수가 마음먹고 현세에 개입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강한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에단을 지켜봤다.
에단이라고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단도 결국은 사람이었고, 실패라는 것을 겪었다.
하지만 에단은 다시 일어났다.
독선적인 리더였지만 결국에는 모두를 휘어잡았다.
놀라운 성과였다. 지하에 떨어지고 나서도 그것은 바뀌지 않았다.
위기가 연속되었고, 절체절명인 순간도 찾아왔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에단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활로를 찾아냈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대군주와의 협상을 성사했고, 앙숙과도 같은 대군주를 연결시켰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자신의 성장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에단은 매일 같이 목숨을 걸었다.
대군주인 카무잔의 대련은 살벌했다.
에단은 매 순간마다 목숨을 걸었다.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찢어졌다. 내장이 진탕되고 피를 토하며, 눈이 뽑혀 나갔다.
하지만 에단은 좌절하지 않았다.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성장을 갈구했다.
강한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어째서? 대체 뭘 위해서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지?
결국 강한수는 자신의 앞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지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자신의 앞에.
에단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의 차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에단이 수천, 수만 번을 도전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과 에단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몸으로 격차를 확인한 이 순간이 되어서도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비키라니까?”
삐딱한 태도로 말하는 에단.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제는 질투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에단이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오랜만에 인간적인 생각이 들었다. 강한수가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대신…… 대가가 있어.”
“대가? 너 진짜 양심 없냐?”
“응, 지금 생각해 보니까 없는 것 같아.”
“……옘병.”
강한수가 순순히 수긍하자, 에단이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말해. 일단 들어는 보고 결정하게.”
“아니, 끝나고 알려 줄게. 거절권은 없어.”
“……너 진짜 나랑 장난 하냐?”
“응, 장난 맞아.”
강한수가 웃었다. 에단은 기가 막혔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에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고.”
“…….”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할 말을 잃은 에단이 강한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에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어렴풋이 전해졌다.
피식 웃은 강한수가 앞으로 발을 한 발짝 내디뎠다.
또각.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
그러자 또다시 풍경이 뒤바뀌었다. 방금까지 둘을 가둬 두던 옥타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한수는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비켜 준다고 해서 성공할 거란 보장은 없어.”
“알고 있어.”
“……그래. 알고 있겠지.”
강한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에단은 이런 자였다.
강한수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여흥은 끝났다. 이제는 다시 관찰자로 돌아갈 시간이다.
강한수의 몸이 어둠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강한수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 무겁고도 압도적인 존재감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 ……야.
“왜?”
― 저거 도대체 뭐냐?
“나도 몰라. 설명하면 길고.”
― 모르는 거야, 설명하기 귀찮은 거야?
“알아서 생각해.”
키아나의 질문을 대충 뭉갠 에단이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피로감이 휘몰아쳤다.
신체 컨디션이 문제가 아닌, 정신적인 피로감 때문이다.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과도한 마나의 남용도 정신을 상당히 지치게 만들었다.
저벅저벅.
에단이 발을 옮겼다. 방향은 느껴졌다. 강한수가 사라지자 죽은 나무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야. 너 진짜 제정신이야?
“글쎄?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지금 나랑 장난해?!
키아나가 역정을 냈지만, 그 목소리는 에단에게 들리지 않았다.
귀가 웅웅거린다.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죽은 나무의 귀곡성도, 키아나의 욕설도 모두 옅어진다.
에단은 비틀거리면서 죽은 나무가 뿌리내린 곳으로 향해 나아갔다.
머릿속이 멍해진다. 에단의 동공이 흐릿해졌다.
저벅저벅.
에단은 앞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죽은 나무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에단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되찾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작은 묘목 하나.
볼품없는 묘목이었다. 서 있는 게 고작인 것처럼 보이는 앙상한 나무.
보잘것없는 묘목과 달리 그 묘목이 뿌리내린 지하에서는 압도적인 힘이 전해졌다.
소름이 빗발치고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요사스러운 힘.
‘이미 한 번 겪어 봤잖아.’
에단은 세계수의 힘을 흡수한 적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 봐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에단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많은 운이 뒤따라 줘서이기도 했다.
― ……너 진짜 제정신이냐?
“한 번 성공했잖아.”
― ……미친 새끼.
키아나가 욕설을 뇌까렸다. 그녀는 이미 에단이 결정을 끝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키아나. 한 가지만 묻자.”
― ……뭔데?
“너…… 진짜 정체가 뭐야?”
― …….
“까딱하면 둘 다 죽는 건데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이제 뭔가 짚이는 게 있을 거 아니야?”
―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늘 자신감이 넘치던 키아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뭔가…… 뭔가를 알 것 같은데…… 모르겠어. 나는 뭐지? 어디서 비롯된 존재지?
키아나가 중얼거렸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천천히 그녀가 회복하기를 기다려 줄 정도로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정신 차려. 나한테 동정이나 연민을 받고 싶은 거야?”
― ……닥쳐.
“신성력의 기원은 어디지? 정말 신이 존재하는가?”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강한수의 등장으로 그것은 더욱 확실해졌다.
강한수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것을 신이라 칭한다면 능히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수의 모습은 신성 왕국이 믿고 모시던 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강한수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신성 왕국이 말하는 것처럼 자비롭지도 않았고, 선량하지도 않았다.
그는 신도들에게 신성력을 하사하지 않는다.
강한수가 사용하는 기운은 어딘가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평등했다. 마나도, 죽은 마나도, 신성력도 그에게는 모두 같은 힘일 뿐이었다.
페온이 좇는 이상향이, 타이탄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지금 강한수의 모습이라면.
그것이 페온의 목적이라면.
아슬란의 존재도 설명이 된다.
“너는 이 검을 보고서 그렇게 말했지. ‘성검’이 아닌, ‘아슬란’이라고.”
― …….
키아나가 침묵했다.
이 검은 성검이 아니다. 막대한 신성력을 발산하며 죽기 직전의 사람도 회복시키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성력의 기원이 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신성력이라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에단은 의문에 휩싸였다.
지상과 지하.
마나와 죽은 마나.
생명의 나무와 죽은 나무.
상통하는 부분은 나무라는 것.
그리고 에단이 쥐고 있는 것은 검.
아슬란은 힘을 잃은 채 지면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 검의 힘이 봉인당한 상태라면.”
이건 어디까지나 에단의 가정들이었다. 착각이거나, 헛다리를 짚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에단의 마음은 기울었다. 설령 이 선택이 실수라고 한들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에단이었으니까.
에단이 아슬란을 높이 치켜들었다.
― 자, 잠깐…….
키아나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에단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에단은 멈추지 않았다.
푸욱!
키아나가 죽은 나무를 가르고 그대로 지면에 틀어박혔다.
“…….”
에단은 눈을 부릅뜬 채 검이 틀어박힌 장소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에단은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두근.
어디선가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의 가슴 속에서 들려온 소리는 아니었다.
우우웅.
세계수의 목걸이와 빛바랜 목걸이. 그리고 에단의 왼손과 아슬란이 동시의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성검에서 신성한 광채가 흩뿌려지고 갈라진 묘목에서는 사특하고 불길한 어둠이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에단은 금지된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