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죽은 나무 (5)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에단의 표정이 굳었다.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과거 자신의 몸과 마주보는 상황이라니.
류태신이 에단을 응시했다. 기묘하면서도 이질적이다. 류태신의 눈은 마치 맹수와도 같았다.
녀석은 먹잇감이 아닌 포식자였다.
‘고놈, 잘생기긴 했네.’
에단이 피식 웃었다. 류태신은 객관적으로 봐도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정말 살벌했다.
마치 맹수의 눈처럼 번뜩이는 안광이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의욕이 좀 생기는걸?”
왜 그간 류태신의 상대들이 먼저 지레 겁을 먹은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눈빛 한번 살벌하네.”
“……너 나 알아?”
“모르긴 왜 몰라.”
나만큼 널 잘 아는 애가 어디 있다고.
에단이 검과 목걸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뚝. 뚜둑.
몸을 푸는 에단.
에단의 눈이 류태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거울이 없기에 확인은 할 수 없었지만, 아마 둘의 눈빛은 매우 닮았을 것이다.
통. 통. 통.
에단이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썩 감회가 새로웠다.
류태신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가만히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첨예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고, 류태신이 질주했다.
이곳은 당연히 심판도, 코치도, 세컨드도 없었다.
‘뭐…… 필요도 없지만.’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달려든 류태신이 주먹을 내질렀다. 간결하고 빠른 공격이었다.
스윽.
에단이 상체를 젖혀 공격을 피해 냈다. 그와 동시에 에단의 발이 류태신의 복부를 노렸다.
류태신의 검은 동공이 에단의 발을 좇았다.
팟!
류태신이 가속하며 에단의 발을 붙잡았다.
‘크, 그래도 나라 그건가?’
뛰어난 동체 시력과 빠른 판단력. 류태신의 재능이었다.
류태신이 달라붙었다. 클린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클린치 싸움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아야 한다. 체급은 류태신이 훨씬 높은 상태였지만, 에단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조금만 진심을 발휘해도 류태신이 그대로 구겨지는 상황.
끄드득!
팽팽한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에단의 눈이 커졌다.
‘역시 뭐가 있구나?’
그래, 이래야지 재미가 있지.
에단은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반겼다. 이제야 제대로 된 경쟁자를 만난 것 같았다. 의욕이 샘솟았다.
치열한 레슬링 싸움이 벌어지다가 에단이 먼저 거리를 벌렸다.
에단의 오른손이 큰 궤적을 그리며 류태신의 안면을 노렸다. 류태신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끝까지 에단의 손을 응시하다가 정확한 타이밍에 킥을 던졌다.
정강이를 노리는 카프 킥. 하지만 이건 노림수였다.
에단이 킥 캐치를 하며 붙었고, 류태신이 재빠르게 에단의 목을 부여잡으며 디펜스를 했다.
디펜스를 하던 류태신이 거리를 벌리며 여러 펀치를 던졌다.
주먹 하나하나가 총알 같았다. 매우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치명적이었다.
에단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상체의 움직임만으로 주먹을 모두 회피한 에단이 지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뻗었다.
서로 킥은 사용하지 않았다.
킥을 사용하는 순간 카운터나, 킥 캐치가 일어날 터.
베테랑 복서.
아니, 그 이상의 펀치 공방이 이어졌다. 한 번만 정통으로 맞아도 치명상이었지만, 둘 모두 단 한 번의 펀치도 적중시키지 못했다.
파바바바바바박―!
끝나지 않는 공방. 몸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에단의 머리는 냉정했다.
‘어떻게 할까.’
기량은 동급.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체 능력은 류태신과 에단 모두 대동소이했다.
동체 시력, 판단, 기술, 모든 것도 엇비슷.
‘그래. 격투기로는 말이지.’
하지만 이건 격투기가 아니었다. 룰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했다.
에단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팟!
거리를 벌린 에단의 상체가 낮아졌다. 이해하기 힘든 돌발 행동에 류태신의 눈매가 좁혀졌다.
에단은 마치 짐승이 뛰어드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에단이 원하는 것은 승리.
‘방법은 상관없어.’
규칙이나 기술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었다. 에단의 장점 중 하나는 스펀지 같은 흡수력이었다. 이미 그는 전사의 정점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카무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본능적인 움직임.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사냥하듯이, 카무잔에게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하지만 변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한다. 단점 없는 장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활력이 돌았다. 에단의 몸은 강한 폭발력을 머금었다.
류태신은 자세를 갖춘 채 침착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끝까지 유지하는 침착함.
‘그래야 나답지.’
씨익 웃은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타앙―!
에단이 쏜살처럼 뛰쳐나갔다. 찰나의 순간에 류태신에게 도달했다.
침착하게 에단을 응시하던 류태신은 정확한 타이밍에 카운터를 던졌다.
하지만 가속한 에단의 반응이 더 빨랐다.
‘내가 너를 모르냐?’
에단은 류태신의 대처를 알고 있었다. 카운터가 날아오는 타이밍에 류태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꽈아악!
에단의 손아귀가 류태신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미 대처는 늦었다.
쑤욱!
류태신의 몸이 바닥에서 뽑혔다. 그대로 지면에 꽂히려는 그때, 류태신의 몸이 회전했다.
그 상황 속에서도 활로를 찾던 것이다. 하지만 에단은 그조차도 예상했다.
공중에서 몸을 비트는 순간, 에단은 붙잡은 손목을 놓았다.
“이것도 한 번 피해 봐.”
씨익.
에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에단의 주먹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전형적인 펀치 연계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잔혹한, 카무잔의 것과 흡사한 공격이었다.
처음에는 침착하게 공격을 흘리려고 하던 류태신이 서서히 주먹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마치 서서히 물에 젖는 것처럼, 나중에는 완전히 잡아먹혔다.
류태신이 바닥에 쓰러졌다. 끔찍한 몰골이었다.
쓰러진 류태신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에단이 한숨을 돌렸다.
싸울 때도 느꼈지만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과거의 자신과 싸우고 승리하다니.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애매한 기분이었다.
에단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피곤하네.”
“피곤해?”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인기척은커녕 전조도 없었다. 에단의 고개가 돌아갔다.
스르륵.
옥타곤이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검게 물들었다.
저벅저벅.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
에단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검은 머리의 남자.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외모.
류태신을 제외하고는 처음 본, 동양인의 외모였다.
에단은 검은 머리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공허하면서도 황폐한 눈으로 에단을 가만히 응시했다.
신장은 대략 170 후반. 현재의 에단보다는 조금 작았다. 굳은살이나 흉터는 없었지만, 몸은 단련되어 보였다.
쳐진 눈매는 선량하고도 순박해 보였으나, 눈 안에 깃든 감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메마른 사막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에단은 저 남자가 누군지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강한수?”
에단이 묻자 한참 뒤에 남자가 반응했다. 그는 기계처럼 천천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지?”
이질적인 목소리.
마치 인간이 아니라 인형의 목소리 같았다. 강한수의 목소리에서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딱 보니까 그렇게 생겼는데 뭘.”
“……그래? 그거참…… 놀랍군.”
강한수는 매우 느릿느릿하게 대답했다. 반응이 매우 더뎠다. 마치 어딘가가 망가진 것 같았다.
“내가 원래 눈썰미가 좀 있거든. 나도 너를 봐서 놀라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거에 어울려 줄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최대한 빠르게 설명 좀 해 주지?”
“…….”
강한수가 말없이 에단의 눈을 응시했다. 마주하기 거북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강한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고, 먼저 입을 연 것은 강한수였다.
“……역시 다르구나.”
“……뭔 개소리야. 알아들을 수 있게 좀 설명해.”
에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데없이 나타난 강한수는 계속해서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그냥…… 궁금했어. 내가 아니라 너라면 어땠을지.”
“뭐?”
“설명을 원한다면 해 줄 수는 있는데…… 원해?”
“아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말이 늘어지는 거야. 나중에 정 할 게 없어지고 한가해지면 물어볼게.”
“……하하.”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강한수의 웃음소리. 에단이 다시 표정을 구겼다.
“너, 웃지 마.”
“왜?”
“그냥 웃지 말라면 웃지 마. 소름 끼치니까.”
“……그래?”
“어. 여긴 거울 없냐? 뭐…… 없는 것 같기는 하네.”
“거울…… 만들려고 하면 만들 수 있어.”
강한수가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한 변화는 사소하지 않았다.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변화했다. 주변이 온통 거대한 거울들로 바뀌었다. 에단이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정신병 걸리겠네.”
“……그래?”
강한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에단이 인상을 팍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너는 정상이 아니야. 친구 없지?”
“…….”
강한수의 표정은 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기분 탓인지 한층 더 싸늘해진 것 같았다.
“내가 좀 바쁘거든? 그러니까 빨리 얘기를 좀 끝내자고.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바쁜 이유가 뭐야?”
“……뭐?”
“그냥 궁금해서. 바쁜 이유가 뭐냐고.”
“……하아.”
에단이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대화를 이어 나가면 이어 나갈수록 피로감이 짙어진다.
에단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위에 내 친구들이 있거든? 뭐,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이 좀 돼서 말이야.”
“그래? 걱정이 된다고?”
“어.”
“…….”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강한수가 입을 열었다.
“너, 그런 녀석 아니었잖아.”
“……뭐?”
“말 그대로야. 너 원래 그런 녀석 아니었잖아. 친구들이 걱정된다고?”
하하.
강한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거칠고 꺼림칙한 웃음소리였다. 에단은 굳은 표정으로 강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하다.
에단의 직감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껏 모호하고 흐렸던 존재감이 서서히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지금 에단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에단이 겪어 온 그 어떤 자들보다도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걱정이 된다고? 친구들이? 류태신이 누군가를 걱정해? 천하의 챔피언이었잖아.”
강한수가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강한수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너…… 어디 아프냐?”
“아니, 나는 멀쩡해.”
천천히 고개를 저은 강한수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내가 저 녀석들을 전부다 죽이면 이제 걱정거리도 사라지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