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화] 죽은 나무 (4)
“후우.”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달렸다. 빛바랜 목걸이가 희미한 빛을 발산했고, 죽은 나무가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방향은 확고하다. 방해물은 없고,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는 온통 암흑뿐.
어둠을 꿰뚫는 에단의 눈은, 근처까지는 비춰 주었지만 저 멀리까지는 보기 힘들었다.
에단은 기약 없는 달리기를 이어 나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은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에단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그게 전부였다.
“젠장.”
에단이 욕설을 내뱉었다.
체력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심리적인 압박감이 상당했다.
초조함과 조급함이 에단을 다그쳤다. 에단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일행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획대로라면 카무잔과 아모드라가 두 대군주를 붙잡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계획이 백 프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변수는 늘 존재했다.
“스읍.”
숨을 들이켠 에단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쾌하던 공기가 이제는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을 넘어 친숙하게까지 느껴졌다.
에단이 거침없이 질주했다.
전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속도는 체감되지 않았다.
주위 풍경이 같았기 때문이다.
짙은 암흑 속을 질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끝나지 않는 악몽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한가하게 불평하고 있을 시간은 없지.’
쓰게 웃은 에단이 잡념을 떨쳐 냈다. 에단의 목적은 한가지였다. 어떻게 해서든 죽은 나무에 도달하는 것.
‘다른 건 신경 쓰지 마.’
성공 확률이나 일행의 안위 따위는 뒤로 치웠다.
에단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감정을 혼란스럽게 할 생각이 있다면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뭔가 이상해.’
감각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지만 끝이 나지 않았다.
에단의 경지는 이미 마스터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었다. 커다란 벽을 앞에 두고 있기는 하였으나, 인간의 경지는 아득히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러한 에단이 전력으로 내달린 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목적지는 보이지가 않았다.
우우웅.
키에에에엑―!
목걸이는 강하게 빛나고, 죽은 나무도 격렬하게 귀곡성을 토해 내고 있었다.
두 이정표가 모두 반응한다. 확실하다. 죽은 나무는 근방에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다.’
에단은 그것을 거의 확신했다. 아무리 이곳이 넓다고 한들, 이렇게 끝없이 길이 펼쳐질 수는 없었다.
길은 확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향은 정면이 아니다. 수평이 아닌 수직.
죽은 나무는 위로 자라지 않고, 아래로 자란다. 그것은 거대한 뿌리.
에단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에단이 허리춤에 매달아 둔 아슬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아슬란이 청명한 소리와 함께 뽑혔다. 관리도 하지 않고, 험하게 다뤘음에도 아슬란은 여전히 매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빛을 머금은 아슬란.
에단은 칼자루를 쥔 손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꿨다.
‘단순한 감일 뿐이지만.’
아슬란과의 조우를 떠올렸다. 이 검은 바위 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예감이 맞다면.’
그간의 가정이 확실하다면.
에단은 그 확률을 배제할 생각이 없었다.
에단이 아슬란을 높이 치켜들었다.
콰아아아아―!
에단의 주위에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에단이 전력을 다해 기세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소모되는 죽은 마나.
“스읍―!”
에단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대로 아슬란을 지면에 내리꽂았다.
푸우욱!
강한 저항감과 함께 아슬란이 지면에 틀어박혔다. 에단은 검이 틀어박힌 장소를 한참 동안 노려봤다.
“푸후…….”
에단이 숨을 토해 냈다. 허탈함이 절로 들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이며 방법을 찾았다고 확신했는데 아무래도 헛다리를 짚은 것 같았다.
“하하.”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짙은 탈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정신 차려라.”
에단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고작 여기서 주저앉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실패하면 어떻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거다.
에단이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목걸이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에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빛바랜 목걸이뿐이 아니었다.
우우웅―!
세계수의 목걸이도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지면에 틀어박힌 아슬란 또한 빛을 토해 내고 있었다.
움찔움찔.
에단의 시선이 왼손으로 향했다.
왼손이 반응하고 있었다.
지니고 있는 목걸이나 검처럼 빛을 뿜어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타이탄의 힘이 둘러진 에단의 왼손은 확실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몸속에 잠들어 있던 죽은 나무도 격렬하게 괴성을 내질렀다.
어지러웠다. 너무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얼굴을 찌푸리던 에단은 결국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투둑!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거칠게 뜯어냈다. 그러고는 빛을 토해 내는 아슬란 주위에 떨어트렸다.
우웅!
목걸이와 아슬란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에단은 빛을 뿜어내는 아슬란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손을 뻗었다.
타이탄의 힘이 깃든 왼손을.
꽈아악.
칼자루를 움켜쥐자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묘한 기운이었다.
‘……이게 뭐지?’
어렴풋이 무언가를 알 것도 같았다. 에단이 다루던 이질적인 마나.
통상적인 마나와 죽은 마나가 뒤섞인 힘.
마치 그것과 흡사하면서도…… 훨씬 더 짙은 힘이었다.
눈을 감은 에단이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거대한 흐름이 느껴졌다. 마치 우주를 보는 것 같았다.
에단의 몸에는 끝을 알 수 없는 힘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은 어설프게 회전하며 나름의 규칙을 만들고 있었지만…….
정말로 위태로워 보였다.
‘위태롭단 얘기를 괜히 한 게 아니었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에단의 몸은 폭탄과도 같았다.
스스로도 끝이 느껴지지 않는 무한한 마나를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목도한 마나는 에단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한 인간이 다루기에는 과분한 힘이었다. 에단은 정말 살아 있는 게 기적인 상태였다.
‘놀라워.’
에단의 세계가 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몸과 머리가 찌릿하며 무언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어째서 지하에 내려오고 나서부터 힘이 봉인당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 그랬었어.’
에단이 지닌 것은 허락되지 않은 힘이자 불완전한 힘이었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지는 순간, 에단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내가 간신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에단이 자신의 왼손과 아슬란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두 힘 덕에 에단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이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에단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야 모든 톱니바퀴가 맞물리기 시작했다.
― 자격을 증명해라.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닌, 뇌리에 직접적으로 꽂히는 목소리였다.
“좌절, 그리고 절망.”
에단은 룬어를 되뇌었다. 이제 룬어의 속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에단이 지닌 룬어는 부족하다. 남은 하나는 크리스토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자격의 증명.
에단의 자격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쿠궁.
지면이 떨렸다. 강한 지진이었다.
쩌거거거걱―!
아슬란을 기점으로 지면이 크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에단은 목걸이와 아슬란을 들었다.
갈라진 바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아찔함이 절로 들었다.
저 아래에 죽은 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쫄았냐?’
에단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에 몸을 던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쫄면 어때.’
에단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미약한 용기가 생겨났다.
“후우.”
숨을 내뱉은 에단이 눈을 딱 감고 발을 내디뎠다.
쑤우우욱―!
순간 후회가 들었다. 에단이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끝없는 추락이었다.
‘옘병할.’
에단이 욕설을 내뱉었다.
마룡을 타고 창공을 비행할 때도 이런 아찔함은 느껴 보지 못했다.
‘언제 끝나는 거야!’
끝없는 추락이 지속되던 그때.
둥실.
묘한 부양감이 에단의 몸을 휘감았다. 에단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그곳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야 여긴.’
에단이 눈을 깜빡거렸다. 설마 꿈을 꾸는가 싶어서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그의 왼손에는 아슬란과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에단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관중들의 거대한 함성과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익숙한 감각이다. 건물이 진동하는 이 느낌.
스포트라이트가 길을 비춘다.
길 끝에는 역시나 옥타곤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냉혹한 철창.
전사라는 이름을 한 짐승들의 우리. 에단은 홀린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저벅저벅.
에단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의문은 들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단은 그저 자신의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환호 소리가 짙어졌다.
하지만 그 우레와도 같은 함성은 어느새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에단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옥타곤에 들어가기 전 언제나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주위 환경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자신의 상대였다. 에단의 눈이 상대를 응시한다.
삐이이―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불쾌하고도 거슬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명도 점점 묻히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도, 숨소리도 점점 옅어진다. 에단의 동공이 좁혀지며 상대를 정확히 인지한다.
그래.
이 느낌이다.
이 느낌을 느끼기 위해서 에단은, 아니, 류태신은 이 세계의 발을 들였다.
점점 무뎌지며 흥미가 사라졌지만…… 이 감각은 가히 중독적이다.
옥타곤은 전쟁터였다.
들어오는 자는 둘.
승자는 오직 하나.
무승부는 용납하지 못했다. 에단은 언제나 승자이며, 포식자였다.
관중들의 응원이든, 야유든, 그따위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승리.
달콤한 승리만이 가치 있었다.
에단이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갈증이 느껴졌다. 목에 모래가 낀 것 같았다. 텁텁했다. 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었다.
승리의 갈망.
에단은 승리를 갈망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호승심이 느껴졌다.
에단의 상대는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단련된 근육이 상대의 강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돌아봐라.’
에단의 눈은 상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서 빨리 먹잇감을 두 눈에 담고 싶었다.
녀석이 천천히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녀석을 본 에단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에단의 맞은편에는…… 류태신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