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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384화 (384/398)

◈ [384화] 죽은 나무 (2)

헨리는 어둠 속을 걸었다. 묘한 감각이다. 가슴이 끓는 것 같기도 하고, 토할 것 같은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한 감정은 동질감이었다.

‘어째서지?’

마나와 죽은 마나.

상극의 기운.

헨리의 근원은 세계수의 가디언이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가시이자 방패.

그게 그녀의 본질이었다.

용도가 정해진 삶. 헨리는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였다.

마치 용도가 정해진 도구와도 같은 존재.

처음에는 많은 회의감이 들었다.

자신의 용도가 정해졌다는 것은, 모든 기억이 조작된 허상이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딴 걸 신경 쓰지 않았다.

헨리는 그 당당함과 자신감이 부러웠고, 그렇기에 깊이 감화되고 말았다.

헨리가 앞을 바라봤다.

깜깜했다.

짙은 그림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것’의 기운은 점차 짙어졌다. 무언가가 헨리에게 다가온다.

헨리는 그 존재에게 허락을 맡았다. 일행과 헨리가 문을 통과할 수 있던 것도 그 허락 덕분이었다.

일종의 배려. 헨리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저 존재가 느끼는 게 어떤 감정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호기심인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헨리도 그것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뭘까?’

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이 들었다.

존재의 격.

그 차이가 너무 커서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개미와 오우거를 보는 것 같은 차이.

가늠할 수조차 없는 힘이 느껴졌다.

손가락질 한 번.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헨리는 저항하지 못하고 목숨을 빼앗길 것이다.

‘그렇다고 말을 꾸며 낼 생각은 없어.’

헨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이면 저 존재는 헨리를 살려 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헨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밖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세상은 생각보다 즐거웠고, 이제는 그녀를 기다리는 존재들도 많았다.

‘먹어 보고 싶은 술도 많단 말이야.’

더 이상 그녀의 삶은 가짜라고 부를 수 없었다. 조작된 가족이 아닌, 진짜 가족 같은 존재들이 그녀를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얼마를 썼는데.’

아카데미에서 지내면서 만난 인연, 특히 한니발과 메이와의 연 때문에 비싼 술들을 잔뜩 쟁여 놓았다.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최상급의 녀석들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꿀꺽.

헨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마터면 체면도 없이 침을 흘릴 뻔했다.

‘음, 역시 죽는 건 싫네.’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가 정면을 바라봤다.

짙은 어둠 속에서 그 어둠보다 짙은 사람 형체의 인영이 헨리에게 다가왔다.

갸웃.

갸웃거리는 고개. 헨리는 그 자세를 똑같이 따라 했다.

갸웃.

검은 그림자는 헨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물었다.

“너는…… 누구야?”

“나?”

상당히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무엇일까?

헨리는 생각에 잠겼다.

수식어를 붙이자면 얼마든지 붙일 수 있었다. 가디언부터 시작해서, 엘프, 세계수, 인간, 아케데미의 직원, 한량, 하지만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주정뱅이?”

에단이 놀리듯 부르던 말이 생각났다. 헨리는 무엇이 웃긴지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주정뱅이? 그게 뭐야?”

그림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수한 반응을 본 헨리는 또다시 고민했다.

“음…… 그건 말이지…….”

잠시 고민하던 헨리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마치 아이에게 세상을 알려 주듯이 차근차근.

그 첫 단추가 하필 술과 관련된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뭐 어떠한가.

‘나이도 나보다 많을 텐데.’

세상을 알기 위해서 술은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였다. 헨리는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말을 시작했다.

흥이 오른 헨리가 신나게 떠들었다. 여러 손짓을 이용하며 과장된 어조로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그림자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뭐야. 재미없어?”

“……아니, 재밌어. 단지 좀 신기해서.”

“신기하다고?”

“응. 나는 줄곧 여기서만 있어서 그런 걸 잘 몰라.”

“…….”

할 말 없게 만드네…….

대화가 갑자기 급 음울해졌다. 헨리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헨리가 입을 열었다.

“……흠. 그러면 그거 어때?”

“어떤 거?”

얼굴의 윤곽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자는 마치 눈을 깜빡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을 보여 줄게.”

“…….”

그림자는 침묵한다.

여전히 그림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헨리는 그림자가 굉장히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 헨리의 생각이 맞는지, 그림자는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음…… 이유를 물어도 될까?”

“……그게 내 운명이니까?”

“운명?”

“응.”

“그런 게 어딨어?”

헨리가 인상을 썼다. 이런 암흑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딴 운명…… 휴고한테나 줘 버리라고 해.”

“휴고?”

그림자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우리가 키우는 강아지가 하나 있어.”

“응.”

“…….”

머쓱함을 느낀 헨리가 다시 뒷머리를 긁었다.

“……운명이라는 게 저기에 있는 나무 때문인가?”

헨리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짙은 어둠이 느껴졌다.

헨리는 그곳에 바로 죽은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음험하고 요사스러운 기운.

불길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어둠.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빗발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짙은 친밀감과 동질감 따위가 느껴졌다.

어째서지?

헨리도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헨리의 시선이 다시 그림자에게로 향했다. 그림자는 헨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쟤 되게 나쁘네.”

헨리가 신랄하게 비난하자 그림자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빠?”

“그럼 나쁘지. 어떻게 여기에만 가둬 둘 생각을 하냐. 뭐 재밌는 거라도 만들어 두던가. 온통 까맣구만.”

“하하, 맞아. 나빠.”

그림자가 어린아이처럼 꺄르르 웃었다.

예상 못한 반응에 헨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웃던 그림자가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저랬던 건 아니었어.”

“……그래?”

“응. 원래는…… 나름 즐거웠는데…… 다 바뀌고 말았지.”

“이유가 뭐야?”

“이유?”

헨리의 질문에 그림자는 대단히 슬픈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나도 잘 모르겠어. 이유가 뭘까? 뭔가 많았던 거 같은데. 나는 잘 이해가 안 돼.”

“……그렇구나.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여기서 떠나고 싶어?”

“……그것도 잘 모르겠어.”

“알아야지.”

“왜?”

“너는 너니까. 인형이 아니잖아.”

헨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인형이 아니다.

그것은 헨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헨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렇구나…… 근데 힘들어.”

“왜?”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

그 말을 듣자, 헨리의 가슴까지 아파 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헨리는 감정을 꾹 억누른 채 말했다.

“모른 척해.”

“……응?”

“그냥 눈 딱 감고 모른 척하라고. 너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감이 오지?”

“……응.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알거 같아.”

“나도 너 같은 녀석이었어. 근데…… 지금 나를 구해 준 사람이 저기로 향해 가고 있거든? 너는 알고 있을 거야.”

“……응, 가고 있어. 하지만 위험해.”

“그래. 위험이야 하지. 근데…… 그 사람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어. 위험한 건 중요하지 않아. 늘 위기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그런 존재야.”

“……그래?”

그림자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아 줘.”

헨리는 비장하면서도 올곧은 눈으로 그림자를 바라봤다. 그림자는 한참동안 헨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웃었다.

“응. 사실…… 방해할 수도 없어. 그는 이미 자격을 갖췄거든.”

“……자격을 갖췄다고?”

“응. 그런데…… 잘 모르겠어. 이 이후로는 나도 어떻게 될지.”

“너는 어떻게 됐으면 좋겠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랬는데…… 지금은 좀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아.”

“그래?”

“응. 나도…… 세상을 보고 싶어.”

“……그렇구나.”

그림자의 말을 듣자, 헨리는 가슴이 아려왔다. 잠시 고민하던 헨리가 말했다.

“너는 이름이 있어?”

“……이름? 없어.”

“그럼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해?”

“글쎄?”

“혹시 괜찮으면 내가 이름을 지어 줄까?”

“…….”

그림자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매우 기대하는 것 같았다.

“음…… 미안하지만 내가 작명 센스가 별로 없어. 사실 내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러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기다?”

“응!”

활기찬 대답. 부담감이 가중되었다.

가슴 위에 무거운 바위가 얹어진 것 같았다.

“끄응…….”

신음을 흘린 헨리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샤르.”

“……샤르?”

“……마음에 안 들어?”

헨리가 조심스럽게 되묻자, 한참동안 샤르라는 이름을 곱씹던 그림자가 대답했다.

“너무 좋아. 샤르. 난 이제부터 샤르야.”

배시시.

그림자가 웃었다. 지금껏 보여 준 미소 중에서 제일 해맑고 기뻐 보이는 미소였다.

헨리는 뿌듯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심 끝에 지은 이름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만족하니 그녀도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래, 넌 이제부터 샤르야.”

“응.”

“샤르, 부탁이 하나 있어.”

헨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부탁? 부탁이 뭔데?”

“너도 알고 있지?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거.”

“응.”

“그중에 내 친구가 있어.”

“친구?”

샤르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헨리는 작은 답답함을 느꼈지만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친구는…… 그래. 너랑 나 같은 관계야. 서로 도와주고, 이름도 지어 주는 그런 관계.”

“……그래? 잘 모르겠어.”

“그럴 수 있어. 샤르, 넌 이제 막 친구가 생겼으니까. 샤르, 한 가지 물을게. 만약 내가 저 녀석들에게 죽으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

쏴아아악.

헨리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솜털과 머리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빗발쳤다.

그 찰나의 순간, 헨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악의를 느꼈다.

“……짜증 나.”

“……그치?”

헨리가 힘겹게 미소 지었다.

“지금 짜증 나는 놈들이 좀 있어. 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해. 친구로서 부탁할게. 샤르, 도와주겠니?”

“……응.”

샤르가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헨리가 환하게 웃었다.

스스스.

그림자가 걷힌다.

이름을 받은 샤르는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했다.

흑발의 귀여운 어린아이.

처음 등장한 샤르는 나체였지만, 이내 헨리의 옷을 보고 따라 해서 만들었다.

워낙 작은 체형 탓에 옷이 많이 헐거웠지만 샤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샤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쁜 놈들 혼내 주러 갈까?”

“그래. 부탁할게. 믿어도 되지?”

“응.”

샤르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지만 굉장히 믿음직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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