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화] 죽은 나무 (1)
스스스스.
선혈이 몰아친다.
피의 격류가 모이고 모여 거대한 창과 말뚝, 그리고 검이 되었다.
이것은 곧 심상이다.
심상의 구현. 피의 종주이자 대군주인 아모드라가 만들어 내는 모든 피의 무기는 막대한 힘을 내포한다.
오러조차 가볍게 찢어발길 정도로.
이것이 바로 격의 차이.
하지만 그의 상대도 일반적이지는 않다.
아리오나 또한 대군주.
검은 마녀.
온갖 사이한 것들을 통달한 아리오나는 뱀같은 눈을 치켜뜨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쉽사리 반전되기가 어려워 보였다.
“크하하하하하하!”
카무잔이 광소를 터트리며 무자비하게 아리오나를 몰아쳤다.
쾅! 쾅! 쾅! 쾅! 쾅!
지극히 단순한 공격.
노련한 전사로서의 기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힘과 속도.
주먹이 그리는 궤적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것을 시전하는 자가 카무잔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쾅―!
주먹질 한 번에 아리오나의 마법과 검은 촉수가 터져나간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파괴력이었다.
반격을 꾀할 수도 없었다.
카무잔의 본능은 짐승의 것보다도 날카로웠다.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더 강한 힘으로 부숴 버린다.
‘무식한 새끼.’
그 무지막지한 방식에 카무잔은 기함을 토했다. 정말 상대하기 싫은 녀석이었다.
대군주의 싸움은 그렇게 재밌지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은 일반적인 경지를 뛰어넘어 반신의 수준이라고 봐도 좋았다.
다른 마족들이나 전사들처럼 얄팍한 수 싸움이 아닌, 격의 승부였다.
마치 체스를 주고받는 것과 비슷했다.
한 번씩 주고받으며 격의 차이를 증명하는 싸움.
썩 재밌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무잔은…… 역시나 이질적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지에 들어선다. 하지만 조금도 긴장하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
카무잔은 오히려 사선을 즐기는 자였다. 생명이 위태로울수록 그는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딱히 생명이 위태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이익!”
아리오나가 처음으로 감정을 보였다. 검은 사슬과 촉수가 카무잔을 붙잡으려 들었다.
“하하하―!”
카무잔이 사자후를 터트렸다. 웅혼한 외침에는 막강한 존재감과 힘이 내포되어 있었고, 온갖 사이한 것들을 정면에서 찢어발겼다.
“뭐 이런…….”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아모드라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맞붙기 싫은 녀석이었다.
‘쯧, 일단 하던 것부터 끝내야지.’
페온이 사라졌다.
계획에서 조금 벗어난 상황이었다. 목적지는 예상되었다.
‘에단의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에단의 말을 의심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지막까지 긴가민가하긴 했다.
하지만 모든 정황과 흘러가는 상황들이 에단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것은 하나다. 어서 빨리 아리오나를 죽이고, 둘도 회담지의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페온이 향할 장소는 빤했으니.
아모드라가 손짓하자, 무방비 상태가 된 그녀의 몸에 말뚝과 창이 틀어박혔다.
“끄윽!”
그녀가 처음으로 신음을 토했다.
빈틈이 크게 드러났다.
카무잔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돌진하면서 아모드라를 힐긋 흘겨봤다.
그의 눈빛에서는 불만과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뭐 저런 양심 없는 새끼가…….’
아모드라는 어이가 없었다.
싸움을 방해한 것은 오히려 카무잔이지 않는가.
팟!
순식간에 아리오나에게 접근한 카무잔.
아리오나가 당황하며 어떻게든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피의 창과 말뚝은 그녀가 마나를 운용하는 것을 방해했다.
“큭!”
끔찍한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든 대응을 하기 위해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그녀의 앞에 있는 자는 카무잔이었다.
접근한 카무잔을 떨쳐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쾅!
지면을 박찬 카무잔이 가속했다.
소리조차 카무잔의 속도를 쫓아오지 못했다.
카무잔이 순식간에 접근했다.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안광이 아리오나를 응시했다.
씨익.
카무잔은 웃었고, 아리오나는 웃을 수 없었다.
콰드득!
“끄아악!”
카무잔이 그녀의 몸에 박힌 창 하나를 뽑아냈다. 살점과 함께 창이 뽑혀 나왔다.
뽑아냄과 동시에 카무잔의 발이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쐐애애애액!
아리오나가 공중을 날았다.
카무잔은 그 모습을 관망하지 않았다.
쾅!
지면을 박찬 카무잔이 매섭게 아리오나를 쫓았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카무잔은 생각보다 더 괴물이었다.
‘더 이상 버티는 건 무리다.’
가진 패는 모두 끄집어냈다. 오늘을 대비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전 작업을 준비해 뒀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압도적인 힘 앞에는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눈을 굴렸다. 어떻게는 활로를 찾아내야만 했다.
“눈을 굴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군. 그리고 혐오스러워.”
차게 식은 아모드라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모드라의 창들이 그녀를 노리고 쇄도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아리오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그것을 꺼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지금은 아낄 때가 아니었다.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매우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아모드라와 카무잔 모두 눈매를 좁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둘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수작을 부리기 전에, 지금 끝내야 한다.
중얼중얼.
하지만 아리오나가 조금 더 빨랐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지면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페온과 같은 상황.
카무잔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엄청난 진동이 울려졌다. 건물이 흔들렸다.
하지만 아리오나의 방벽은 깨지지 않았다.
쩌거걱.
그러나 금은 새겨졌다.
아리오나의 동공이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고작 일격으로 금이 그어진다고?
오래 버틸 수는 없다.
이제 저 재앙 같은 주먹이 또 한 번 부딪치면 이 보호막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카무잔의 주먹이 또다시 꽂히려는 그때.
아리오나의 신영이 사라졌고, 우레 같은 폭음이 들려왔다.
콰드득!
방벽이 산산이 조각나며 파편들이 비산했다. 카무잔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리오나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
카무잔은 물끄러미 아리오나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아모드라가 다가와 말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고개를 돌린 카무잔이 눈을 끔뻑이자 아모드라가 답답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다 잡은 녀석인데 쫓아야지.”
* * *
페온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눈이 커졌다.
“헤치웠…….”
“닥쳐!”
크리스토가 노호성을 터트리며 로이마르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로이마르티는 군주의 자리에 오른 지하의 절대 강자 중 하나였지만, 지금 그런 건 사소한 것이었다.
일행이 잔뜩 긴장한 채 크리스토를 바라봤다.
오르번이 먼저 지팡이를 들었다. 안심하기는 일렀다.
할 수 있는 조치를 모두 취하는 게 맞았다.
오르번이 움직이려 하는 그때였다.
“어머, 꼴이 말이 아니군요.”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몸이 굳었다. 마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 같다. 불길함과 요사스러움. 그따위 단순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각이었다.
스르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흘러나오듯 등장한 자는 아리오나였다. 지면에 착지한 그녀는 잠시 비틀거렸다.
아모드라와 카무잔에게 입은 대미지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그녀가 한숨을 토해 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쪽도 나름대로 대비를 했다 그거네요?”
예상외의 인물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두 대군주가 손을 잡은 것도 매우 의외였지만, 설마 보잘것없는 군주와 인간들도 섞여 있다니.
인간들의 상태는 모두 그렇게 좋진 않았다. 특히 기골이 장대한 흑발의 남자는 쓰러지기 직전으로 보였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아리오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빈센트의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익숙지 않은 환경, 지천에 깔린 것은 죽은 마나뿐.
지상에 분포되어 있는 일반적인 마나를 다루는 빈센트에게 죽은 마나는 극독과도 같았다.
그의 비기 [역천]은 대기 중의 마나를 동반한다. 신체에 막대한 부하가 실리는 기술이다.
그나마 지상에서 사용할 때는 조절이 가능했지만 이곳은 지하였다.
심지어 상대는 빈센트보다 훨씬 높은 경지의 강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후를 대비할 상대가 아니었다.
울컥.
피가 차올랐다.
하지만 빈센트는 내색할 수 없었다. 몸이 망가지고 있었다.
회복은 바랄 수 없었다. 이곳은 지하의 심층부. 주위에는 온통 극독뿐이었다.
그리고 아직 적은 남아 있었다.
‘나는 여기서 죽겠군.’
살아오면서 처음 겪는 감정. 하지만…… 빈센트는 확신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죽음.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다.
‘무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죽음인가.’
싸우다가 죽는다.
침대에서 평온한 노후를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가족들의 따뜻함 속에서 죽는 건 바란 적도 없을 뿐더러, 생각만 함에도 몸이 간질거렸다.
피식.
빈센트가 웃었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덜덜덜.
칼자루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빈센트가 반대 손으로 팔뚝을 움켜쥐었다.
떨림이 멎었다. 호흡도 가라앉았다.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싸울 수 있었다.
빈센트의 눈은 꺾이지 않았다.
호수처럼 깊고 고요한 눈에서는 현기가 느껴졌다.
아리오나의 눈썹이 휘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인간 주제에 눈빛이 매우…… 매우 불쾌했다.
“언제까지 주무시고 계실 건가요? 덕분에 험한 꼴을 많이 당해서 기분이 좋지 않답니다.”
“……쯧.”
혀를 차는 목소리. 일행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잘린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사라진 몸뚱이가 몸을 일으켰다. 몸은 잘린 머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스윽.
몸이 머리를 붙잡는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
자리에 있는 모두가 침묵한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치이익.
머리가 순식간에 붙기 시작했다. 절단면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페온은 붙은 머리를 이리저리 꺾어 보며 상태를 점검했다.
“흠…… 나쁘지는 않군.”
페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상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크리스토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씨발…… 좆 같네. 이건 반칙 아니냐? 야, 너 때문이잖아, 이 멍청한 새끼야.”
크리스토가 로이마르티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대뜸 욕을 들은 로이마르티가 눈을 끔뻑였다.
“내, 내가 뭘 잘못…….”
“진짜 이래서 시발 마족이나 군주 새끼들이나 글러 먹었어. 문화생활을 했어야 뭘 좀 알지…… 뇌까지 근육인 새끼들. 에휴.”
크리스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절망으로 치달았다. 룬어의 힘은 모두 소진했다. 빈센트보다야 낫다 뿐이지, 크리스토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크리스토가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