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화] 회담 (5)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몸을 짓누르는 감각이 강해진다. 여러 마법을 중첩해서 걸었음에도 견디는 게 힘들어진다.
죽은 마나를 다루는 오르번도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좋지 않아.’
시야가 점점 트이고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되자, 저 아래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막대한 힘이었다. 에단은 저것에 접근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계획을 듣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돌이키기는 늦었어.’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이미 발을 내디딘 이상 몸을 돌리기는 늦었다.
그 결과가 과연 희망일지 파멸일지는 모르지만.
에단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오르번 주위에 있는 크리스토와 빈센트를 바라봤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둘은 대륙 최강의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하에 들어서자 그 모든 것은 무색해졌다.
빈센트의 움직임은 느려지지 않았다. 표정은 전과 다를 바 없이 무덤덤했지만,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 상황에서 점점 심층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이상 깊이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었다.
오르번의 표정이 굳었다. 그간 쌓아 온 많은 지식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에단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에단은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오랜 삶을 영위해 온 오르번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적은 이어졌고, 말 없는 이동이 계속되었다. 고요함 속에서 발걸음 소리만 이어졌다. 그런 적막을 깨트린 것은 크리스토였다.
“잠깐 멈추지.”
크리스토가 발을 멈추자,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시선이 몰린다.
크리스토는 빈센트와 오르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가만히 에단을 응시했다.
“어이.”
크리스토가 눈살을 찌푸린 채 에단을 노려봤다.
“지금 장난해? 뭐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무슨 의미야?”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하자, 크리스토가 조소했다. 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계속해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질감은 지금이 되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내가, 아니, 여기 온 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온 것 같지?”
크리스토가 으르렁거렸다.
“솔직히 말해. 뭐 때문에 그렇게 미적거리는 거야? 장난해? 내가 그깟 장난질에 어울리기 위해서 기회를 차 버린 줄 알아?”
크리스토는 삶을 반복한다. 죽으면 과거로 회귀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축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리스토를 제외한 모두는 기억을 잃는다.
모든 관계가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가 쌓아 올렸던 벽돌은 전부 무너지고, 사람들은 크리스토와의 과거를 잃는다.
우정, 사랑, 신뢰, 원망 따위의 감정도 없어진다.
크리스토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은 지독한 허무뿐이었다. 되풀이되는 삶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허무 속에서 싹을 키우는 유일한 감정은 증오가 전부였다.
다시 시작되는 삶은 지루하고 권태로웠다. 크리스토의 평소 태도가 느긋하고 권태로운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여기서 끝낸다.’
새로운 시도.
크리스토는 에단을 믿고 여기까지 왔다. 숨이 막히고 피부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처음 겪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크리스토는 룬어를 다루고, 흑마법에도 조예가 있었지만, 이 환경은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 삶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이건 마지막 기회였다. 그가 수없이 반복해 온 실패를 에단 혼자 바꾸고 있었다.
만일 다음 회차가 시작되고, 크리스토가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면 에단도 그대로일까?
지금의 모습 그대로?
확신할 수 없다.
이미 인과는 뒤틀렸다. 앞으로는 어떠한 변화가 생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진 정보와 지식들은 점점 빛이 바랠 거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진지하고, 간절했다.
“솔직히 말해. 지금 네가 하는 고민이 뭐지?”
“…….”
입을 다물고 있던 에단이 빈센트와 오르번을 바라봤다. 둘의 표정을 본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실수했군. 인정하지.”
에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레 겁을 먹고 이들을 무시했다.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은 비단 에단뿐만이 아니었다.
에단은 이들의 각오까지 무시한 것이다.
크리스토에게 비난을 받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괴물이 나타날 거야. 아마도…… 상대하기 까다로울 거고. 죽이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제압이라도 하는 게 좋겠지.”
에단을 포함한 모두가 키메라를 제압하려고 들면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그 이후 에단은 여유롭게 죽은 나무가 있는 장소로 찾아가면 된다.
성공 확률은 장담할 수 없었다. 에단은 이미 한차례 세계수의 힘을 흡수하면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페온과 키아나의 도움도 도움이었지만,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아마 나는 한동안 전투 불능이 될 거야.’
그렇다면 남은 시간 동안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에단은 도움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이 목숨을 거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 달라 부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페온이 어떤 준비와 조치를 해 뒀는지 알지 못한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페온과 아리오나가 카무잔과 아모드라에게 제압당하는 것이다.
둘이 완전하게 소멸하면 에단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어진다.
하지만 에단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페온의 광기 어린 집착이 고작 거기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에단이 허리춤에 매달아 둔 검을 바라봤다. 이것이 곧 열쇠가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입이 마르는군.’
에단이 입술을 핥았다.
호흡이 끈적해진다. 죽은 나무의 힘이 점점 강해진다.
의도적으로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에단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수많은 선택지가 떠오른다. 확신하지 못하기에 떠오르는 선택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였다.
이들의 각오를 얕잡아 보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믿는다면.
에단이 감았던 눈을 떴다.
“한 가지 묻죠.”
에단이 빈센트를 응시했다. 이제 빈센트와 에단의 격차는 크지 않았다.
높은 산처럼 보이던 빈센트와 거의 동등한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빈센트도 결국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인간이었다. 괴물처럼만 보이던 그가 지금은 가만히 에단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야.’
에단은 가족을 지닌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고아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점이 힘들지는 않았다. 독보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던 류태신은 늘 가장 먼저 앞서갔으니.
류태신은 딱히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하여 당시에는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게 당연했다. 류태신의 재능은 마르지 않았으니까.
‘이젠 아니군.’
가족이 생겼다.
비록 남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반쪽짜리 가족이었지만, 에단은 상관없었다.
에단과 빈센트가 서로를 응시했다.
“이제는 편하게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고얀 놈.”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나무라는 기색은 없었다.
“이 이후는 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무사히 생환할 거라는 무책임한 희망을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저를 포함해 모두 죽을 수도, 아니면 이 중에 몇몇은 살 수도 있습니다. 이제 와 말하기는 뭐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아들아, 너는 나를 너무 우습게 여기는 것 같구나.”
미소를 머금은 빈센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은 지상 최강자답게 매우 깊고도 웅혼한 영혼의 힘이 느껴졌다.
스릉.
빈센트가 검을 뽑았다.
청명하고 밝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의 검이 서늘한 예기를 머금었다.
“……후회로 점철된 삶이다. 모든 것을 이뤘고, 더 이상 삶을 갈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너를 홀로 보내고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지 너는 모르겠지.”
“크흠.”
크리스토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빈센트와 에단은 가만히 크리스토를 바라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네가 생각하는 최상의 작전을 말해라. 미리 말하지만…… 나는 아직 은퇴하지 않았어.”
“알겠습니다.”
에단이 웃었다. 쓸데없는 고민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에단은 자신이 예측하는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알겠다.”
이야기를 들은 빈센트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크리스토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만일 네 예상과 다르면 어떡하지? 네가 말했다시피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확신할 수 있겠나?”
“어, 확신해.”
에단이 단언하자, 크리스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믿고?”
“내 감.”
“……하하.”
에단의 대답을 듣고, 잠시 동안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 크리스토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졌군. 확실히 그 대답이 베스트였어.”
크리스토가 오르번과 빈센트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는 저 계획에 동의한다. 둘은 어떻지? 자신 있나?”
“건방진 말투군. 그런 말은 이기고 나서 하는 게 어떻겠나?”
빈센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지적하자 크리스토가 어깨를 으쓱였다.
“쪼잔하게 그러지 말자고. 결국은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것 아니겠어?”
크리스토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소 가벼워졌다.
웃고 있던 에단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럼 부탁하지.”
“다녀와. 아니, 그건 말이 좀 이상하군.”
턱을 매만지던 크리스토가 무언가 떠오른 표정을 지었다.
“기다리고 있어. 금방 처리하고 따라갈 테니.”
“그래.”
씨익 웃은 에단이 몸을 돌리고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거리가 멀어졌다.
짙은 암흑 탓에 금방 에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군.”
피식 웃은 크리스토가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자, 그럼 슬슬 우리도 움직여 볼까?”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 * *
키메라는 길을 헤매고 있었다. 키메라는 주박과 세뇌로 인해 맹목적인 행동만 반복하고 있었다.
중심으로 향해야 한다.
키메라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키메라는 본능적으로 옳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더뎠다.
방해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미로에 빠진 것 같았다.
“키에에에엑―!”
키메라가 괴성을 토해 냈다. 키메라의 속에는 분노와 짜증이 가득했다.
이 울분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었지만, 키메라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미로뿐이었다.
붕―! 붕―! 붕―!
분을 참지 못한 키메라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갈증이 심화될 뿐이었다.
“너 어디 아프냐?”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크리스토의 눈빛이었다.
스릉.
크리스토가 검을 뽑아 들고 키메라를 향해 겨눴다.
“내가 좀 바쁘거든? 기왕이면 빨리 좀 끝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