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회담 (2)
아모드라와 카무잔은 성안으로 들어가 회담실로 향했다.
성은 고풍스럽고 웅장했지만, 을씨년스러운 기운도 물씬 풍겼다.
농후한 죽은 마나.
성 아래에는 죽은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아모드라는 충만함을 느꼈다.
그의 몸은 죽은 마나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저벅저벅.
넓고 긴 복도에는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아모드라가 회담지로 들어서기 전에 멈춰 섰다. 그가 카무잔을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누누이 경고했지만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당부하지. 너는 회담지에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돼.”
“알았다고.”
“…….”
카무잔이 삐딱하게 대꾸했고, 아모드라는 불안함을 느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대답하니 더 못 미더웠다.
문을 열기 전, 아모드라가 눈매를 좁혔다. 짙은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리오나일 테고, 또 다른 하나는 이번에 새로이 대군주의 자리에 올라선 자일 것이다.
덜컥.
아모드라가 문을 열었다.
넓고 고풍스러운 원탁에는 여자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아모드라도 알고 있는 자였다.
검은 마녀 아리오나.
그가 아모드라를 보자마자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아모드라는 경멸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남자쪽을 바라봤다.
에단에게 전해 들은 페온이라는 남자.
마족이 아닌 인간이라기에 얕잡아 봤지만, 페온은 아모드라의 예상보다 강했다.
날카로운 투기와 강렬한 존재감은 그가 대군주인 것을 증명했다. 아모드라는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아모드라가 카무잔을 바라봤다.
카무잔은 우두커니 서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페온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아모드라는 단번에 카무잔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저 새끼가…….’
초롱초롱거리며 빛나는 눈만 봐도 호기심이 느껴졌다. 카무잔은 지금 페온에게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다.
“……와서 앉지?”
아모드라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전쟁은 각오했지만 이런 방식은 원하지는 않았다. 먼저 행동하기보다는 저들의 반응을 보고 대응하는 게 나았다.
카무잔이 시선을 돌려 아모드라를 바라봤다. 뚱한 표정만 봐도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아모드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힘만 센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쳇.”
혀를 찬 카무잔이 자리에 앉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자세가 매우 불량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모드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체념하며 아리오나를 응시했다.
시종일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리오나가 입을 열었다.
“두 분 사이가 아주 좋아지셨군요.”
“그렇게 보인다면 그쪽의 눈이 이상한 거겠지.”
“호호, 그런가요? 그런 것치고는 계속 붙어 있다고 하던데, 무슨 바람이 불으신 걸까요?”
“의도가 불순해 보이는군. 뭘 묻고 싶은 거지?”
“흐음, 별건 아닙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죠.”
“그런 호기심은 끄지. 그보다 새로운 대군주는 과묵한 편인가 보군.”
“조금 그런 편이시죠.”
아리오나가 입을 가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아모드라는 그 모든 몸집이나 제스처 따위들이 역겹게 느껴졌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체 그 추악한 가면은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거지?”
아모드라가 직설적으로 비난을 내뱉었다.
불쾌할 만한 말이었지만, 아리오나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가면이라니요? 후후, 그러시는 아모드라 님은 여전히 집사 하나만 두신 채로 있으십니까? 아, 설마 아직도 과거를 잊지 못한 건가요?”
“……하.”
아모드라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눈매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벌레 같은 년이 주제를 모르는군. 그래, 너는 전부터 그랬지. 납작 엎드려 있을 때는 그나마 봐줄 만했는데 말이야. 왜 이제는 새로운 부군한테 벌레처럼 들러붙는 건가? 큭큭, 둘이 똑같은 놈들이긴 하군. 그렇지 않은가, 페온?”
“…….”
묵묵히 앉아 있던 페온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오, 드디어 반응을 보이는군. 얼마나 뒤가 구리면 이름까지 숨겼을까? 조금 궁금하긴 하군.”
“너…….”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아모드라는 기세를 풀어헤쳤다. 검붉은 기운이 사납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기분이 많이 불쾌하셨나 보군요.”
아리오나가 씨익 웃으며 응수했다.
두 대군주의 기운이 부딪치자 살벌한 스파크가 튀겼다.
그때 카무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지랄하더니 말이야!”
카무잔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그가 응시하는 대상은 아모드라나 아리오나가 아닌, 페온에게 고정되었다.
“몸이 근질근질했다고!”
쿠구구구구.
사나운 기세가 주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페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리오나.”
“네.”
아리오나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닥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불길할 정도로 짙은 검은색이었다.
마치 끝없는 심연을 보는 것 같았다. 아모드라의 눈매가 사납게 휘었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
아모드라가 손가락을 들었다. 핏방울 하나가 손끝에 맺히더니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이는 보잘것없는 행위였지만, 그 여파는 그렇지 않았다.
톡.
핏방울이 검게 물든 바닥에 떨어졌다.
콰가가가가가강―!
섬뜩할 정도로 새빨간 선혈이 범람한다. 아모드라의 혈액은 아리오나의 요사스러운 힘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어머나.”
아리오나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촉수 따위가 여러 다발 생겨났다.
하나하나가 오러를 응축된 것과 다름없었다.
쾅! 쾅! 쾅! 쾅! 쾅!
아리오나의 촉수가 피의 해일을 정면에서 부숴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모드라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스스스.
허공에 형성되는 붉은 삼지창.
아모드라는 피로 이루어진 삼지창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투척했다.
쐐애애애액―!
순식간에 투척된 삼지창이 거칠게 요동치던 촉수에 파고든다.
콰직!
촉수가 삼지창과 함께 바닥에 틀어박혔다.
“터져라.”
아모드라가 명령했고, 피로 이루어진 삼지창은 응답했다.
콰아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삼지창이 폭발했다.
그러는 한편, 카무잔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페온에게 다가갔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카무잔의 말을 들은 페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얘기를 들었다고? 대체 누구한테서 들었다는 거지?”
“흠, 그런 게 중요한가?”
카무잔은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질문이다.
앞에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페온은 강한 자였다. 흘러나오는 기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운만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경지였다.
편법을 사용했든 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페온의 존재가 카무잔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높은 산을 보면 오르고 싶듯, 강자를 보면 싸운다.
단순한 이야기다.
카무잔은 전사였고, 그렇기에 페온과 싸우고 싶었다. 이유는 안중에도 없었다.
히죽.
카무잔이 사납게 웃었다. 누린내가 진동하는 흉흉한 미소였다.
“……미쳤군.”
페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다음 상황을 예측했다.
팟.
카무잔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페온의 눈이 커졌다. 그는 측면에서 나타난 카무잔을 응시했다.
페온의 감각과 동체 시력은 카무잔을 인지했다. 하지만 인지와 반응은 별개의 문제였다.
“하하하하하!”
카무잔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의 몸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투에 들어서자마자 저릿저릿한 고양감에 휩싸였다.
쩌엉―!
카무잔의 주먹이 페온에게 틀어박혔다.
피하기는 글렀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방어를 취했지만, 카무잔의 우악스러운 주먹은 그 방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슈우우웅!
카무잔의 주먹을 맞고 한참 동안 공중을 비행하던 페온이 벽에 틀어박혔다.
쿨럭.
페온이 고개를 들었다. 입안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벅저벅.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무잔이 페온에게 다가갔다. 카무잔의 표정은 아리송함과 실망감이 공존했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지?”
“…….”
카무잔의 목소리는 사뭇 간절해 보였다. 그는 간만에 겪는 제대로 된 싸움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페온은 가만히 카무잔을 응시했다.
페온의 동공은 새까맸다. 마치 무저갱을 보는 것 같았다.
공허하기 그지없는 동공.
그것은 카무잔을 보고 있었지만, 보고 있지 않았다.
“……?”
섬뜩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지만 카무잔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페온의 눈빛 따위가 아니다.
그가 얼마나 이 싸움을 재밌게 만들어 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했다.
“이번에는 제발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달라고.”
카무잔의 표정이 다시 사나워졌다.
찰랑이던 카무잔의 머리카락이 마치 자아를 지닌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샛노란 동공이 먹잇감을 응시한다.
페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카무잔을 응시했다.
지금부터는 실수하면 죽는다.
그건 예감이 아닌, 확신이었다.
* * *
에단은 성의 지하로 향했다. 약도는 이미 받아 둔 상태였지만, 약도의 유무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키에에에에엑!
에단의 체내에 잠들어 있는 죽은 나무가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농후한 죽은 마나가 에단을 이끌었다.
시각, 후각, 촉각.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기는 했지만, 죽은 나무가 먼저 함정들을 경고했다.
‘묘하군.’
죽은 나무의 감정이 이렇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죽은 나무는 언제나 갈증이나 식욕 같은 단순한 감정만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죽은 나무를 흡수하기 직전의 상황에서만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키에에에에엑―!
마치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다양한 감정이 한번에 밀려온다.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정표로서의 기능은 확실했지만, 그 정도가 과했다.
키에에에에에엑―!
죽은 나무가 한시도 쉬지 않고 괴성을 질러 대자, 에단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적당히 안 해?’
…….
에단의 경고가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는지 죽은 나무가 잠잠해졌다.
‘뭐야 이건…….’
에단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복도가 좁아지고 어두워진다.
사방에 어둠이 깔려도 에단에게는 별문제 없었지만, 꺼림칙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에단이 흘깃 뒤를 바라봤다.
로이마르티와 록사자는 손을 꼭 붙잡은 채 에단을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린 둘의 얼굴을 바라보던 에단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
“…….”
에단과 둘이 서로를 응시했다. 에단은 모른 척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나아가기를 한참.
점점 죽은 마나의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에단이 몸을 낮췄다.
“정지.”
에단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자, 록사자와 로이마르티가 흠칫 놀랐다.
“선객이 있군.”
에단의 눈매가 좁혀졌다.
눈매를 좁히자, 에단의 월등한 시력이 목표를 포착했다.
신성 왕국에서 만났던 괴물.
키메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