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화] 회담 (1)
크리스토는 준비를 끝냈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늘 오연하던 그의 표정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싸늘했다.
크리스토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응시했다.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정.
“큭.”
크리스토가 실소를 터트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꼴에 긴장했다는 거냐?’
크리스토가 자문했다.
이 선택은 도박이었다.
여덟 번의 회귀. 어떠한 이유로 그가 삶을 되풀이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반복되는 삶이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토는 이 저주가 썩 기꺼웠다.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거듭되는 실패. 크리스토의 감정은 닳아 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피를 흘리고, 소중하던 것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저주한다.
상관은 없었다. 이제는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무덤덤했다.
스스로가 망가짐을 느끼지만 그렇기에 더욱 오기가 생겼다.
실패에 대한 짜증, 지하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크리스토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건 변수다.’
이건 에단의 제안이다. 에단은 한 번에 크리스토가 풀지 못한 비밀들을 밝혀냈다.
비록 검증되지 않은 추측일 뿐이지만, 크리스토는 진실 쪽에 마음이 기울었다.
아니, 확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토는 황당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들었다.
에단에게는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재밌군.’
크리스토가 씨익 웃으며 포탈을 열었다.
이건 리스크다.
그는 단 한 번도 지하에 내려가 본 적이 없으며, 지하에서 죽게 됐을 때 이전처럼 회귀에 성공할지조차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크리스토는 에단의 선택을 믿어 보기로 결심했다.
우웅.
포탈이 열리며 아카데미로 향하는 통로가 생성되었다. 크리스토가 발을 내딛었다.
* * *
날이 저물고 있었다.
붉은 석양이 지고 있다.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태양 빛이 이글거린다. 마치 방 안이 불타는 것 같았다.
빈센트는 고요한 눈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빈센트가 눈을 감았다.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것 같았다.
수많은 생명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릇된 선택 한 번에 모두를 잃을 수도 있었다. 가문이 몰락하고, 수하들이 저주하며 죽어 간다.
‘아들아.’
빈센트가 감았던 눈을 떴다.
형형한 안광이 번뜩이더니, 서서히 갈무리되어 갔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을 정리하고, 빈센트가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곁에 걸쳐 둔 검을 차고 집무실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우웅.
허공이 갈라지며 대기 중의 마나가 흔들린다. 빈센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스윽.
갈라진 허공에서 크리스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빈센트가 검집에서 슬며시 검을 뽑기 시작하자, 크리스토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이쿠,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의사를 밝힌 크리스토가 주위를 훑어보더니 의자에 앉았다.
“잠시 대화 좀 하실까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하는 크리스토.
빈센트의 뺨이 꿈틀거렸다.
“대단히 무례하군.”
“하하, 많이 듣던 소리입니다. 자고로 황제란 오만하고 무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연하게 대꾸하는 크리스토.
빈센트는 가만히 크리스토를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껄일 말이 남아 있으면 빨리 지껄여라.”
“그러도록 하죠.”
크리스토는 천천히 다리를 꼬며 빈센트를 바라봤다.
그는 빈센트를 관찰하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 손짓과 표정, 시선 처리와 반응.
크리스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큭큭큭큭.”
너무 기가 막혀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스스로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이 짜증 났다. 그렇게 수많은 기회가 있었으면서 가장 기본적인 걸 놓치고 말았다.
대륙을 멸망시킨 빈센트는 이자가 아니었다.
빈센트는 인상을 쓰며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크리스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아, 이거 실수했습니다. 자, 그럼 본론을 꺼내 볼까요?”
크리스토는 웃음기를 지운 채 빈센트를 바라봤다.
“에단을 통해 말은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이번 지하 원정에 누가 갑니까?”
“……그게 중요한가?”
“지금 장난합니까?”
크리스토가 얼굴을 찌푸렸다.
“당연히 중요하죠. 지상과 지하는…… 아, 그냥 말 편하게 하겠습니다. 경어가 참 입에 안 붙네.”
“……허.”
빈센트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크리스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살아온 기간으로 따지면 빈센트보다 크리스토가 훨씬 오래 살았다.
“어차피 그쪽도 알고 있잖아? 일반적인 마스터 수준도 지하에 내려가면 아무런 도움이 안 돼.”
크리스토는 지하의 무서움을 알고 있고, 블란테의 전력 또한 알고 있다. 블란테는 강하다. 대륙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
빈센트를 제외하고도 첸과 네이드 모두 완숙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게 통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지상에 한해서다. 지하는 아예 상황이 다르다.
“나와 당신, 그리고 헨리와 오르번. 이렇게만 간다.”
나머지는 짐이다. 크리스토는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데려갈 생각이다.
이번 작전이 성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만큼의 희생자가 생겨나도 감수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에단에게 전달받은 계획에 어중간한 마스터는 필요치 않았다.
군주 하나의 발목을 잡는 것?
수십 수백의 군주가 도사리는 지하다. 상위 군주가 합세하거나, 대군주가 나서는 순간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다.
“더 이상 희생자를 만들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야?”
“……지금 내게 명령을 하는 건가?”
“명령이라…….”
크리스토가 삐딱하게 앉으며 빈센트를 노려봤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당신, 가주로서는 최악이군.”
“…….”
빈센트의 몸이 움찔거렸다. 마치 정곡을 찔린듯한 반응.
크리스토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뭐야,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잖아? 나도 백성들에게 좋은 황제는 아니니 뭐라 나무랄 생각은 없지만…… 이제는 선택을 무를 수가 없어.”
크리스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결정해. 이제는 시간 없어.”
“…….”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 * *
빈센트와 크리스토는 오르번과 헨리를 호출했다. 둘은 빈센트의 응접실로 향했다.
두 사람은 크리스토를 보자마자 인상을 썼지만, 크리스토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또 보네?”
“건방진 건 여전하군.”
“매력이라고 생각해.”
하하.
작게 웃은 크리스토가 구체적으로 전해 받은 계획을 전달했다. 구체적인 내막을 들을 오르번이 미간을 좁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이군.”
“그러니까 더 할 만한 거 아니겠어? 너무 쉬우면 재미없잖아.”
킥킥거리는 크리스토를 보며 고개를 저은 오르번이 빈센트를 응시했다.
“인원은 이게 끝인가?”
“……그래.”
“잘 선택했군. 괜히 몸집을 불려서 좋을 건 없으니…….”
“……너는 아무렇지도 않나?”
빈센트의 물음에 오르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이제 와서 걱정인가? 아무렇지도 않냐라…….”
오르번이 턱을 매만졌다.
“굳이 따지자면 기대가 조금 되는군. 그동안은…… 너무 무료하게 살았으니…….”
오르번이 과거를 회상했다.
늪지에 은둔한 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드래곤과도 비견되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딱히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며 홀로 연구하고 있을 뿐.
하지만 에단을 만나게 되며 썩 즐거웠다. 드래곤의 시체도 만지게 되고, 그에게조차 막연하던 지하를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나는 살 만큼 살지 않았나?”
오르번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그는 딱히 삶에 큰 미련이 있지 않았다.
빈센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헨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
헨리가 흠칫거리며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저는 딱히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즘 생활에 대단히 만족을 하고 있어서요…… 그, 그렇다고 뺄 생각은 없습니다. 에단 님에게 진 빚도 많고요…… 죄송합니다…… 제가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바보처럼 웃은 헨리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저는 살아 돌아올 생각입니다. 자신도 있구요.”
“……그래.”
그 말을 들은 빈센트가 작게 웃었다.
“그럼 더는 말하지 않겠다. 단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빈센트의 말에 다른 이들이 모두 웃었다.
* * *
회담 날이 되고, 아모드라와 카무잔이 회담 장소로 이동했다.
에단은 로이마르티와 록사자를 강제로 이끌고 뒤따랐다.
회담 장소는 한눈에 봐도 웅장함이 전해졌다. 압도적인 위용의 고성.
에단이 성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에단의 생각을 읽은 아모드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죽은 나무를 찾고 있나?”
“어,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숨겨 두기라도 했나?”
아모드라가 고개를 저으며 아래를 가리켰다.
“지하.”
“……여기서 더 파고 내려간다고?”
“뭐, 가 보면 알겠지. 성공을 기원하마.”
아모드라의 태도에 에단이 얼굴을 구겼다.
“뭐, 해 보면 알겠지. 어차피 우리한테는 뒤가 없다고. 그치?”
에단이 뒤에 있는 로이마르티와 록사자를 보며 말했다. 흠칫 놀란 둘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대답 안 하냐?”
에단의 목소리가 사나워지자, 둘이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네.”
“좋아, 너희도 이제 나와 한배를 탄 거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두 군주의 안색이 거무튀튀해졌다. 큭큭거리며 웃은 에단이 아모드라를 향해 말했다.
“이제 먼저 들어가라고. 아, 은신 좀 걸어 주고.”
“……쯧.”
혀를 찬 아모드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검붉은 기운이 에단과 두 군주를 휘감았다.
군주는 공포에 젖은 채 벌벌 떨었지만, 에단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성공을 빌지.”
“괜히 처 발리지나 말라고.”
“너는…… 후우, 됐다.”
아모드라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선 채 꾸벅꾸벅 졸던 카무잔도 아모드라의 뒤를 따라갔다.
“오, 그럼 이따가 보자고.”
“그래.”
설렘이 가득한 카무잔의 표정에 에단이 웃었다. 참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이번 계획에 앞서 매우 담백한 반응을 보였다.
― 오, 대군주랑 싸울 수 있다고? 그게 정말인가?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눈빛이 아직 잊히지 않았다.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카무잔을 보고 있으면 가토가 떠올랐다.
“자, 그럼 우리도 슬슬 가 볼까?”
상념을 털어 낸 에단이 로이마르티와 카무잔을 향해 말했다. 둘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시작은 계획대로 되어야 할 텐데.’
에단은 의도적으로 성에 늦게 도착했다. 페온과 아리오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뭐, 걱정한들 달라지는 건 없지.’
아모드라가 걸어 준 은신 마법의 성능을 믿는 수밖에.
입꼬리를 말아 올린 에단이 성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