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화] 작전 준비 (7)
아모드라의 응접실.
그곳에는 두 명의 대군주와 한 명의 인간이 자리해 있었다.
‘아직도 저러고 있네.’
에단이 카무잔을 바라봤다.
카무잔은 아직도 입을 삐죽 내민 채 시무룩해하고 있었다.
“얘기 끝나면 대련이나 할까?”
“……그게 정말인가?”
침울하던 카무잔의 얼굴이 환해졌다. 에단이 실소를 흘렸다.
‘애새끼도 아니고 원.’
그래도 어쩌겠는가. 최대한 맞춰 줘야지.
밝아진 얼굴의 카무잔을 놔두고 에단은 본론을 꺼냈다.
“이제 내일이군.”
“그래, 내일이다. 지금 와서 작전을 세운다고 한들 그게 의미가 있는가?”
“없긴 왜 없어. 사실 작전이랄 것도 없어. 그냥 치고받고 싸울 거거든.”
툭.
에단이 테이블 위에 두 종류의 목걸이를 올려놨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검증된 사실이 아닌, 어디까지나 내가 하는 추측이야. 그러니까 감안하고 들어.”
에단은 자신의 추측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페온의 목적과 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금까지의 행동들.
“그 과정에서 꽤나 의외인 걸 들었는데.”
에단이 룬어의 힘을 슬며시 끌어올렸다. 꺼림칙한 룬어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힘이 ‘인과’를 비튼 자만이 쓸 수 있다는 거야.”
“…….”
아모드라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에단을 응시했다.
‘역시 뭔가 짚이는 게 있기는 한가 보군.’
“지상에도 독특한 녀석이 있더라고. 녀석은 날 회귀자로 생각하더군.”
에단은 둘에게 크리스토에 관한 얘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회귀자라는 소리를 들은 아모드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죽으면 과거로 돌아간다라…… 믿기 힘든 얘기군.”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자유야.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건. 이 힘의 근원이지.”
에단은 유론다에게 들은 정보들을 토대로 재해석하여 설명했다.
“회담 날. 나는 중간에 난입하여 죽은 나무를 찾아갈 거야. 열쇠는 나한테 있으니 나는 페온보다 먼저 들어갈 수 있어.”
“우리가 해야 할 건?”
“당연한 걸 묻고 있어?”
에단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냥 죄다 부숴 버려. 이건 전쟁이잖아?”
“하하하, 말을 쉽게 하는군.”
“연기할 필요는 없어. 너도 비슷한 생각이잖아?”
아모드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군주의 자리는 결코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 또한 수많은 피와 시체를 밟고 지금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그럼 당일에 보자고.”
에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무잔도 덩달아 일어났다.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얘기 끝났나?”
“……그래.”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기뻐하는데 아무래도 한번 어울려 줘야 할 것 같았다.
* * *
“후우.”
에단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피로가 몰려왔다.
예상하긴 했지만 대련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에단은 또다시 걸레짝이 된 옷을 보고 실소를 터트렸다.
포션 덕에 상처 없이 멀끔했지만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무잔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지하실을 나갔다.
꽤나 지쳤지만 쉴 시간은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에단이 곧장 로이마르티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아, 오셨습니까?”
로이마르티가 에단에게 인사했다.
고개를 끄덕인 에단이 미묘한 표정으로 로마이르티와 록사자를 바라봤다. 흐르는 분위기가 기묘했다.
‘뭐, 상관없나.’
뭐가 됐건 일만 잘하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뭐 하냐? 인사 안 해?”
로이마르티가 록사자한테 눈을 부라렸다. 흠칫한 록사자가 에단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야.”
역시 뭔가 이상했다.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은 에단이 본론을 꺼냈다.
“지금 지상이랑 연결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마침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로이마르티가 웃으며 말했다. 자신감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이전에 연결했던 곳으로 연결하면 됩니까?”
“아니, 이번엔 다른 곳이야. 록사자, 네가 연락하던 인간이랑 연결해 줘.”
“……네? 아, 알겠습니다.”
록사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마법을 준비했다.
마법이 시전되고 곧장 반응이 왔다.
록사자와 로이마르티는 에단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지하실을 나섰다.
― ……설마 했지만, 놀랍군.
크리스토가 놀란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 짧은 시간에 자신과의 연결 수단을 마련했을 줄이야.
― 록사자와 접선했나 보지?
“그래.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에단은 대략의 정보를 공유하고, 작전을 설명했다.
가만히 작전을 듣던 크리스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너무 무모하군.
“그러니까 의미가 있는 거지.”
에단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무모했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 좋아. 나는 이미 협력하기로 결정했으니 이제 와 무르지 않겠어. 시간은 언제지?
“내일. 하루도 남지 않았네?”
― ……하하하.
크리스토가 기막힌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이마를 친 크리스토가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은 팔짱을 낀 채 태연하게 크리스토를 바라봤다.
―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너는 나보다 더 정신 나간 놈이야.
“어. 칭찬 고마워. 그래서 못하겠다는 건가?”
― 그럴 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준비를 끝내지. 너한테 한번 걸어 보겠어.
“후회해도 모른다?”
― 하하,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많은 후회를 했어.
크리스토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일방적으로 마법을 해제했다.
에단은 로이마르티를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전에 했던 곳으로 연결시켜.”
로이마르티는 곧장 마법을 시전했다. 확실히 마법의 시전 속도나 안정성 면에서 이전보다 많은 발전을 한 것이 보였다.
― 자주 보는군.
“그러게. 남자 얼굴을 자주 보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됐어.”
― 누구는 보고 싶어서 보는 줄 아나?
오르번이 얼굴을 찌푸렸다. 농담을 주고받은 에단이 피식 웃었다.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불러 줘. 가능한 한 빨리.”
―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오르번이 전령을 보냈다. 에단은 묵묵히 사람들을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와 다른 이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자들도 함께 왔다. 에밀라와 첸, 그리고 렉사르와 르니엘까지.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큭큭 거리며 웃은 에단이 표정을 굳혔다. 에단은 빈센트를 향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곧 크리스토가 찾아갈 겁니다. 여러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협력할 겁니다.”
― ……이유가 뭐지?
크리스토와 협력한다고 하자, 빈센트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불쾌함과 거부감을 내비쳤다.
“그 이유는 지금부터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인과에 대한 것은 설명할 수 없었다. 하여 에단은 그 내용을 빼고 작전에 관한 것과 목적을 말했다.
전과 달리 마법이 안정화되어 유지 시간의 제한은 딱히 없었지만, 당장 회담의 날짜가 내일이었다.
여유를 부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에단이 계획을 설명했다.
최대한 간략하고 담백하게 설명했지만, 그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상입니다.”
― …….
빈센트가 침묵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한 적막이 내리깔렸다.
―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딴 게 계획이라고? 이건 말도 안 돼. 무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이걸 진짜 실행할 생각이야? 이건 자살행위라고!
에르미온이 불같이 분노했다. 그러나 에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작전은 실행할 거야. 무모하다고? 내가 언제 무모하지 않은 선택을 한 적이 있나? 난 편한 길을 좋아하지 않아.”
― 진짜 너는…….
에르미온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에단의 시선이 다시 빈센트에게로 향했다.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아니면 희망이 없을 겁니다.”
― ……하나만 묻지.
“말씀하시죠.”
― 너는…… 정말 내 아들이 맞는가?
빈센트의 그 질문에 에단이 처음으로 동요했다. 에단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를 감지 못할 빈센트가 아니었다.
에단이 미소 지었다. 어쩐지 쓰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당연한 걸 묻지 마시죠.”
― ……그래 알겠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겠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내일…… 아니, 이제 오늘이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뭐, 뭐라고? 잠깐…….
에르미온이 당황해하며 말했지만 에단은 일방적으로 마법을 해지했다. 또다시 강제적인 해지였지만, 에단은 깊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에단이 지하실을 나갔다. 이제 정말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요.”
간드러지는 미성.
아리오나가 고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페온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페온의 얼굴은 싸늘했다.
“그래. 이제 첫 열쇠를 얻는 거지.”
“첫 열쇠가 가장 크겠군요.”
페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오나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기품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건 이제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건가요?”
“완벽한지는 모르지만 이제 통제는 가능하더군. 미완성품이라 한계가 명확하긴 하지만.”
쯧.
페온이 혀를 찼다.
아쉬움이 남았다. 역시 저런 미완성품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저런 미완성품보다는…….’
에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페온이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 냈다. 이제 와서 아쉬워한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었다.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번 계획을 성공시키고 지상으로 올라가서 남은 열쇠를 손에 넣으면 된다.
그렇게 멀리 있던 것이,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페온이 침을 삼켰다. 입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견디기 어려운 갈증이 느껴졌다.
페온은 감정을 가라앉혔다.
초조함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아, 카무잔이 또다시 움직였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도 군주 한 명이 잡혀갔다고 합니다.”
“그런 짓을 벌이는 이유는?”
페온의 물음에 아리오나가 웃었다.
“제가 알 리가요. 그렇게나 앙숙이던 둘이 무슨 작당을 벌이려는지…… 조금 기대가 되는군요.”
“기대라…….”
페온이 피식 웃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대군주가 얼마나 뒤틀린 성향과 감정을 품고 있는지.
페온은 아리오나를 굉장히 혐오하고 역겨워했다. 그럼에도 같이 행동하는 것은 목적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결코 아리오나와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교활한 년.’
페온이 아리오나를 흘겨봤다.
늘 미소 짓는 저 역겨운 가면 뒤에는 추악하고 더러운 민낯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준비는 끝났나?”
“그럼요. 이미 진즉에 끝내 뒀답니다.”
페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슬슬 이동하지.”
곧 회담이 시작된다. 페온이 손가락을 튕기자 키메라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키메라의 눈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페온과 아리오나는 키메라를 이끌고 회담지로 향했다. 회담지는 죽은 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페온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