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화] 작전 준비 (6)
네빌라와 에단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런데 웬일로 갑자기 대련이야?”
“……그러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 그럼 얼마나 성장했는지 봐볼까.”
에단이 피식 웃었다. 지하에서 살아가는 마족들은 대개 인간보다 잠재력이 높았다.
특히 네빌라는 전사장까지 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과 역량을 지닌 전사였다.
그녀의 재능은 마족 중에서도 최상인 편에 속했고, 완숙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
로이드와 어떤 훈련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양질의 훈련을 한 것 같았다.
비장한 표정만 봐도 고생한 것이 느껴졌다. 네빌라는 가만히 에단의 허리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검은 쓸 생각이 없나?”
“아직은.”
“아직은……이라.”
네빌라가 에단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그녀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에단이 아스란을 검집 채로 꺼내 뒤로 집어 던졌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슬슬 시작할까?”
“…….”
끄덕.
고개를 끄덕거린 네빌라가 자세를 잡았다.
안정된 중단세.
이전처럼 거칠게 기세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훨씬 절제된 살기가 넘실거렸다.
‘오.’
에단은 작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확실히 그녀는 과거보다 훨씬 성장했다.
만일 그동안 에단이 놀고 있었다면 꽤나 상대하기 버거웠을 것이다.
‘놀고 있었다면…… 말이지.’
에단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동안 에단이 상대해 온 자가 누구인가.
지하 최강의 전사라고 불리는 대군주 카무잔이었다.
비록 가진 힘의 절반조차 끌어내지 못했지만, 그 존재감과 살기는 네빌라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에단이 편하게 자세를 갖췄다.
이제 에단은 형식적인 자세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미 신체 능력과 반사 능력이 일정한 수준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네빌라의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가늘던 호흡이 끊기고, 근육이 긴장한다.
지금이다.
팟!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신속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동공은 그녀의 움직임을 정확히 좇았다.
측면.
쇄도하는 칼날에는 선명한 검은 오러가 둘려 있었다.
그야말로 살벌한 칼날의 폭풍.
에단의 눈이 그것을 기민하게 좇는다.
꽈악.
에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에 오러가 서린다.
이제 에단은 이전처럼 마나를 무식하게 낭비하지 않는다.
절제와 컨트롤.
에단이 중점적으로 훈련한 것이었다.
콰과과과광―!
강렬한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빛이 번뜩이며 오러의 불똥이 사방에 튀긴다. 충격이 지하실을 뒤흔들었다.
“이게 끝이야?”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네빌라의 공격은 촘촘하고 정밀했다. 사나운 칼날의 폭풍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에단은 공격을 피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정면에서 부숴 버리는 것이다. 수십 수백이 넘는 오러의 칼날과 궤적을 모조리 때려 부쉈다.
‘말도 안 돼!’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깨와 손아귀에서 강한 통증이 엄습해 왔다. 네빌라가 이를 악물었다.
아직 포기하기는 일렀다.
파박!
그녀가 공중제비를 돌며 거리를 벌렸다. 빠르고 민첩한 대처였지만, 에단이 쫓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에단은 네빌라를 쫓지 않았다. 상대를 끝장내기 위한 대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에단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카무잔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카무잔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대련을 관람하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원.’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카무잔은 참으로 알기 쉬운 자였다.
그는 괴물같이 강한 대군주이기도 했지만, 순수한 전사이기도 했다.
“왜 나만 빼놓고 즐기는 거지?”
카무잔은 진심으로 서운함을 내색했다. 표정만 봐도 섭섭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고.”
“…….”
카무잔이 서운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피식 웃고는 시선을 돌려 네빌라를 바라봤다.
미안함과는 별개로 지금은 그녀에게 집중해야 했다.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였다.
“아직 끝난 건 아니지?”
“당연한 것을 묻는군.”
네빌라가 웃었다.
고작 여기서 끝낼 거였다면 대련을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우.”
그녀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거친 호흡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녀의 날뛰던 기세도 안정되었다.
팟.
네빌라가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정직하게 에단의 정면으로 향했다.
어깨가 들썩인다. 날카로운 검격이 쏟아진다.
에단은 상체의 움직임으로 슬며시 피하며 달려들었다.
검과 맨몸.
사거리의 차이는 명확하다.
오러를 길게 흩뿌리는 게 아니라면 맨몸인 쪽이 절대적으로 거리를 붙여야 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때부턴 검의 이점이 사라진다.
살상력의 이점도 없었다. 에단의 일격은 모두 치명적이었으니까.
에단이 접근하려 들자, 네빌라의 몸이 빙그르 회전했다.
그녀가 뒤차기를 날려 에단이 달라붙는 것을 떨쳐 내려 들었다.
그때, 에단이 네빌라의 발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그녀가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에단도 똑같이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 설마가 맞아.’
피식.
에단이 네빌라의 발목을 움켜쥔 채 그대로 지면을 향해 냅다 후려갈겼다.
그녀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에단의 대처가 더 빨랐다.
덥석.
타이탄의 힘이 둘린 왼손이 오러가 둘린 네빌라의 칼날을 움켜쥐었다.
까드드드드득―!
“치사하게!”
“치사한 게 어딨어?”
에단은 코웃음을 치며 바닥에 그녀를 꽂았다.
쾅!
“커헉!”
네빌라가 신음을 터트렸다.
에단은 적당히 힘을 조절했다.
이 대련의 목적은 누구를 끝장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네빌라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그녀는 넋 나간 얼굴을 한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은 고개를 내밀어 네빌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괜찮냐?”
“아니.”
얼굴을 찡그린 네빌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이 욱신거렸다.
아무리 적당히 힘 조절을 했다지만 타격이 없을 리가 없었다.
“하하, 재밌었군. 그럼 이제 내 차롄가?”
카무잔이 호쾌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팔을 푸는 모습이 꽤나 기분이 들떠 보였다.
“……잠깐 저희끼리 대화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네빌라가 정중하게 부탁했다. 웃으며 다가오던 카무잔이 뚝 하고 멈췄다.
“…….”
카무잔은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에단과 네빌라를 바라봤다. 추욱 늘어진 어깨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어쩔 수 없지…….”
터덜터덜.
멀어지는 카무잔.
에단은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찝찝함을 느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참…….”
“……대군주는 묘한 존재군.”
에단과 네빌라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큭큭. 아, 그래도 좀 마음이 편해졌군.”
네빌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원래는 마음이 무거웠나? 뭔데 그렇게 궁상을 떨고 있어.”
“너는 모르겠지. 그래, 그런 녀석이야. 제기랄, 부하들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네빌라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에단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냥 여기서 얘기하지. 차나 기울이면서 고상하게 말할 성격도 아니고 말이야.”
“말해.”
“너는…… 독특한 놈이야.”
“그래?”
“어, 늘 주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재능이란 말로 끝낼 수준이 아니야.”
네빌라가 말을 이어 나갔다. 오랫동안 속에 담아 두던 말이었다.
“처음부터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너는 강했지만 충분히 곁에 서 있을 수 있는 수준이었지. 오히려 동기부여가 됐다고.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말이야.”
네빌라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말이야…… 너는 점점 멀어지더군. 도저히 쫓을 수 없는 속도야. 네가 하는 배려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어떻게 그렇게 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지? 그건 용기 수준이 아니야. 너는…… 어딘가 이질적이야.”
“…….”
네빌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꺼내면서도 굉장히 괴로워 보였다.
“이를 악물고 훈련에 매진해도…… 결과는 이렇군. 네가 무슨 계획인지, 뭘 할 작정인지 나는 알지 못해.”
네빌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분했다. 너무 분했지만 격차는 극명했다.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나는 네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없다. 그렇기에 할 말이 없는 거야. 당당히 곁에 설 수준이 되려면 군주, 아니, 그것도 아니지.”
그녀가 웃었다. 굉장히 슬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대군주쯤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부족원들이 마을을 옮겼다는 것을 최근에야 들었어. 너는 마을을 찾아갈 때도, 다른 곳을 갈 때도 나를 찾지 않았지. 그 이유는 아주 당연하면서도 단순해. 단지 내가……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에단을 바라봤다.
“후, 더럽게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 살다가 내가 이렇게 푸념을 할 날이 올 줄이야.”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에단은 가만히 네빌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그딴 표정 지으라고 이런 말을 꺼낸 줄 알아?”
네빌라가 으르렁거리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아니, 그냥 지지리 궁상이다 싶어서.”
“……이 새끼가.”
“확실히 내가 생각이 좀 짧았네. 간만에 마을이나 가 볼까?”
“……뭐?”
네빌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동요를 숨기지 않았다.
“이딴 거에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지 말고 그냥 따라와.”
“…….”
민망했는지 네빌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가자.”
“……정말 가도 되는 건가?”
“안 될 게 뭐가 있어? 아, 가기 전에 아모드라부터 만나고.”
결계로 보호받는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각인을 새겨야만 했다.
“마을에 들어가고 싶다고?”
“어, 벌써 향수병이 왔다네.”
“향수병?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런 게 있어. 그래서 힘드나?”
“힘들 게 있을 리가.”
아모드라가 손가락을 살짝 튕기자 네빌라의 어깨에 붉은 각인이 새겨졌다.
“그럼 다녀오도록.”
“그래, 금방 다녀오지. 계획에 대해 할 얘기도 있으니.”
아모드라가 손짓했다. 에단은 네빌라와 함께 마을로 향했다.
“……정말 돌아왔군.”
마을로 들어간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마을 사람들과 전사들이 네빌라를 크게 반겼다.
“이거 우리 전사장 아닌가!”
“하하하! 왜 이리 늦었어!”
“네빌라가 돌아왔다!”
반가운 얼굴과 환대에 네빌라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에단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얘가 얼마나 궁상을 떨었는지 알아? 뭐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울먹이면서 아주 그냥…….”
“그게 진짜야?! 야만적인 전사장도 귀여운 구석이…….”
“다, 닥쳐라! 너희들 그 표정은 뭐지?!”
네빌라가 붉어진 얼굴로 성을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