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화] 작전 준비 (3)
록사자는 한껏 고분고분해져서 에단과 카무잔을 따라왔다.
과연 저것을 고분고분해졌다고 칭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힐긋.
카무잔이 록사자를 흘겨봤다. 카무잔은 영 록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문제는 카무잔이 노려볼 때마다 록사자가 바닥에 주저앉는다는 것이다.
곧 죽을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어 대니 에단 입장에서는 매우 귀찮았다.
“저저…… 쯧쯧.”
카무잔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어떻게 저렇게 심약한 자가 군주의 자리까지 올라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단의 부탁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쳐 죽였을 것이다. 카무잔의 기준에서 록사자는 완전한 자격 미달이었다.
“애 좀 적당히 패지 그랬어.”
“적당히 패서 말을 들어먹을 놈이 아니었다.”
“어휴…….”
에단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카무잔은 다 좋았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신념이 확실했다.
좋은 말로 했을 때 신념이 확고하다지, 고지식한 것이었다.
“정신 안 차려?”
에단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몸을 일으킨 록사자가 오들오들 떨었다.
“…….”
카무잔의 반응에 묘한 죄책감을 느낀 에단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가자.”
* * *
에단과 카무잔은 록사자를 이끌고 아모드라의 성에 입성했다.
응접실에서 차를 즐기고 있던 아모드라는 록사자의 모습을 보고는 황당한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오면 군주가 저런 꼴이 된 거지?”
“내가 안 했어.”
에단은 결백을 주장했다. 억울할 법도 한 것이, 이번에 에단은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에단을 바라보던 아모드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무잔에게 향했다.
물론 카무잔은 팔장을 낀 채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
“뭐.”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
“……됐다.”
아모드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더 대화를 이어 나가 봤자 아모드라만 손해였다.
“그래서 쟤는 어쩔 셈이지?”
“지하실에 넣어야지.”
“……군주 두 명을 한 지하실에 넣는다고?”
“왜?”
에단은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수한 악의에 아모드라는 섬뜩함을 느꼈다.
“……마음대로 해라.”
“그러려고. 따라와.”
에단이 록사자를 이끌고 성의 지하실로 향했다. 록사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벌써 대군주를 두 명이나 마주했다. 록사자는 이 상황이 실감되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는 거지?’
암울함과 우울함이 그를 지배했다.
차라리 그때 자결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불안함에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 댔다.
에단은 록사자와 함께 지하실을 내려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오래된 문이 꺼림칙한 신음을 흘리며 열렸다. 지하실 안에는 죽은 눈을 한 로이마르티가 기계적으로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나 왔다.”
“……아.”
로이마르티가 에단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가 천천히 이성을 되찾았다.
“오셨습니까? 아…… 저분은?”
“네 후임.”
에단의 말을 이해한 로이마르티가 쓴웃음을 지었다.
에단의 뒤에 있는 저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진 힘만 놓고 보면 로이마르티 이상이었다.
아마 로이마르티보다 높은 서열의 군주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공포에 젖어 있단 말인가.
로이마르티는 자기보다 높은 서열의 군주를 보고 연민을 느꼈다. 일종의 동병상련이었다.
“뭐 해? 안 들어가고.”
“아…….”
록사자는 에단에게 떠밀리듯 밀려났다. 그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잔뜩 움츠린 채 다가오는 록사자의 어깨에 손을 얹는 로이마르티.
“……다 이해하네.”
“그게 무슨…….”
“아주 꼴값을 떨어요. 그럼 후임 좀 잘 대해 주고. 할 수 있지?”
“그럼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이마르티가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짜식, 좋아하기는.”
에단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후임이 들어오니 활기를 찾은 것 같았다. 의기소침한 모습은 썩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럼 나는 간다. 필요한 거 있으면 로이드한테 말하고.”
“넵! 들어가십쇼!”
로이마르티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록사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로이마르티가 다급하게 록사자의 머리를 꾹 눌렀다.
‘제대로 안 해?’
로이마르티가 사나운 눈초리로 록사자를 노려봤다. 록사자는 당황하면서 에단에게 인사했다.
“조, 조심히 들어가십쇼.”
“……딱히 인사는 안 해도 돼.”
에단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지하실을 나섰다. 저런 것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다.
뭔가 상당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일단 이건 끝냈고.’
이제 정말 회담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에단은 곧장 성의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로이드가 보이지 않는군.’
듣기로는 네빌라의 훈련을 도와주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아 본격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에단은 응접실로 들어섰다.
응접실에는 익숙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카무잔이 다리를 꼰 채 아모드라의 심기를 살살 긁고 있었다. 이제 아모드라는 완전히 체념했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진짜 어이가 없네.’
저 광경은 계속 봐도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괴물들이 저렇게 유치하게 티격태격하다니.
‘휴고랑 가토가 생각난단 말이야.’
에단은 묘한 그리움을 느끼며 과거를 회상했다. 비록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그 유대감은 진짜였다.
‘돌아가야지.’
이제 에단의 고향은 현대가 아닌, 지상이었다. 피식 웃으며 상념을 털어 낸 에단이 아모드라와 카무잔에게 다가갔다.
“또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마침 잘 왔군. 이 녀석 좀 빨리 치우면 안 되나? 정말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는데.”
“그러면 이빨만 털지 말고 그냥 붙자니까? 왜 붙자고만 하면 이를 악물고 무시하는 거지?”
유치찬란한 도발이 이어졌다. 아모드라는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큭큭,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이게 정녕 대군주의 대화란 말인가?
“그만하고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자. 할 말이 있어.”
아모드라와 카무잔이 동시에 에단을 바라봤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두 대군주의 눈길을 받으니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에단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본론을 꺼냈다.
“블란테…… 아니, 페온의 목적이 대충 예상이 되는 것 같아.”
에단은 구체화된 자신의 추측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작전에 앞서 협력자인 아모드라와 카무잔에게는 정확한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카무잔은 이런 얘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아모드라는 진지하게 에단의 말을 경청했다.
자그마치 대군주가 엮인 일이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페온은 나와 같은 인간이야.”
페온의 진짜 목적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었다. 에단은 여태껏 진정한 위협은 지하라고 생각했다.
원작에서 그렇게 묘사되었고, 결과적으로 지상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으니까.
그것은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했다.
지하의 군주는 확실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하위권의 군주조차 드래곤에 준하거나 압도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지상에서는 많은 제약이 따르겠지만, 인간 입장에서 지하의 군주는 매우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지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지하가 지상에 비해 압도적인 저력을 지닌 것은 맞으나, 그것은 상위 군주 이상의 존재에게 해당되었다.
그들은 애초에 지상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관심을 가질 만한 자들은 록사자나 로이마르티 같은 하위 군주였는데, 그들은 감히 빈센트나 첸 같은 자들을 넘어설 수 없었다.
카무잔은 빈센트를 그렇게 평가했다.
― 중위 군주 이상. 상위 군주와도 해볼 만하겠군.
놀라운 평가였다. 고작 백 년도 안 되는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상위 군주에 근접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니.
‘이건 뭐.’
그런 자가 지상을 지킨다면 패널티를 안고 나타난 군주들은 빈센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어째서 지상은 멸망한 것일까.
심지어 원작에서는 ‘강한수’라는 주인공까지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지하의 내려오고 나서는 그 의심이 더욱 심해졌다.
수많은 가정과 추측들이 떠올랐지만,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크리스토와 대화를 하고 나자 에단은 확실히 짚이는 게 있었다.
키워드가 합쳐진다.
지하에서 가지를 꺾어 도망친 페온.
페온의 목적은?
육체를 잃으면서까지 도대체 뭘 시도하려던 거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타이탄.
페온은 타이탄을 좇는다.
이제는 역사에서 잊혀진 고대의 종족을 좇아, 육체까지 포기했다.
‘가능성을 엿봤겠지.’
에단이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에단의 왼손에는 타이탄이 깃들어 있었다.
별다른 기능은 없었지만, 그 유일한 기능이 압도적인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적의 내구력.
에단의 왼손은 카무잔의 공격조차 견뎌 낸다. 군주조차 손가락질 한 번에 소멸시킬 카무잔의 힘조차 타이탄을 넘어서지 못했다.
페온이 좇는 것은 허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광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이 장갑은 페온이 준비해 둔 것이라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겠고.’
페온은 삶을 구걸했다.
죽은 나무의 힘이 있는 이상 숙주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바로 근처에 벨몬트도 있었으니, 문제가 될 소지는 없었다.
하지만 페온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블란테의 혈통.’
페온의 뿌리는 블란테에 있었다. 그리고 블란테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다.
‘신성 왕국이 타이탄의 관한 연구를 하고,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지.’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짜증이 났다. 자신을 향한 짜증이었다.
손바닥 위에서 완전히 놀아났다. 페온은 절묘하고 교묘하게 에단을 이끌었다.
세계수를 통해 그릇을 키우고, 왼손에는 타이탄의 힘이 깃들었다.
경지는 나날이 상승했고, 죽은 나무의 힘으로 죽은 마나조차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릇과 신체 능력은 이미 인간을 아득히 초월했으며, 군주와도 비견할 수 있다.
이보다 좋은 재료가 어디 있는가?
‘블란테의 멸망은 크리스토의 짓이다.’
크리스토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빈센트는 지하보다 더한 위협이었으니.
‘페온이 노리는 건 몸이야.’
베스트는 에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에단이 없었다면 빈센트를 노렸을 것이다.
성공하면 거기서 끝이었다. 지상에는 빈센트에게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렇게 피를 흘려서라도 타이탄이 되고 싶은 건가?’
허상은 아니었다.
에단의 왼손이 타이탄을 증명하고 있으니.
대군조차 압도하는 힘을 얻어서 도대체 무엇을 이루고 싶은 거지?
‘하지만 뭐가 됐든.’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감히 나한테 엿을 먹여?’
에단의 눈이 서늘한 한기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