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화] 진실 (7)
하지만 이 또한 가정이다. 확률이 높은 가정.
에단은 크리스토를 바라보다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지.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 어떤 걸 말하는 거지?
“피차 시간도 없는데 말 돌리지 말고 말하자고. 이대로 여기서 포기하고 다음 회귀를 노릴 건지. 아니면 한번 도박을 해 볼 건지 묻는 거야. 여기까지 찾아온 걸 봐서는 후자를 택할 생각인 거 아닌가?”
― 하하, 꽤나 자신이 넘쳐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난 늘 자신이 넘쳐.”
― 흐음, 지금 여기서 결정을 내리란 소린가?
“어, 그걸 못 하겠으면 여기서 결렬이다.”
― …….
크리스토는 눈매를 좁히며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지금은 선택의 순간이다.
크리스토는 아직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승산은 낮다고 판단했다.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이제 상황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었다.
사나운 태풍을 예측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이제 믿을 건 오직 크리스토의 직감뿐.
‘사실 이미 결정은 내렸지.’
크리스토가 씨익 웃었다.
― 좋아, 협력하겠네. 그럼 이제 우리도 친구인가? 하하.
“오버하지 말고. 시간 아까우니까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할게. 잘 들어.”
코웃음을 친 에단이 페온에 관한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단이 생각하는 가정을 제외한 채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들만 담백하게 설명했다.
하나씩 나오는 키워드들.
크리스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눈매가 좁혀지기도,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눈이 동그래지기도, 인상을 쓰기도, 나중에서는 서늘한 웃음을 걸쳤다.
― 그 말은 전부 사실이겠지?
“아닌 것 같으면 다음 회귀에서는 나부터 죽여.”
― 하하하,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내가 그렇게나 냉혈한처럼 보이나?
“냉혈한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소시오패스처럼 보이기는 해.”
― 소시오패스? 그게 무슨 소리지?
“있어. 내가 있던 세계에서 하는 일종의 칭찬이지.”
― 오, 그런가? 소시오패스…… 기억해 두지.
“그래. 잘 새겨 두라고. 그럼 난 이만 간다. 대충 말은 전해 둬.”
― 벌써 시간이 꽤나 흘렀군. 아, 네가 말한 그 계획은 이쪽에서 어떻게 대응하면 되지?
“네가 연락하는 군주가 누구라고?”
― 록사자. 서열은 꽤나 높을 거야. 하지만 뭐……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응. 그럼 형은 간다.”
뚝.
에단이 마나의 흐름을 헝클어트리자 순식간에 마법이 해제되었다.
“후우.”
에단이 숨을 내뱉었다. 복잡하던 생각들이 정리되며 머리가 개운해졌다.
‘녀석을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단이 크리스토를 떠올렸다. 이제야 그 말도 안 되는 행보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가 룬어를 다룰 수 있는 것도, 그가 해 왔던 준비들도 납득이 된다.
‘단순히 미친 새끼인 줄 알았는데.’
회귀자라.
“큭큭큭. 이거 진짜 막장 소설이잖아?”
에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기가 없지.
* * *
우웅.
마법이 해제되며 통신이 끊겼다.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던 빛들도 사그라들었다.
“성격하고는.”
예상치 못한 수확이 있었다.
에단이 크리스토를 완전히 신용하지 못하듯, 크리스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재미는 있어.’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에단이 보여 왔던 의외성과 과격한 선택들이 떠올랐다.
에단은 예측이 무의미한 자였다.
‘그러니 오히려 신빙성이 느껴진단 말이야.’
완벽한 신뢰란 존재하지 않는다.
배신을 당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신뢰라는 달콤한 말에 빠져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다.
크리스토는 에단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또한 결국 타인이었고, 크리스토는 배신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건 내 선택이다.’
이 선택 또한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토는 이러한 도박이 썩 즐거웠다.
크리스토가 연구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연구실 밖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두 크리스토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거 참…… 시선이 따가운데?”
그중 가장 강렬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으로 크리스토를 노려보던 빈센트가 앞으로 나왔다.
“대화 좀 했으면 하는데.”
“음…… 어려울 건 없지만 지금 제가 좀 바빠서 말이죠. 괜찮다면 추후에 다시 찾아봬도 되겠습니까?”
“…….”
꿈틀.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불편한 심기가 널리 퍼졌다.
“하하, 이것 참 아쉽게 됐군요.”
크리스토가 멋쩍게 웃었다.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과 말투였다.
“……허튼 수작을 부렸다가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빈센트가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구금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곧 전쟁을 시사한다.
명분을 제시한 것은 황제였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빈센트는 불쾌함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크리스트토를 노려봤고, 크리스토는 생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허공이 쩌억 갈라진다. 다시금 마법사들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들은 경악하면서도 그 모습에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뚫어져라 응시했다.
갈라진 공간에 크리스토가 들어섰다. 그러자 갈라졌던 공간이 다시 닫혔다.
그 순간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마법사들이 달려들었다.
“마나 채취해. 흔적 보존하고.”
“방금 그건 순전한 공간 이동 마법이 아니었어.”
“영창도 없이 시전한다고?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괴물 새끼가…….”
마법사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중얼거리며 각자만의 도구를 꺼냈다.
기사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빈센트와 네이드가 서로를 마주 봤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빈센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돌아가지.”
“네, 가주님.”
네이드가 부드럽게 웃었다. 무엇이 되었든 에단이 살아 있는 걸 보았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 * *
목격자가 많아지자 에단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번졌다.
그로 인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가장 먼저 한니발 상회와 정보 길드였다.
한니발은 상인답게 빠르게 변화를 수용했다. 전쟁으로 막대한 이득을 본 그는 순식간에 대륙 곳곳에 지부를 만들었다.
매우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가뜩이나 거상이라고 불리며 많은 부를 지니고 있던 한니발은 이번 일을 통해 어지간한 국가보다도 운용할 수 있는 재산이 많아졌다.
한니발은 돈을 썩혀 두지 않았다. 그는 흐름과 기회를 읽을 수 있는 자였다.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돈이다.’
에단이라는 기연이 없었으면 만지지 못했을 돈이다. 지하라는 허상만을 좇았더라면 결국 그는 파멸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는 객관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이였다.
에단을 통해 뚫기 힘든 걸로 유명한 거래처인 마탑과 마법 명가 아큐르, 그리고 블란테와의 거래를 틀 수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폐쇄적인 집단으로 유명한 정보 길드의 수장과도 에단으로 인해 협력하게 되었다.
자금과 정보가 더해지자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한니발은 정보 길드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대륙 각지에 퍼져 있는 마법 재료들을 모아 판매했다. 이득을 보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에 마진은 최소한으로 남겼다.
이미 돈은 썩을 만큼 있었다. 지금 보는 손해는 어차피 손해가 아니었다.
한니발은 그들의 신뢰를 원했다. 부와 권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적들이 많아진다. 그 예로 벌써 수십 번이 넘는 암살 시도가 들어왔다.
물론 그 시도는 모두 허사가 되었다.
블란테가 직접 기사를 파견해 한니발을 경호하였기 때문이다.
고작 어쌔신 따위가 블란테의 정예 기사를 뚫고 한니발을 암살할 수는 없었다.
한니발은 곧장 정보 길드를 통해 어쌔신들의 본거지와 그들을 사주한 자의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돈을 사용했다.
― 사미라 님, 의뢰가 있습니다.
검은 칼날은 사실상 용병 길드를 흡수한 상태였다. 하지만 용병은 태생이 통제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자들이었다.
사미라는 그들을 억압하지 않았다. 이미 전쟁은 끝났다.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몸집을 불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사미라는 잔류의 의지를 보이는 이들만 남겨 뒀다.
수백이 넘던 용병들은 모두 떠나, 고작 50가량 되는 용병들만 남게 되었다.
그것이 곧 지금의 검은 칼날이다.
하지만 그들의 힘과 명성은 퇴보하지 않았다.
바로 블란테와 한니발 때문이다.
한니발이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고, 블란테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용병들에게 있어 이것은 엄청난 기회이기도 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검술과 마나 수련법만 가지고 싸우던 그들이 블란테에게 기술을 전수받다니.
달콤한 보상이 있는 만큼 그만한 대가도 따랐다.
엄격한 규율.
힘과 장비를 얻는 만큼 그때부터는 자의적인 탈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단장의 말에는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만 했다.
불만을 가진 이는 퇴출.
용병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엄격한 규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잔류를 택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용병 수준을 뛰어넘는 무력을 지니게 되었고, 한니발은 그들을 이용해 적들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블란테를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건 힘들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검은 칼날은 피에 굶주려 있었다.
태생적으로 폭력적이고 잔혹한 성격을 지닌 게 바로 용병이란 족속이다.
혹독한 훈련과 엄격한 질서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 기회가 찾아오자, 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어쌔신 길드와 사주한 세력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몸을 숨긴 자들은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킁킁.
검은 칼날은 수인족도 편견 없이 용병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뛰어난 후각과 감각으로 압도적인 추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러한 상황에 최적화된 종족이라는 소리였다.
결국 한니발의 입지는 나날이 커져 갔다. 더는 그를 견제할 세력도 없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마음 한편에는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에단의 사망을 대비하여 그만한 대비책을 세워 두기는 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지하의 침공이었고, 아직 건재한 황제였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제국은 금세 상처를 회복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게 황제의 막강한 권력 때문이었다.
제국의 그 누구도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했고, 황제는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나마 유일한 대항마라고 할 수 있는 블란테가 대륙 중심으로 진출해 견제하고 있었다.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모습이었지만, 작은 계기나 발단이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그때 에단의 생존 소식이 들려왔다.
‘계획을 수정해야겠어.’
한니발은 대비책을 모두 폐기했다.
이제 결정은 에단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