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화] 진실 (5)
― 이건 또 맞는 부분이 있네?
에단이 코웃음을 치자, 크리스토도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두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그러다가 문득 뚝 하고 웃음소리가 끊겼다.
둘이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 개소리 말고 본론부터.
“나도 그럴 참이었어. 먼저 묻지. 너…… 회귀자인가?”
― 회귀자?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크리스토는 말없이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애매하게 돌리지 말고 솔직히 말했으면 좋겠는데.”
― 뜬금없이 그게 뭔 개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야.
“……그런가?”
크리스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상당히 큰 리스크를 앉고 도박을 던졌다.
이미 지금 상황은 크리스토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이번에도 틀어진다면 여기서 포기하거나 자결할 생각이었다.
― 오, 그러면 너는 회귀자인 모양이지?
“그래.”
크리스토는 순순히 인정했다. 여기까지 와서 애둘러 변명하거나 수습할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크리스토의 담백한 반응에 흥미를 보였다.
― 흐음…… 그렇단 말이지.
“오, 믿는 건가?”
크리스토가 이죽이며 묻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 딱히 믿지 않을 이유는 없지.
크리스토는 베일에 싸여 있던 인물이다. 의심 가는 정황과 떡밥들은 많았지만, 하나같이 확실히 특정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지하에 떨어진 이후, 에단은 많은 생각을 했다.
저지른 실수, 크리스토의 목적과 페온.
처음에는 페온과 크리스토의 연관성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너무 희박했다. 애당초 에단이 크리스토의 계획을 깨부순 적이 너무 많았다.
둘이 진정 모종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번거롭게 그런 짓을 벌일 이유가 없었고, 애초에 에단의 몸에 의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페온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크리스토가 흑막처럼 보이는 연출이 있기는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초중반 진정한 악역으로 군림하던 것은 블란테였다.
그 점도 이상했다.
블란테의 주축들이 나사가 좀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당장 에단 본인만 하더라도 망나니로서 온갖 패악질과 쓰레기 짓들을 일삼고 다녔으니 악명을 떨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그게 대륙 전체가 적대할 수준인가?
에단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블란테의 가훈과 분위기가 괴팍한 것은 사실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무력집단을 껄끄러워하는 분위기도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에단이 겪어 온 가문의 주축 인물들인 빈센트, 첸, 네이드 모두가 순수한 무인에 가까웠다.
지금껏 그들이 권력이나 명예, 정복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의 천성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오만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에단은 단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선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악인과는 더 거리가 멀었다.
대륙의 주적? 악의 씨앗? 원흉?
그렇게 불릴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블란테의 멸망과 몰락.
누군가의 계략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은 많았다.
그 중심에 페온이 있을 수도, 크리스토가 있을 수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가정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에단은 직접 크리스토와 마주한 채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녀석이 솔직하게 나올 확률은 희박했지만, 그럼에도 묻고 싶었다.
대체 목적이 뭐냐고.
하지만 크리스토는 꽤나 순순히 자신의 패를 드러냈다.
‘회귀자라.’
에단조차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그간 보여 온 크리스토의 모습은 단순히 재능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으며, 난폭했다.
아직 권력의 세습도 이루어지지 않은 일개 황자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황자였을 때부터 이미 황제를 뛰어넘는 권력과 영향력을 손에 쥐고는 거침없이 휘둘렀다.
과연 그게 말이 되는 행보인가?
제아무리 황자가 영특하다고 한들, 아직 고작 10대 초반의 나이였다.
반면 황실에 자리 잡고 있는 귀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서 살아남은 노괴들이나 다름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혈통의 정통성밖에 없는 어린 황자가 그들의 심계를 모두 읽고 무릎 꿇릴 수 있을까?
그것 또한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에단은 크리스토에게 무언가가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게 설마 회귀자일 줄이야.’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다.
크리스토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에단을 가늠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에단은 크리스토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순순히 믿었다.
딱히 의심할 이유도 없는 것이, 에단 본인이 책 속에 빙의한 상태이지 않는가?
마나와 마법이 판치는 책 속 세상이다. 인과를 따지면 끝도 없다.
‘막장이긴 하지만.’
이제는 뭐,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다.
“이상하군.”
― 뭐가.
“내 가정이 빗나가서.”
― 가정?
에단이 실소를 흘리자, 크리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네가 거의 회귀자라고 확신을 한 상태였어.”
― 어떤 걸 근거로?
“근거는 너무 많지. 그동안의 삶 속에서 네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거든.”
― 그동안은 어땠지?
“딱히 의식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 그냥 가문만 믿고 설치는 버러지 같은 망나니였지. 금세 죽기도 했고 말이야.”
― 죽은 건 매번 걔한테 죽었나?
“걔라고 하면?”
크리스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표정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이네.’
잠시 고민하던 에단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여기까지 와서 패를 숨길 필요는 없겠지.’
― 강한수, 들어 본 적 있나?
에단이 원작 주인공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크리스토의 사소한 반응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유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강한수?”
하지만 크리스토의 대답은 에단의 예상과 달랐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 ……진심인가?
에단이 굳은 표정으로 묻자 크리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서 내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있나? 이미 내 패를 모두 깠는데.”
― ……하하.
에단이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토가 강한수를 숨기고 있을 확률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
‘그게 아니라면…….’
도시에서 봤었던 테이블의 흠집.
단순한 우연의 일치란 말인가?
에단이 얼굴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자 크리스토가 물어 왔다.
“확인을 시켜 줄 방법은 없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군.”
― ……딱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해 본 소리야. 강한수라…… 특이한 이름이군. 적어도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은 이름이야.”
― 그런데 들은 적이 없다고?
“그래, 확실해. 단 한 번도 없어.”
― 하나 더 묻지. 네가 삶을 거듭해 나갈 때 나는 전부 죽었나?
“네가 죽었냐고? 큭큭, 그게 궁금한가?”
― 궁금하니까 묻겠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죽었지?
“그렇게나 원한다면 알려 줘야지. 너는 대부분 내가 죽였다. 이용해 먹을 만큼 이용한 후에 죽였지.”
― 그래?
크리스토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에단의 반응은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재미없군. 기가 막혀 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는데.”
― 왜? 지금이라도 해 줘?
“필요 없어.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나를 포함에서 어차피 다 죽었으니까. 이유를 알고 있나?”
― 지하의 침공 때문인가?
“……호오, 알고 있군. 신기하단 말이지. 나와 같은 회귀자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걸 알고 있지?”
― 개수작부리지 말고, 말이나 계속하지?
에단의 일침에 어깨를 으쓱거린 크리스토가 말을 이어 나갔다.
“여러 방법을 사용해 봤지만 지하의 습격은 예정된 사실이야. 바꿀 수 없었지. 대륙이 어떻게든 힘을 합친다면 어찌 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다 헛된 가정이지.”
― 본론만.
“성격이 급하군. 뭐, 어떻게든 발악해 봤지만 늘 결과는 똑같았어.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블란테는 단 한 번도 도움이 된 적이 없었어. 오히려 늘 훼방을 놓았지.”
― 훼방을 놓았다고?
“그래, 특히 너의 아버지…… 빈센트는 숫제 괴물이야. 어지간한 방도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괴물.”
―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없나?
“못 할 거야 없지.”
크리스토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해 나갔다.
첫 번째 삶을 살아갈 때 벌어진 지하의 침공.
재앙과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재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블란테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보였다. 대륙 전체가 마족과 군주들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인 상황에서 블란테의 공습은 치명적이었다.
대륙이 한데 힘을 모아도 역부족인 상황이 펼쳐졌다. 특히 빈센트…… 그자의 무력은 그야말로 파멸적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군주를 압도하는 무력.
그가 검을 들고 전장에 나타나면 그곳은 대륙군의 시체로 가득했다.
대륙과 제국은 결국 지하와 블란테에 의해 멸망했고, 크리스토는 과거로 회귀했다.
“돌아오니까 이유가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블란테와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알아 갔지. 도대체 왜? 뭐가 남는다고 온 대륙을 배신한 거지? 막상 또 얘기를 해 보니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어. 의외로 소탈하고, 세속적인 욕망도 보이지 않았지. 그게 모두 연기라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말이야. 큭큭.”
― …….
에단은 가만히 크리스토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지금의 에단에게는 중요한 정보였다.
“정말 뜬금없이, 문득 벌어지는 재난이야. 블란테의 가주가 달라지는 날은.”
빈센트가 대륙을 향해 검을 치켜드는 날은 정말 재앙과도 같았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고, 그 상황에서 지하의 침공까지 벌어졌으니 버틸 재간이 있나.”
크리스토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세 번째가 시작되었어. 내가 가장 먼저 시도한 건 뭐였을까?”
― 블란테를 견제하는 건가?
“틀렸어. 그것도 있지만, 내 힘과 권력을 키우는 거야. 결국 내가 버러지같이 약하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 가장 중요한 건 내 힘이야.”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과 권력이 필요했다. 반복되는 삶에서 경지는 잃을 수 있어도, 깨달음은 잃지 않는다.
“깨달음은 곧 나의 재능이 됐고, 지식은 지름길이 됐지. 다행히 나에게는 할 수 있는 편법이 많았어. 개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신비들도 있었지.”
크리스토가 손가락을 들었다. 입술을 달싹이자 검고 불길한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갔다.
크리스토가 지닌 룬어였다.
“내가 어째서 너를 회귀자라고 의심했는지 아나?”
크리스토가 공허한 눈으로 에단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 힘은 회귀자가 아니면 다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