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진실 (4)
묘한 기류가 깔린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를 살폈다.
빈센트는 물끄러미 카무잔을 바라보고 있었고, 카무잔도 서늘한 미소를 걸친 채 빈센트를 응시했다.
두근두근.
시야가 좁아진다.
귀가 먹먹해지고 들리는 것은 심장 소리뿐이었다. 피가 뜨겁게 달궈지는 것 같았다.
빈센트의 몸은 이미 전투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승산은.’
결과를 단정 짓는 것은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위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
하지만 빈센트는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승산은 없다. 희박한 수준이 아니었다.
붙으면 필패.
백 번을 붙는다면 백 번 모두 패배할 것이다.
꽈악.
빈센트가 주먹을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호흡이 가늘어지며 당장에라도 몸을 부딪치고 시험하고 싶었다.
정점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
광오한 생각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동기부여를 일으킬 경쟁자도, 목표로 삼아야 할 이정표도 없었다.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른 감정.
만족이나 충만함은 없었다. 보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빈센트가 느낀 감정은 허탈감이었다.
이제 어딜 보고 나아가야 하지?
신이라도 쫓아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빈센트는 신을 믿지 않았다.
한 가문의 가주로서, 긴 세월 자취를 감춘 드래곤을 찾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동기도 없었고, 의욕도 없었다.
후대를 양성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전무후무한 경지.
기사들은 빈센트를 우러러 보았다.
빈센트는 전대 가주들조차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많은 자들이 칭송을 보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빈센트는 가주이기 이전에 한 명의 무인이자, 전사였다.
목적의식을 잃은 전사는…… 매우 지루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
불같이 타오르던 의욕과 감정은 시들해졌다.
빈센트는 목적지를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빈센트의 앞에 새로운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빈센트는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카무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어 있는 빈센트와 달리 카무잔은 갸륵하다는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 뭐,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린 에단이 중재에 나섰다.
에단이 나서자 카무잔과 빈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건 지금의 빈센트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빈센트와 카무잔이 있는 공간은 엄연히 분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크흠.”
빈센트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설명을 촉구하는 시선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로이마르티를 바라봤다. 시간의 여유가 있는지를 묻는 의도의 시선이었다.
끄덕끄덕.
로이마르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급하게 준비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그보다 준비를 철저히 해서인지 시간적 여유는 넉넉해 보였다.
―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에단은 지금껏 겪은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지하에 떨어진 이후부터 시작해서, 직후에 어떻게 행동했고, 어떻게 대처했는지.
대군주를 만나게 된 계기와 그 이후 만나게 된 카무잔이라는 존재.
그리고 지금까지의 상황.
무심하고 담백하게 설명한 내용과는 달리,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하나같이 경악스러운 것들 투성이었다.
빈센트를 제외한 그 자리의 있던 모든 인원들이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지금 내가 무슨 얘기를 들은 거지?
애당초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언제나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던 에단이었지만, 지금 들은 것들은 그것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것들이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반박할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들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빈센트가 물었다.
“그래서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에단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 저는 당하고는 못 삽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다.”
빈센트가 작게 웃었다.
아비로서 불안함과 걱정은 들었지만, 그게 에단의 선택이라면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가주님…….”
네이드가 복잡한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그는 당장에라도 에단이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이미 선택을 마친 상태였다. 에단은 아무리 설득한다고 한들 한 번 한 선택을 돌릴 사람이 아니었다.
네이드가 쓰게 웃었다.
과거의 비해서 완전히 달라졌지만, 고집을 피우는 모습은 비슷했다.
“그 대화에 나도 좀 낄 수 있을까?”
그 순간 대뜸 들려오는 목소리.
공간을 비집고, 강렬한 존재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리에 있던 일행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마치 짐승의 아가리처럼 찢어진 허공에서 크리스토가 여유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빈센트와 네이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둘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준비를 마쳤다.
반면 마법에 조예가 있는 자들은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크리스토를 바라봤다.
‘저게 무슨!’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허공에 공간을 열었다.
이질적인 기운.
공간 마법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저렇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공간을 만드는 행위는 게이트 마법 따위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난이도를 자랑한다.
학생들과 크러쉬를 통해 전해 들은 바는 있었지만, 당시에는 무언가 눈속임이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그들이 마법에 관해 자부심과 자존심이 높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실제 크리스토는 등장과 함께 그들의 자존심을 산산이 부서 버렸다.
그는 특유의 권태로우면서도 오만한 시선으로 좌중을 훑었다.
따끔따끔.
빈센트의 살기가 검붉은 형체를 갖췄다. 살기만으로도 사람을 살해할 경지에 올라선 게 빈센트였다.
그는 불쾌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같잖은 수작을 부린다면 당장에라도 크리스토의 목을 벨 작정이었다.
“딱히 싸우려고 온 거는 아닌데, 환대가 참 격하군.”
크리스토는 양손을 들며 의사를 밝혔다.
물론 듣는 이들에게는 기가 찰만한 소리였지만.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살기가 더욱 거세졌다.
“하아.”
크리스토가 고개를 저으며 살기에 저항했다. 지금 이곳은 그에게 있어 사지이자, 적지였다.
빈센트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얕잡아 볼 수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하나씩 따지자면 크리스토가 제압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정말 싸우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토의 의도는 정말 순수했다.
“매도를 당하니 속이 쓰리는걸.”
그런 것치고는 특유의 건방진 미소는 그대로였다.
인내심이 바닥난 빈센트가 검을 뽑아 들려던 그때.
― 아, 잠깐만.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 대화쯤은 할 수 있잖아?
일행들 모두가 기막힌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의 표정은 진지했다.
에단은 지하에 떨어진 이후부터 크리스토와 대화를 한번 나눠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의문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추측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의문들이었다.
“오, 역시 말이 통하는군.”
짝짝짝.
크리스토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에단이 표정을 구겼다.
― 넌 그 엿 같은 말투부터 고쳐야 돼. 이 씹새끼야.
“하하하! 성격은 여전하군. 참고하지. 제국의 황제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가 유일할 거야. 그건 그렇고…….”
크리스토의 시선이 카무잔에게로 향했다. 카무잔을 보는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
크리스토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보는 순간 카무잔의 힘을 가늠할 수 있었고, 그가 군주를 뛰어넘는 대군주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대한 분을 뵙습니다.”
크리스토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러자 카무잔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 확실히 좀 좆 같긴 하네.
― 그치?
에단과 카무잔은 죽이 잘 맞았다.
고개를 든 크리스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과 카무잔을 바라봤다.
‘진짜 놀랍군.’
대군주와의 접촉은 크리스토도 수없이 시도해 왔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여겨져 포기했었는데, 죽은 줄 알았던 에단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심지어 말까지 놓고는 마치 친구처럼 대하고 있었다.
크리스토는 에단에게 기막힘과 경외를 동시에 느꼈다.
‘엄청나군.’
직접 대면하는 것도 아닌, 간접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이는 것 같았다.
― 잠깐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나?
에단이 부탁했다. 다른 이들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도, 도련님, 그건…….”
― 비켜 줘.
에단이 다시 한번 강경하게 말했다.
빈센트는 가만히 에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은 있는 건가?”
― 그럼요.
“그래…… 그럼 믿고 있으마.”
― 믿으셔도 됩니다.
에단은 호쾌하게 대답했고, 빈센트가 방을 나섰다.
다른 이들은 불안해했지만 어쩔 수 없이 빈센트를 따라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술식의 유지를 위해서는…….”
“아, 그건 내가 대신하지.”
스스스.
크리스토가 아무렇지 않게 마법의 통제를 넘겨받았다. 오르번의 눈이 커졌다.
“너…… 대체 정체가 뭐지?”
“음, 설명하자면 길고, 일단은 자리를 좀 비켜 줄 수 있을까?”
“……쯧.”
오르번이 마지막으로 방을 나섰다. 마법 너머로 보이는 에단은 카무잔을 향해 부탁했다.
― 잠깐이면 되니까 좀 비켜 줄 수 있나?
― 안 될 건 없지.
카무잔은 흔쾌하게 에단의 부탁을 들어줬다. 카무잔이 자리를 뜨자, 에단이 묘한 표정으로 쭈그리고 있는 로이마르티를 바라봤다.
― 자, 잠시만요…… 대충 조치만 취해 두고 금방 비키겠습니다. 헤헤…….
로이마르티가 후다닥 자리를 옮기자 그곳에는 에단과 크리스토 둘만 남게 되었다.
“시기가 적절했네. 딱 이렇게 얼굴도 볼 수 있고.”
― 이빨 그만 털고. 아까도 말했지만 넌 그게 문제라니까?
“하하. 너무하는군. 이렇게 보여도 꽤나 상처를 받는데 말이야.”
― 지하에 떨어트린 새끼가 말이 많아.
“그건 참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목 바로 앞까지 칼이 들어오면 저항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좋게 생각하자고.”
― 사람? 네가?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크리스토를 바라봤다. 크리스토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은 이질적인 웃음이었다.
크리스토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한기를 띠고 있는 푸른 동공은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에단의 동공도 크리스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내가 사람 같지가 않나?”
― 어.
단호한 대답에 크리스토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너는 참 특별한 존재야. 나는 어지간한 일로는 이렇게 웃지를 않거든. 큭큭큭. 그런데 그거 아나?”
에단을 바라보는 크리스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도 자네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