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화] 진실 (2)
에단과 아모드라, 카무잔이 한자리에 모였다.
카무잔은 싱글거리며 미소짓고 있었고, 아모드라는 피로의 찌든 퀭한 얼굴로 에단과 카무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그냥 기분이 좀 좋은데?”
“…….”
순간 목구멍까지 욕설이 치밀었지만 아모드라는 차오른 욕설을 억누르며 말했다.
“슬슬 반응을 보이고 있어.”
“녀석인 눈치를 챈 건가?”
“그래. 놈들도 귀와 눈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오, 그럼 전쟁인가?”
“…….”
아모드라가 눈매를 좁히며 카무잔을 바라봤다. 전쟁이라는 소리에 카무잔은 매우 즐거워했다.
“……지금은 아니야. 곧 정기적인 회담도 다가오니 아마 그 시기를 노리겠지.”
“계획은 있나?”
에단이 물었다. 에단은 계획이나 작전 같은 것은 모두 아모드라에게 맡겼다.
지하에 관해서는 그게 맞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래. 우리도 회담에 맞춰서 대비한다.”
“호오, 회담 때는 싸워서는 안 되는 것 아니었나?”
“지금 그 규칙을 부수려고 하는 거다.”
그것이 두려웠다면 애당초 시작조차 안 했을 것이다.
“그것에 관해서는 나도 좀 듣고 싶은데.”
에단이 그 말에 관심을 보였다.
이들과 지낸 지 벌써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나름 즐거우면서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함께 지내면서 더욱 깨달은 사실은.
대군주의 저력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대군주가 신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추앙을 받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강해졌어.’
에단이 자신의 상처 없이 깨끗한 손을 바라봤다. 모두 포션 덕이었다.
에단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죽은 나무의 힘으로 끊임없이 마나를 흡수하며 그릇을 키워 나갔고, 카무잔과의 목숨을 건 혈투로 기술과 감각도 향상되었다.
에단은 이제 완숙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네이드와 첸도 이제는 에단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모르겠고.’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빈센트를 만나도 압도되는 감각은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 진짜 괴물을 만나게 되었으니.
에단이 시선을 돌려 카무잔과 아모드라를 바라봤다.
‘가망이 보이지 않네.’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싸웠지만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카무잔이 조금만 진심을 내비춰도 에단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마치 한낱 인간이 자연재해를 상대로 발버둥을 치는 것 같았다.
‘그 새끼는 거기까지 올라갔단 말이지?’
에단이 페온을 떠올렸다. 과거 페온과 싸울 때 에단은 호각을 이루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에단은 여전히 한낱 인간이었고, 페온은 아모드라와 카무잔과 같은 대군주의 자리에 올라섰다.
‘이 둘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해야겠지.’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에단에게 가망이 없었다.
‘이 이상 몸을 갈아 넣어 봤자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
가파르던 에단의 성장은 정체되어 가고 있었다. 에단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고, 카무잔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시도하고 싶은 게 있었다.
에단이 아모드라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 아모드라가 입을 열었다.
“뭐가 듣고 싶지?”
“감히 대군주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이 무언가 해서. 내 예상이 맞다면…… 죽은 나무이겠지?”
아모드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숨길 이유는 없겠지. 그래, 그 말대로 우리가 회담에서 숭고하고 고결한 척하는 이유는 죽은 나무 때문이다.”
“죽은 나무한테 그 정도의 힘이 있다고?”
“그게 지하의 ‘규칙’이자 ‘법칙’이기 때문이다. 우린 그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우리라면…… 페온의 기원도 나와는 다르지 않을 텐데. 괜찮은 건가?”
“글쎄……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대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상 쉽게 벗어날 수는 없을 거다.”
“나는 상관없고?”
“아마도. 죽은 나무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
에단이 웃었다.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빨리 다가왔다.
“네가 목에 두르고 있는 그건 증표이자, 곧 열쇠다.”
에단이 빛바랜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에단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던 마나가 저 밑에 잠겨 있었다.
오히려 짓눌려 있던 죽은 마나가 세력을 키워 대부분의 그릇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죽겠는데.’
아모드라는 지금 에단에게 죽은 나무의 힘을 흡수하라 말하고 있었다.
과거 세계수의 힘을 흡수할 때도 에단은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 힘은 한낱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상관없나?”
에단이 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죽은 나무는 이들에게 있어 상당히 신성시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을 외부인에게…….
“무슨 상관이지?”
아모드라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네가 지상에서 비슷한 행위를 벌였을 때 큰일이 일어났던가?”
“그러진…… 않았지.”
“그래. 죽은 나무가 한 축일 수는 있어도 시작이자 전부는 아니야. 만일 그랬다면 너에게 감당하라고 말하지도 않았어.”
에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어. 그럼 우리는 회담 때를 기다리면 되는 건가?”
“그래. 이제는 제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내 저택 좀 그만 부수고 말이야.”
아모드라의 말에 카무잔이 퉁명스런 말투로 끼어들었다.
“말이 이상하군. 네가 대비를 미흡하게 해서 생긴 일 아닌가?”
“……하하.”
아모드라가 실소를 터트리며 카무잔을 바라봤다.
* * *
“카무잔과 아모드라가 손을 잡았다더군요. 들으셨습니까.”
아리오나가 페온에게 다가왔다. 페온은 감았던 눈을 뜨며 아리오나를 응시했다.
“그래.”
카무잔이 움직였다.
투쟁만을 좇던 고독한 늑대가 아모드라와 손을 잡았다.
정황일 뿐이지만, 소식이 귀에 들어온 이상 준비와 대비를 해야만 했다.
‘상관없어.’
페온이 원하는 것은 알량한 권력 따위가 아니었다.
권력에 욕심은 없었다.
그딴 건 실체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갈증이 느껴졌다. 과거부터 느끼던, 불쾌하고 찝찝한 갈증이었다.
페온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아리오나를 응시했다.
아리오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페온을 바라봤다.
‘역겨운 년.’
구역질이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저 가면을 부수고 싶었다.
마치 성녀라도 된 것처럼 짓는 저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
페온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 둘은 목적을 위해 손을 맞잡았을 뿐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달라지는 건 없어. 전과 같이 회담을 준비한다. 열쇠는 찾았나?”
“아직입니다. 이 이상 움직이면 다른 대군주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는 상황이라서 말이죠. 지금 괜히 명분을 주기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다른 준비는 잘되어 가나?”
“네. 아마 문제는 없을 겁니다.”
“확실한가?”
페온이 아리오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확실합니다.”
“그래.”
페온은 더 이상 아리오나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리오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열쇠 따위는 없어도 된다.’
‘그것’이 곧 열쇠이기도 했으니까.
그날이 점차 다가온다. 계획은 조금 틀어졌지만 문제는 없었다.
페온은 다시 천천히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들었다.
* * *
훌쩍훌쩍.
로이마르티가 훌쩍이면서 권능을 발현시켰다.
재료는 충분했다. 지금은 이런 취급을 당하는 신세지만, 그 또한 엄연히 군주였다.
정보와 지식도 부족하지 않으니, 마법을 준비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서러움 때문이다.
자신의 영지. 자신의 저택.
거기서 끌려 나와 이런 지하 골방에 갇히게 된 신세.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훌쩍훌쩍.
주기적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서러움이 북받친다.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준비는 거의 끝났고, 이제 지하에서 떠날 일만 남은 상태였다.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보였는데, 그 미래가 순식간에 어둠에 삼켜지고 말았다.
로이마르티는 쓸쓸하게 작업을 이어 나갔다. 억울함과 원망이 치솟았지만 푸념을 토로할 곳도 없었다.
지하는 그런 곳이다.
힘이 없으면 서러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작업의 진척은 빨랐다.
이제 주기적으로 지상과 통신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마법진을 모두 그린 로이마르티는 방구석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뒤, 훌쩍거리던 찰나.
쾅!
격렬한 소리와 함께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카무잔과 에단이 찾아온 것이다.
“히, 히익!”
로이마르티가 경기를 일으키며 둘을 바라봤다. 에단과 카무잔의 눈매가 좁혀졌다.
“표정이 왜 그러냐?”
“아, 아닙니다…….”
로이마르티는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에단은 괜찮지만 카무잔과는 눈만 마주쳐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스읍, 후우.’
로이마르티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에단과 카무잔을 바라봤다.
“무,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왜? 오면 안 돼?”
“그, 그럴 리가요…… 하하하…….”
나쁜 새끼들…….
도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로이마르티는 서러움에 다시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차마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에단과 카무잔은 그걸로도 트집을 잡을 인물들이었다.
로이마르티가 눈물을 삼키며 시선을 피하고 있을 때, 에단은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별로 긴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지하실이 완전히 달라졌다.
‘저래 보여도 군주는 군주라는 건가.’
에단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로이마르티를 바라봤다.
“고생했네?”
“……!”
로이마르티가 감동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 절절한 표정에 에단은 조금 부담을 느꼈다.
‘……왜 저래?’
내가 뭐 실수했나?
너무 부담스러운 시선에 에단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 알아주시는군요…….”
감격으로 인해 떨리는 로이마르티의 목소리.
“아니, 뭐……. 딱 봐도 고생한 것 같길래…….”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하는 카무잔.
그 말을 듣자마자 풀이 죽는 로이마르티의 표정.
‘진짜 뭔 애도 아니고.’
에단은 황당함을 삼키며 카무잔에게 말했다.
“딱 봐도 고생한 티가 나는데 뭘.”
다시금 밝아지는 로이마르티.
부담스러움을 느낀 에단이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이 되지는 않았는데 연결이 가능해?”
“네, 넵! 그때와는 달리 준비를 제대로 해서 문제없이 연결될 겁니다. 원하신다면 저쪽에서의 소환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 그래? 대단한걸.”
“하핫.”
로이마르티가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게 맞나?’
에단은 칭찬 한번 들었다고 민망해하는 로이마르티를 보며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군주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