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화] 진실 (1)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만.”
― …….
크리스토와 대화하는 군주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천천히 설명했다.
“감사드립니다. 답례로 다음 인사 때는 섭섭지 않은 공양과 함께하도록 하죠.”
― 그건 당연…….
뚝.
크리스토가 연결을 해제하고 몸을 돌렸다.
경멸 어린 눈초리로 그곳을 슬며시 흘겨본 크리스토가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버러지 같은 새끼가.’
알량한 힘을 믿고 설치는 꼴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본래라면 상종도 안 할 녀석이었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블란테와 대군주.’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에단은 살아 있고…… 블란테라는 이름을 지닌 대군주라.’
이것들이 과연 우연일까?
“병신도 아니고.”
큭큭.
크리스토가 실소를 터트렸다.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상관관계가 있다. 그것도 아주 깊은 상관관계가.
‘녀석이 대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리는 없고.’
크리스토는 생각을 정리했다.
재능있는 이는 수없이 만나 왔다. 개중에 천재라는 족속들도 보잘것없는 시시한 놈들뿐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좀 달랐다.
‘어째서 이번에만 그런 변화가 생긴 걸까.’
이질적이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던가.’
아니면 녀석이 나와 같은 동류거나.
[부정]
크리스토가 룬어를 읊었다.
사특한 언어가 크리스트토의 손 위에 피어오른다.
일렁이는 검은 기운.
크리스토가 주먹을 움켜쥐자, 룬어가 바스라진다.
‘두 개나 지니고 있다라.’
큭큭.
크리스토가 웃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룬어는 이것 하나.
여러 회차를 거듭하면서 알아낸 사실 중 하나는.
‘룬어’를 다룰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드래곤’조차 오염된 룬어를 다루지는 못한다.
다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과를 벗어난 자.
인과율의 운명에서 탈출한 자인 자신뿐.
“하하하.”
크리스토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공허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한번 만나봐야겠군.’
이번에는 좀 진솔한 대화를 나눌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어두운 알현실에서 크리스토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쾅!
우우웅―!
지하실의 마법진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적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지하실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커헉!”
벽을 뚫고 사정없이 곤두박질쳐진 에단이 피를 토했다. 에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포션을 쥐었다.
벌컥벌컥.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억누르고 삼켜야만 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내장이 진탕된 것인지 가슴 아래쪽부터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포션을 들이켜자 상처가 순식간에 수복된다. 마치 시간을 돌리는 것 같았다.
으…….
조금 비위 상하는 광경에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에단이 고개를 드니, 입꼬리를 올린 채 다가오는 카무잔이 있었다.
“성공이군.”
뿌듯한 목소리.
에단은 구멍 난 벽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옘병할.”
“하하하! 나는 믿고 있었어.”
“뭘 믿어. 내가 안 뒤질걸?”
“그럼.”
고개를 끄덕이는 카무잔.
에단은 기가 막혔다. 조금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나 방금은 진짜 위험했다.
세상이 핑핑 도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감각까지 느끼지 못할 줄이야.
“하지만 뭐…….”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벽을 보니까 만족스러웠다.
아무리 철저한 대비를 했다고 한들 우리를 얕보면 안 되지.
에단과 카무잔이 씨익 웃고 있을 때.
지하실을 내려오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게 무슨 소란입…….”
지하실로 내려온 로이드가 우두커니 서서 커다란 구멍을 바라봤다. 로이드가 침묵했다.
그는 초점 잃는 동공으로 에단과 카무잔을 번갈아 바라봤다.
해명을 원하는 눈초리.
로이드의 눈빛에서는 억울함과 황당함, 그리고 얕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기껏 수복하고 마법진까지 가득 깔아 뒀건만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하지만 에단과 카무잔은 사과하기는커녕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히 가슴을 내밀었다.
뿌듯함과 만족스러움이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하…….”
로이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평생 동안 별로 느껴본 적 없는 두통을 최근 들어 느끼고 있었다.
“…….”
로이드가 카무잔을 바라봤다.
카무잔은 뻔뻔하게도 눈을 부라리며 로이드를 바라봤다.
뭐 어쩌라고.
꼬우면 덤비든가.
눈빛만 봐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느껴졌다.
로이드가 고개를 떨궜다.
그는 최상위권 서열에 있는 군주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은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카무잔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대군주가 왜 대군주겠는가.
특히 카무잔의 무력은 대군주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 어떤 배후나 비호 세력 없이 홀로 대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
이후의 행보도 파격적이었다.
영지의 안정화나 수하를 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럼에도 추종 세력은 적지 않았다.
카무잔은 그들의 이름조차 외우지 않았지만, 카무잔의 수하들은 그의 말 한마디면 장렬히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
‘정신 나간 놈들.’
로이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는 위대한 밤의 일족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하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꼬우면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무잔은 너무 강했고, 로이드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로이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벌써 빈 포션병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절반 넘게 소비한 것이다.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소름이 끼쳤다.
사용한 포션만큼이나 사선을 넘었다는 소리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에단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것은 군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살아가면서 그만한 힘을 얻었을 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안주함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군주급으로 올라가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단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걸 잃는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 대군주를 상대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광기였다.
치솟는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 같은 짓이었다.
로이드는 에단과 카무잔의 광기를 보고 섬뜩함을 느꼈다.
‘이제는…… 나도 장담치 못하겠군.’
로이드 정도 되는 경지에 오르면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의 경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에단은…… 이미 어지간한 군주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면 보수를 진행하겠습니다.”
“하하하! 이번에는 좀 더 튼튼하게 해 보라고!”
“…….”
로이드가 입을 다물었다.
* * *
에단과 카무잔은 지하실 위로 올라갔다. 에단은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옷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매번 옷을 챙겨 입는 것도 일이군.’
어차피 카무잔과의 대련 한 번이면 깔끔하게 찢겨 나갈 옷이었다. 계속해서 새 옷을 입는 것도 상당한 낭비처럼 느껴졌다.
‘다음부터는 나체로 하던가 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아모드라가 있는 장소까지 도착했다.
그는 나체가 된 에단을 보며 사정없이 표정을 구겼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아, 그런 일이 좀 있어서.”
“역겨우니까 당장 가려라.”
아모드라는 진지하게 경멸을 드러냈다. 에단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고 하반신을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호들갑 떨기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뭔 놈의 인내심? 호들갑 떠는 거 맞구만. 사내새끼가 옷 좀 깜빡할 수 있지. 왜 지랄이야?”
카무잔이 합세하자 아모드라는 치미는 두통을 견디지 못하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대화를 이어 나가면 이어 나갈수록 자신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현기증까지 느껴졌다.
“……방금 보니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던데. 별일은 없었나?”
“별일은 없고. 구멍 하나 시원하게 뚫어 놨어.”
“어딜 말하는 거지? 설마…….”
카무잔은 대답 대신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아모드라의 표정에 커다란 금이 그어졌다.
“진짜 정신 나간 새끼들…….”
아모드라가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놈들과 손을 잡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회의감과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아모드라는 착잡한 표정으로 에단과 카무잔을 보며 말했다.
“……일단 옷부터 입고 와라.”
피로에 찌든, 힘없는 목소리였다.
* * *
“귀찮네.”
에단은 복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아모드라의 성은 쓸데없이 넓었다. 권위와 허세에 찌든 녀석다웠다.
에단의 객실로 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로이드가 있었다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수리 때문에 지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에단이 나체로 복도를 활보하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네빌라였다.
“…….”
그녀는 에단을 위아래로 훑었다. 에단은 딱히 몸을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손을 들으며 인사했다.
“오∼ 오랜만이네?”
“……지금 그 꼬라지는 대체 내가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 거지?”
그녀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에단은 고개를 슬쩍 내려 하반신을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 입고 있던 옷이 죄다 찢겨서 다시 챙기려고. 다음부터는 여분을 준비해 두든지 해야지 원…….”
“……허.”
네빌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다가 기껏 마주쳤더니 저런 꼬라지를 하고 있었다.
‘저 정도는 되어야만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건가.’
쓰게 웃은 네빌라가 입고 있던 옷자락을 조금 뜯어 에단에게 건넸다.
“일단 이걸로 좀 가리지?”
“왜?”
에단이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눈매를 좁혔다.
“……너는 정말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없는 건가?”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보다 너무 작은데?”
“…….”
그녀는 시선이 내려가려는 것을 참고 표정을 찌푸렸다.
“그럼 빨리 옷이나 갈아입고 와. 할 얘기가 있으니.”
에단이 네빌라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 * *
에단이 방에서 옷을 챙겨 입고 돌아왔다. 네빌라는 같은 장소에서 가만히 선 채 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 얘기가 뭔데?”
“……너는 목표가 뭐지?”
“목표? 대뜸 묻는 게 그거야?”
에단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말 돌리지 말고.”
네빌라의 진지한 표정을 본 에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시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새로 대군주가 된 녀석. 나랑 안면이 있거든?”
“……그런데?”
“얼굴 한번 시원하게 후려갈기려고.”
“……그게 진짜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건가?”
“어.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네빌라의 눈을 응시하는 에단의 동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