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1화] 조우 (4)
제국의 황제 크리스토가 아카데미에 갑작스럽게 방문했다. 공식적인 예고 없는 방문이었다.
“가주를 만나고 싶은데.”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시는군요.”
“제가 그렇게까지 구닥다리는 아니라서요.”
네이드가 미간을 좁히자 크리스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황제를 가만히 세워 두는 것도 상당히 무례한 짓 아닙니까? 조금 기분이 불쾌해지려고 하는데. 그래도 명색이 화친을 맺은 관계인데 말이죠.”
“…….”
네이드는 차게 식은 동공으로 가만히 응시하다가, 크리스토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기다리고 계시면 가주님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제가 참을성이 좀 없어서요. 아, 그리고 기왕이면 차 좀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준비해 드리죠.”
쾅.
응접실의 문이 다소 강하가 닫쳤다.
감정이 느껴질 정도로.
크리스토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얼마간 기다리자, 빈센트가 응접실을 찾아왔다.
“…….”
깊고 고요한 동공이 크리스토를 위아래로 훑는다.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크리스토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응접실에 서늘한 분위기가 내리깔렸다. 빈센트는 기세나 살기를 표출하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빈센트가 자리에 앉았다. 크리스토와 빈센트가 서로를 응시했다.
‘맹수를 보는 것 같군.’
빈센트를 보고 있자면 마치 거대한 맹수를 앞에 있는 것 같았다. 빈센트는 한참동안 말없이 크리스토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찾아왔지?”
날이 서 있는 목소리와 평대.
하지만 크리스토는 불쾌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 말이죠.”
“내가 어째서 너와 대화를 나눠야 하지?”
빈센트는 경멸을 드러내며 크리스토를 응시했다.
“너무 까칠하게 구는 것 아닙니까? 저도 사람인지라 상처라는 걸 좀 받는데.”
크리스토가 능글맞은 어조로 말했다. 빈센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상처? 네가?”
빈센트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용건을 말해.”
“흠, 어쩔 수 없죠 뭐. 제안을 하나 하려고 왔습니다.”
크리스토는 네이드가 내온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에단이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무례하군.”
“제가 좀 도와줄 수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살아 있을 확률은 적겠지만…… 뭐, 확인 정도는…….”
“……큭큭.”
빈센트가 소리 내어 웃었다. 크리스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는 빈센트를 바라봤다.
“뭐가 웃깁니까?”
“우습지 않을 리가. 내 아들은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크리스토가 눈을 끔뻑이며 가만히 빈센트를 바라봤다. 말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진짜군.’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크리스토가 턱을 매만졌다. 협상 카드 하나가 날아갔다.
‘지하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지하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지하의 대기는 인간에게는 극독이나 다름없다.
더불어 지하에 도사리는 사나운 마수들과 마족, 그리고 군주들 사이에서 한낱 인간은 벌레와도 같은 존재다.
‘뭐, 근데.’
녀석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묘하게 기쁘기도 했다.
‘흠, 어떻게 할까.’
크리스토는 계획을 살짝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오, 그것 참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그럼 이제 우리 사이의 감정의 골도 사라지는 겁니까?”
“…….”
빈센트의 눈매가 좁혀졌다.
유형화된 살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포악한 살기가 응접실을 집어삼키고, 크리스토를 옥죄기 시작했다.
“아, 이건 좀 그랬나.”
크리스토가 피식 웃으며 살기에 저항했다. 크리스토는 큰 무리 없이 빈센트의 살기를 밀어냈다.
빈센트의 뺨이 꿈틀거렸다. 그가 살기를 더욱 끌어내려고 하자 크리스토가 손을 들었다.
“이 정도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나쁜 의도는 없었거든요.”
“…….”
빠득.
이를 간 빈센트가 살기를 거뒀다. 응접실을 채운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흐음, 역시 다른 사람 같단 말이지. 슬슬 바뀔 때가 됐는데.’
크리스토는 회귀를 반복하면서 매번 블란테를 무너트렸다.
이유는 하나였다.
블란테가 위협적이었으니까.
특히 빈센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했다. 불합리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에는 변수가 너무 많군.’
가장 먼저 블란테의 둘째 망나니가 완전히 달라지고, 엄청난 영향력을 얻었다.
크리스토의 수족을 하나씩 잘라 가며 아카데미를 손에 넣었다. 그 과정은 과격하고 급진적이었지만, 결국에는 아카데미를 집어삼켰다.
꽤나 난처한 상황이었다.
블란테가 급격하게 세를 불리고 대륙의 중심부를 차지한 것이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말이지.’
손해는 컸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신성 왕국까지 무너트릴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 과정에서 대항마로 키우던 카이제르까지 잃었다.
‘무력이 아닌, 명분용이었는데.’
어찌되었건 뼈아픈 손해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걸 또 빼았겼단 말이지.’
예상치 못한 자가 등장했다. 이번 회차는 변수가 너무 많았고, 하나 같이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언가가 달라진 것인가.’
크리스토가 턱을 매만졌다. 과연 어떻게 대처하는 게 맞는 것일까.
‘이렇게 된 이상.’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어차피 에단의 생존이 확인된 순간. 기존의 방식으로는 답이 없었다.
‘블란테는 남겨 두고.’
리스크는 감수하기로 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빈센트의 행보는 정상적이었으니.
‘달라진 계기가 무엇일까.’
블란테를 가만히 놔두면 반드시 사건이 터졌다. 마치 갑작스럽게 광증이 도진 것처럼 온 대륙을 불사르고 지하의 문을 연다.
그 과정에서 대륙은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크리스토 입장에서 블란테는 가만히 놔둘 수 없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에단이 달라진 이후, 모든 행보가 바뀌었다. 사실상 지금 블란테를 제압하거나 무너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도 없고.’
크리스토가 고개를 저었다. 저 괴물을 죽일 자신이 없었다.
‘나도 도박을 할 수밖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그렇다고 포기해 버리기에는 아쉬웠다.
‘적어도 진상은 파악해야지.’
이대로 끝내기에는 억울하지 않은가.
“사과와 화해의 의미로 지하에서 에단을 구출하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쪽 지식은 조금 해박하니까요.”
“큭큭…… 내가 어디까지 인내를 해 줘야 하는 거지?”
“음, 진심을 매도당하는 기분은 참 서글프군요.”
빈센트와 크리스토의 눈이 마주쳤다. 크리스토는 빈센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꺼져라.”
“뭐…… 여기서 물러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저는 딱히 블란테를 적대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이건 진심이었다. 빈센트는 크리스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요한 눈으로 응시했다.
작게 웃은 크리스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제국의 황제가 기사는커녕 수행원 하나 동반하지 않고, 아카데미를 찾아왔다. 이가 시사하는 의미는 상당했다.
크리스토는 얼굴을 가리지도,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당당히 아카데미를 나서며 마법을 시전했다.
우웅.
마법이 시전되며 허공이 갈라진다.
학생들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국의 황제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심지어 마법의 구현조차 매우 간결하고 빨랐으며, 난이도도 매우 높은 공간 이동 마법이었다.
마법을 수행하는 학생들의 입이 벌어졌다. 크리스토는 씨익 웃으며 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포탈 안으로 들어섰다.
* * *
크리스토는 제국으로 복귀했다.
아무도 없는 알현실의 옥좌에 앉아 턱을 괬다.
‘흐음.’
빈센트는 지하에 떨어진 에단이 살아 있다고 말했다.
거짓말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딱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 말은 사실일 테고.’
큭큭큭.
인간이 어떻게 지하에서 살아 있을 수가 있는 거지?
놀라운 일이다.
크리스토는 지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토는 누구보다도 지하를 혐오했지만, 깊게 파고든 자이기도 했다.
대규모의 사령술과 지하의 문을 여는 행위는 바탕이 되는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였다.
‘찾아봐야겠는데.’
이쪽에서도 확실한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크리스트토가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황실의 지하실.
누구의 출입도 불허하는 엄격한 보안이 걸려 있는 지하실이었다.
그곳은 오직 크리스토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는 온갖 기하학적인 마법진들이 가득했다. 모두 사특하고 사이한 흑마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역겹고 잔혹한 재료들도 여럿 있었다. 크리스토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나를 일으켰다.
우웅.
크리스토가 쥐고 있던 마석이 진동하며 요사스러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크리스토는 죽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기에 조금 번거롭지만 이런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중얼중얼.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이고 음험한 언어.
크리스토가 낭송을 끝내자 지하실의 모든 마법진이 빛을 뿜어낸다.
― ……무슨 일이지?
마법은 성공적이었다.
크리스토는 군주와의 연락에 성공했다. 크리스토가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군주 중 하나였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 …….
군주는 침묵했다. 불쾌한 심경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역겨운 새끼.’
크리스토는 경멸과 역겨움, 혐오 따위의 감정이 치밀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마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 것 같았다. 하지만 얼굴에 가면을 쓴 채 싱글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었다.
군주는 권위적이고 광오한 존재였다.
인간을 미물이나 벌레쯤으로 여기는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우가 필요했다.
― ……탐탁치는 않지만, 용서해 주지.
“넓은 아량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크리스토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최근 지하의 동향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 ……심상치 않다. 대군주가 바뀐 후 여러 소문이 나돌고 있다.
“예를 들면요?”
― 대군주가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다.
“호오…… 새롭게 대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에 대해서도 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 …….
군주가 침묵하자 크리스토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다음 공양은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하겠습니다.”
― ……크게 알려진 것은 없다. 남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군주들의 성향 탓도 있겠지만…… 새롭게 대군주가 된 자가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는 게 가장 크지. 사실 꽤나 놀라운 일이야. 군주도 아닌 이가 갑작스레 대군주의 자리를 꿰찼으니. 대군주의 이름이 아마…… 블란테라고 했었지?
“호오…….”
크리스토의 눈이 커졌다.
그렇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