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화] 조우 (3)
에단이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탄성 있고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근육이 깨어나며 피가 달아오른다. 딱 기분 좋은 정도였다. 에단의 몸은 이미 전투 준비를 끝냈다.
두근두근.
심장박동 소리가 고막을 마구 때렸다.
동공이 작아지며 시야가 좁아진다. 호흡이 가늘고 길어진다. 춥지도 않았지만 입에서 김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진정해.’
본능은 중요한 감각이었지만, 에단은 몸의 통제권까지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내 몸을 움직이는 건 나 자신이다.
에단은 물끄러미 카무잔을 응시했다. 카무잔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광오하다.
표정과 태도가 말해 주고 있었다. 카무잔은 여유로웠다.
‘뭐 당연한 거지.’
지금의 에단은 약자였기에 주도권은 카무잔에게 있었다.
에단은 도전자의 입장.
‘이런 기분이었나.’
입장이 바뀌었다.
에단은 늘 강자의 입장에 있었다. 도전자 입장에서 타이틀전을 치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에단은 단 한 번도 위기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늘 웃는 낯으로 상대를 때려눕혀 왔다.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달라졌다. 에단의 목적은 조금이라도 카무잔의 진심을 끌어내는 것이다.
즐거웠다.
에단은 늘 도전자가 되기를 갈구해 왔다.
에단의 움직임은 탄력적이었다.
슬그머니 눈을 감으니 시야가 가려졌다. 머릿속에서 카무잔의 움직임이 구현된다.
빠르고 패도적이다.
야성적이며, 포악하고, 교활하기까지 하다.
카무잔은 이상적인 전사였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으로 한 번 본 기술은 그 자리에서 구현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 속임수나 페이크도 귀신같이 분별해 낸다. 잔영이나 환영 따위의 저열한 짓도 의미 없을 터.
‘이거야 원.’
불합리하다고까지 느껴졌다.
류태신과 싸워 온 상대들이 줄줄이 은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도 지금 에단이 느낀 감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시기나 질투도 들지 않는 불합리함.
‘원래 인생이 그런 법이지.’
삶은 평등하지 않았다.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는 법이었다.
‘조금 변주를 줘 볼까.’
에단은 머리를 비웠다.
수많은 기술들이 에단의 몸과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모든 기술은 파훼법이 있었다.
스탠스와 자세,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
그렇기에 격투기 선수는 시합이 잡히는 순간 상대 선수를 철저하게 파훼하고 연구한다.
버릇과 습관, 자주 쓰는 기술, 스텐스, 스타일 등 이 모든 것을.
그리고 작전과 플랜을 짠다. 류태신의 상대들도 마찬가지였다.
류태신은 오랜 기간 챔피언으로 군림했고, 그만큼 조사할 표본들도 많았다.
그 아성을 넘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수많은 전문가가 달라붙어 류태신을 낱낱이 파헤쳤다.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시합에 나섰다.
그들도 세계 정상급의 선수들이고, 온갖 전문가들을 모아 파이트 캠프를 꾸린다.
하지만 류태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수많은 선수들이 절망과 좌절을 앉고 은퇴했다.
하지만 에단은 달랐다.
즐거웠다.
압도적인 격차였음에도 호승심이 일었다.
에단이 가볍게 스텝을 밟다가 달려들어 주먹을 날린다.
의도적으로 동작을 크게 했다.
카무잔이 팔을 들어 에단의 주먹을 붙잡았다. 에단의 움직임은 아직 힘을 잃지 않았다.
새까만 오러를 두른 무릎이 카무잔의 얼굴을 노렸다. 카무잔은 히죽 웃으며 무릎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에단의 동작이 뚝 멈추며 무릎을 회수했다.
에단의 다리가 구렁이처럼 카무잔을 휘감는다.
순식간에 완성된 트라이앵글 초크.
하지만 압도적 완력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뚜드득!
그립이 풀린다.
그리고 공성병기 같은 주먹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에단은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착지했다.
“위험하네.”
방금 거는 맞으면 즉사였다. 상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지.
“오.”
카무잔이 탄성을 흘렸다. 에단의 반응에 감탄한 것은 아니었다.
수없이 에단과 대련하면서 이 정도쯤은 어렵지 않게 피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피하지 못했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카무잔이 감탄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바닥이 멀쩡했다. 마법진이 가동하며 빛을 뿜어냈다.
“이거 의욕이 좀 생기는데?”
카무잔이 사납게 웃자, 에단도 똑같이 웃었다.
“한번 부숴 봐?”
“좋지!”
하하하!
카무잔이 웃으며 달려들었다. 사라진 신영.
어디로 올까.
예측은 무의미하다.
카무잔이 작정한다면 에단의 시각이나 감각으로 좇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면.’
근거는 없다. 단순한 직감이다. 그리고 에단의 직감은 맞았다.
에단이 상체를 젖히자 카무잔이 그곳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폭풍 같은 연타가 이어진다.
처음에는 맹수처럼 휘두르던 주먹의 궤적이 이제는 형태를 갖춘다.
‘이거야 원.’
공격이 너무 날카로웠다.
카무잔에게는 저러한 기술이 필요 없었다. 기술을 뛰어넘는 본능과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태여 기술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카무잔이 저러는 것은 단순한 재미 때문이다.
에단은 눈을 굴리며 공격을 피해 냈다.
에단도 훨씬 창의적인 방식으로 카무잔을 대처하기 시작했다.
훨씬 더 자유롭고 기민하다.
쾅! 쾅! 쾅! 쾅!
무지막지한 굉음이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둘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이제 보이는 것은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빛이 전부였다.
쾅!
카무잔이 에단의 주먹을 막았다.
에단이 빙그르르 회전하며 오러를 두른 팔꿈치를 던졌다.
카무잔이 상체를 젖히며 피하려 들자, 에단이 더욱 빠르게 대처했다.
순식간에 근접한 에단이 주먹을 날렸다.
파바바박!
주먹이 쏟아진다.
하나같이 위협적인 주먹이었지만, 카무잔은 여유롭게 웃으며 모두 막아 냈다.
‘더럽게 아프네.’
에단이 거리를 벌리고는 자신의 주먹을 바라봤다. 오러를 둘렀음에도 주먹이 넝마가 되었고, 뼈가 으스러졌다.
욱신욱신.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에단이 포션 하나를 들이켰다.
산산조각 난 뼈와 살가죽이 순식간에 수복된다. 카무잔은 가만히 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계속해 볼까?”
에단이 웃었다.
* * *
에단이 살아 있다.
그 소식은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에밀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옅게 웃은 네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이랍니다.”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 네이드.
“하아…… 그럴 줄 알았어요.”
에밀라가 물기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단은 살아 있었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에단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슴 한편에는 불안함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정말 살아 있을까?
에밀라는 무력감을 실감했다.
늘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경쟁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그녀의 재능은 진짜였다.
그렇다고 거만해지거나 여유를 부린 것은 아니다. 그녀는 늘 검을 쥐었다.
검을 휘두르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졌다. 복잡한 상념도 그 순간만큼은 사라진다.
검은 스스로를 수양하는 수단이다. 전에 살던 어쌔신의 삶과는 달랐다.
피비린내가 가득한 삶이 아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이었다.
믿고 따르던 레벨린을 잃고 방황했지만, 에단 덕에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에단에게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고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에밀라가 조급해진 것은.
그녀에게 따라오던 천재라는 호칭.
하지만 진정한 천재는 따로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에단을 쫓아갈 수 없었다. 점점 멀어지기만 하자 조급해졌다.
에밀라는 그의 곁에 서 있고 싶었다.
에단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하나 같이 엄청난 인물들이었다. 그녀보다도 훨씬 뛰어난 굴지의 강자들.
마탑의 탑주, 에르미온.
마법 명가의 가주, 데아티르.
오르번 또한 에밀라가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대체 뭐지?’
이번 전쟁에 그녀는 참전하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네이드 밑에서 수련했다. 그토록 혐오하던 어쌔신으로 돌아갔다.
다시 손에 피를 묻히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에단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네이드는 전설적인 어쌔신이다.
밝은 달.
내포하고 있는 뜻은 광오하기 그지없었다.
선명한 달빛이 지상을 밝혀도 목표를 죽일 수 있다는 의미.
목격자는 없었다. 시체는 말이 없는 법이었다.
실종된 전설이 그녀의 스승이 되었다.
네이드는 그야말로 어쌔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에밀라는 네이드에게 혹독한 수련을 받았다.
― 조급하군요.
― …….
네이드는 에밀라의 상태를 단번에 파악했다.
―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별로 좋은 증상은 아니군요. 제가 함부로 조언할 입장은 아니니, 당분간 수련을 중단하도록 하죠.
― 하지만…….
― 아니요. 여기서 더 강도를 높인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공격에 감정이 실리고 있습니다. 저희 같은 어쌔신에게 있어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은 가장 기피해야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이유는 에밀라 님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 …….
에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하여 모르겠는가.
감정이 읽히는 것은 최악이다.
살상력과 간결함을 최우선시하는 어쌔신의 공격 궤적은 읽히는 순간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로 동일한 실력이라 했을 때, 공격이 실패한 순간 어쌔신은 목숨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쌔신의 모든 공격은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냉정해져야 한다.
이성적인 판단이 가장 중요했고, 설령 팔다리가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에밀라는 지금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이드에게 저러한 평가를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홀로 수련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두 수련하는 데 할애했다.
마치 칼의 날을 갈듯이.
그녀는 스스로를 갈아 갔다. 점점 예리해지도록 자신을 채찍질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성취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퇴보하는 듯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에밀라는 멈춰 있었다. 다른 이들이 나아갈 때 그녀 혼자 멈춰 있었다.
그녀는 가토와 휴고를 지켜봤다. 재능 있는 자들이었다.
그 둘은 어느새 에밀라를 따라잡았다. 종종 대련을 해 보면 알았다. 이제 그녀는 둘을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둘 사람이 매일같이 성장하고 있을 때, 그녀만 정체되어 있었다.
그렇게 심마에게 잡아먹히고 있을 때, 네이드가 찾아와 에단의 생존 소식을 알렸다.
“하하.”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혼란이 걷히는 기분이다.
그녀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안도감이 차올랐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네이드의 물음에 에밀라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보이시나요?”
“네.”
네이드가 빙그레 웃었으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대련 한번 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에밀라가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