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화] 조우 (1)
― 이야,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다? 너 지금 그게 말이라고!”
에단의 얼굴을 본 에르미온이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에단이 무사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과 태연하고 뻔뻔한 저 태도에서 오는 울화가 공존했다.
‘그래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에르미온이 고개를 돌렸다.
주체 못 하는 감정이 원망스러웠다.
에단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감정을 차분하게 진정시키고 다시 에단을 응시했다.
그때 헨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에단 님!”
헨리가 환하게 웃으며 에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며 삐딱한 눈초리로 헨리를 바라봤다.
― 너는 요즘 살판났겠다?
“……네?”
― 요즘 매일 술 처마시고 다니지?
“아, 아닙니다! 저, 저를 뭐로 보시는 거예요? 에단 님 걱정하느라고 잠도 제대로…….”
―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게 아주 숙면을 취한 것 같은데? 내가 너를 모르냐?
“아, 아니라니…….”
― 진짜 아니야? 내가 돌아가서 확인해 본다? 만약 맞으면…… 감당할 수 있어?
에단의 눈에 서리가 내려앉는다. 헨리는 섬뜩한 한기를 느끼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잘못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찌그러지는 헨리를 보며 에단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하려고 들어?
― 그래. 순순히 인정하니까 얼마나 좋아.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르번과 데아티르.
원래도 생기 넘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한층 더 퀭해진 모습으로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로에 찌든 피폐한 눈동자를 보고는 에단이 피식 웃었다.
― 고생했나 보네.
“……누구 덕분에 이 나이 먹고 고생 좀 했지.”
― 그 얼굴로 나이 타령하면 별로 동정이 안 되는 거 알아?
“……재수 없는 놈.”
― 칭찬 고마워.
에단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저런 반응조차 그리웠다.
‘이런 기분인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류태신으로 살아갈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부와 명예. 모든 것을 얻었고 지상 최강이라는 호칭도 따라왔었지만, 그는 고독했다.
코치와 트레이너, 감독, 기자, 영양사, 스파링 파트너 등등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는 삶을 살았지만, 류태신의 가슴 속은 늘 공허했다.
그들의 의도가 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출세, 돈, 권력.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만족감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토록 바라 오던 걸 소설 속 망나니가 되어서야 느끼다니.’
지금 자신이 진짜 에단이 아닌 가짜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진짜였으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익숙한 얼굴들을 보니 다른 이들도 보고 싶었다.
책 속에 떨어지고 처음 마주했던 음흉한 노인인 네이드.
순박하고 의기소침한 하인이었던 휴고.
수습 기사 주제에 자존심과 콧대는 더럽게 높았던 가토.
까칠했지만 은근히 털털해서 마음에 들던 에밀라.
그리고 그 밖에도 수많은 인연들이 있었다.
에단은 옅은 미소를 머금더니 차오르는 감정들을 털어 냈다.
깊게 빠져서는 안 된다.
지금은 이딴 나약한 감정을 느낄 시기가 아니었다.
아직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지하에 온 이상 매듭을 짓고 올라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에단은 책임지지 못하는 자를 혐오한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자들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에단은 블란테의 후계자였다.
모두를 구할 영웅이 될 생각은 없다. 그저 내 사람만 지키면 그걸로 충분했다.
― 길게 얘기할 생각은 없어. 나는 무사하고……. 여기서 일 끝내고 돌아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필요해지면 그때 부를 테니까.
“……지하로 부른다고?”
오르번이 기막힌 표정을 지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지하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지하의 대기와 그 속에 깃든 죽은 마나는 인간에게 극독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인 에단이 지하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었다.
‘애당초 상식에서 벗어나는 녀석이었지만.’
저렇게 태연자약한 모습이라니. 오르번이 실소를 터트렸다.
오르번은 시전된 술식을 천천히 점검했다. 첫 시도치고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정말 지하에서 넘어오는 게 가능할 수도 있겠군.’
소모되는 죽은 마나의 양 자체는 엄청났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아직 돌아올 의사가 없어 보였다.
“오지 않겠다는 이유가 뭐지?”
―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에단은 오르번의 질문에 진지하면서도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는 그런 녀석이었지. 그래서 구체적으로 언제 돌아온다는 거지?”
― 얼마 안 남았어. 나도 여기 있는 게 썩 좋지는 않아서 금방 돌아갈 생각이라고.
“마음대로 해라.”
― 그렇게 말 안 해도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
― 오, 이 녀석들이 네가 말한 인간들인가?
오르번과 다른 이들이 눈을 끔뻑였다. 처음 보는 낯선 자가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유려한 외모의 사내.
샛노란 눈동자는 휴고와 같은 수인을 연상시키지만, 훨씬 더 강렬한 빛을 품은 눈이었다.
직접 대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르번은 한눈에 카무잔이 범상치 않은 자라는 것을 인지했다.
쿵.
심장이 가라앉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오르번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의 위치까지 올라간 각 분야의 수장들조차 얼어붙고 말았다.
압도된다.
호흡이 통제된다. 살기나 기세를 표출하는 것도 아닌, 그저 마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버거웠다.
‘대체 뭐야……?’
식은땀조차 흐르지 않았다. 피부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등줄기에서 소름이 빗발친다.
드래곤을 마주했을 때도 이와 같은 압도적인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토끼와 사자?
쥐와 고양이?
아니, 그것과도 비교도 되지 않는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혹시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르번이 조심스럽게 묻자, 카무잔이 눈을 끔뻑였다. 표정만 보면 순박하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었다.
― 나?
카무잔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씨익 웃자, 뾰족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 카무잔.
“…….”
오르번은 침묵했다. 질문의 의도는 이름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르번은 몇몇 군주들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건 먼 과거의 일이었고, 군주들의 서열조차 매우 낮았다.
오르번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매우 오랜만에 긴장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혹시…… 군주십니까?”
― 흐음…….
카무잔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에단이 말끝을 흐리는 카무잔을 밀어내며 나타났다.
― 애들 좀 그만 놀려. 재밌어?
― 조금?
― 성격 참 고약하네.
미간을 찌푸린 에단이 일행을 향해 고를 돌렸다.
― 아, 크게 신경 안 써도 돼. 카무잔이라고. 음…… 대군주 중 한 명이야.
“……?”
오르번과 헨리, 에르미온, 데아티르, 그리고 도미닉까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정적이 내리깔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매우 길게 느껴졌다.
늘 싸늘하고 냉담한 표정을 유지하던 오르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대, 대군주라고?”
오르번은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체면을 차릴 상황이 아니었다.
― 잘 들었는데? 대군주라고.
에단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르번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군주를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게 않게 거론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동네 친한 형을 대하듯 한 에단의 모습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오르번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입을 뻐끔거렸다.
― 그럼 할 얘기 끝났으니까 이만 간다? 연락은 주기적으로 할 테니까 조만간 또 보자고. 야, 꺼.
뚝.
에단이 자기 멋대로 술식을 해제하자 통신이 끊겼다. 허공에 밀집되어 있던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흩어져 내렸다.
“…….”
기분 나쁜 침묵이 내리깔렸다.
모두가, 그중에서도 특히 도미닉이 받은 충격이 가장 컸다.
그는 카무잔을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아, 이게 진짜 대군주구나.
도미닉이 모시던 로이마르티도 인간의 기준에서 본다면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카무잔과는 차원이 달랐다.
경지의 오른 이가 쏘아 내는 살기는 범인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에 범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뛰어난 기량과 역량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낯설고도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음…… 분위기도 이런데…… 저희 한잔하러 갈까요?”
헨리가 얼어붙은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서 말을 꺼냈다.
여러 쌍의 눈동자가 헨리를 응시했다. 기가 죽은 헨리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찌그러졌다.
“후우…….”
오르번이 깊고도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보고부터 해야겠군. 에단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에단은 살아 있었다.
이제 여론은 뒤집힐 것이다.
* * *
뚝.
“야, 꺼.”
로이마르티가 마나를 차단시키자 술식이 해제되었다.
“아…….”
그가 착잡한 탄식을 흘렸다.
그의 하수인을 통한 마법이었지만 얼굴조차 내밀지 못했다.
복잡하고도 씁쓸한 감정이 들었지만 감히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저 촉촉하고 슬픈 눈으로 에단과 카무잔을 바라봤다.
카무잔이 눈을 끔뻑거리며 로이마르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아닙니다.”
로이마르티가 고개를 숙이며 찌그러졌다.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오금이 저렸다.
“야.”
“……네?”
“이 마법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건가?”
로이마르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그건 조금 힘듭니다.”
“이유는?”
“그게 이 마법 자체가 가로막힌 차원의 벽을 인위적으로 비틀어서 일시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복잡한 설명에 에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러자 흠칫 놀란 로이마르티가 설명을 달리했다.
“그…… 그냥 좀 힘듭니다.”
“그래?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다음은 언제가 되는데.”
“아…… 그래도 대략 일주일 정도가 흐르면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상관없네. 그럼 너는 앞으로 여기서 지내면 되겠다.”
“……네?”
“필요한 것 있으면 마주쳤던 집사 있지? 걔한테 부탁하면 어지간한 건 해 줄 거야.”
“그, 그게…….”
“그게 뭐.”
에단이 로이마르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로이마르티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배,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별것도 아닌데.”
에단이 피식 웃으며 로이마르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로이마르티가 속으로 수만 가지의 욕설을 내뱉었다.
‘아…….’
어쩌다가 군주인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
절망에 빠진 로이마르티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