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군주 로이마르티 (2)
로이마르티는 지금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살아야 한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다고 한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존심?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목숨을 살려 주는 건 아니다.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들어 갔다. 하지만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덜덜덜.
몸이 가늘게 떨렸다.
잘못 걸렸다. 정말이지 잘못 걸리고 말았다.
‘누구지?’
로이마르티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하는 넓었고, 수많은 군주들이 있었다.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군주들도 넘쳐 났다.
로이마르티는 모든 군주를 알지 못했다. 애당초 군주들은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주위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로이마르티가 카무잔의 눈치를 살폈다.
카무잔은 인상을 찌푸린 채 로이마르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지?’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첫 단추부터가 잘못되었다.
후회는 늦었다. 절망감이 엄습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이대로 끝나기엔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로이마르티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이제 계획에 진전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뒤면 이 엿 같은 지하에서 탈출하고 호의호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무너진다고?
“여, 여기는 대군주 아모드라 님의 영역입니다. 누,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저를 죽이면 아모드라 님의 화를 피하기 힘드실 겁니다.”
“……?”
기껏 생각해 낸 변명이 저거란 말인가?
카무잔이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도 카무잔을 보며 피식 웃었다.
“호오…… 그러니까. 너를 죽이고 여길 다 뒤집어 버리면 아모드라 그 새끼가 눈깔이 돌아간다…… 이거냐?”
“그, 그렇습니다!”
로이마르티의 눈에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대군주의 이름을 파는 게 조금 성공적이었나?
사실 대군주나 되는 이가 로이마르티를 신경 쓸 리 없었다. 죽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겠지.
지하는 그런 냉혹한 세계였고, 대군주란 그런 냉혹한 자였다.
로이마르티가 침을 꿀꺽 삼키며 카무잔을 올려다봤다.
히죽.
카무잔이 섬뜩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로이마르티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희망이 산산조각 났다. 헛된 희망이었다.
“대, 대군주의 분노가…… 두, 두렵지도…….”
패닉에 빠진 로이마르티가 아무런 말이나 지껄이고 있었다.
횡성수설하고 있는 로이마르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카무잔.
“야.”
“……네?”
“우리 아모드라가 시켜서 온 건데?”
“……네?”
로이마르티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카무잔을 바라봤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카무잔이 귀찮음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도 짜증 어린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뒷수습은 내 몫이지.
힘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한숨을 내쉰 에단이 로이마르티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네가 로이마르티?”
“…….”
끄덕끄덕.
“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지?”
조금 난감했다.
뺨을 긁적이며 고민하던 에단이 카무잔을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음…… 일단 아모드라가 시켜서 온 건 맞고. 저쪽은 카무잔. 알고 있으려나?”
“……카무잔?”
지금 대군주 카무잔을 말하는 건가?
대군주 중에서 가장 악명이 자자한 미친 싸움광?
나는 지금 그 카무잔에게 시비를 걸은 거고?
로이마르티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여기서 용건을 말하긴 그러니까 일단 자리를 좀 옮길까?”
* * *
로이마르티는 쭈글거리며 카무잔과 에단의 눈치를 살폈다.
늘 군주로서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으려던 로이마르티였지만, 대군주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로이마르티가 눈을 굴리며 카무잔과 에단의 눈치를 살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군주가 어째서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지? 카무잔은 왜? 설마 대군주가 협력을 시작했나? 콧대 높은 대군주가 뭘 위해서? 설마…… 정말 전쟁인가?’
로이마르티의 몸이 반사적으로 떨리기 시작한다. 큰일이다.
여기서 무사히 살아날 수 있다면 계획을 앞당겨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지상으로 가야 한다.
대군주들의 전쟁 사이에 끼면 무조건 죽는다.
“너, 지상으로 갈 생각이지?”
움찔.
로이마르티의 몸이 떨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에단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뭐지? 어떻게 알았지?’
“대가리 굴리지 말고.”
에단이 다리를 꼬며 로이마르티를 응시했다. 로이마르티를 바라보는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미 다 알고 왔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네?”
“그, 그게…….”
“그게 뭐. 또 좆같은 소리 지껄이면 그냥 다 부숴 버린다?”
“…….”
고개를 든 로이마르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말은 진심이다.
에단과 로이마르티의 눈이 마주쳤다. 로이마르티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로이마르티는 결국 모든 걸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카무잔은 아무런 흥미도 없는 듯 보였고, 에단은 만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주기적으로 통신하는 녀석이 있다…… 그거네?”
“그, 그렇습니다.”
“이야, 고생 꽤나 했겠는걸? 생각보다 되게 귀찮은 작업이라고 하던데.”
“…….”
로이마르티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걸 아는 놈이 이렇게…….
“수고했어. 그나저나 지금 바로 보고 싶은데.”
에단이 로이마르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로이마르티의 고개는 점점 깊게 숙여졌다.
“음? 왜 대답이 없지?”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로이마르티는 에단과 카무잔을 이끌고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은 한눈에 봐도 보안에 신경 쓴 모습이었다.
여러 안전장치를 지나 지하실에 들어서자 수많은 마법진들이 가득했다.
로이마르티의 표정에서 억울함과 서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로이마르티의 심경 따위는 에단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빨리 하고 가자.”
“……네.”
로이마르티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공명하며 음산한 빛을 흘려내고 있었다.
“나의 충실한 충복이자, 가녀린 필멸자여…… 너의 주인인 나의 부름의 응답하여 충성심을 증명…….”
“꼭 혀를 그렇게 놀려야 되냐?”
카무잔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로이마르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시정하겠습니다.”
“잘하자.”
중얼중얼.
로이마르티가 낭송을 이어 나갔다. 꽤나 길고 복잡한 주문이었다.
이윽고 허공에 검은 안개가 모이기 시작했다.
― ……위대하신 대군주님을 뵙습니다…….
“…….”
에단과 카무잔이 로이마르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로이마르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지 못했다.
“죄, 죄송…….”
“됐으니까 자연스럽게 이어 나가.”
“네, 넵…….”
큼, 크흠.
로이마르티가 목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위엄 있고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가녀린 아이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지?”
―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주인님. 완벽한 현현을 위해…….
“야. 비겨 봐.”
에단이 로이마르티를 밀어내며 검은 안개 앞에 섰다. 로이마르티는 힘없이 밀려나며 서글픈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아아, 들리냐?”
― ……누구시죠?
앞에 대상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뭐, 그건 에단에게 있어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 흑마법사지?”
― 그, 그렇습니다만…….
“그럼 됐고. 준비하는 게 쉽지 않지? 내가 그쪽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내가 쉬운 방법을 알려 줄게.”
― 쉬운 방법 말입니까?
“그래. 너는 말이 좀 통하는구나. 이 새끼보다 낫네.”
“…….”
로이마르티가 슬픈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로이마르티의 눈길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를 찾아가서 오르번을 찾아. 그리고 에단이 보냈다고 말해. 만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야.”
― 오, 오르번이라면…….
“그래 나이 먹은 늙다리니까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필요한 준비물 같은 건 거기서 죄다 준비해 줄 거야. 도착하는 대로 바로 연락해. 대충 얼마나 걸리지?”
― 이, 일주일……?
“너무 늦어. 당장 움직여. 이틀 준다.”
― 이, 이틀 말입니까?
“대답.”
―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노력 말고 바로 움직이라고. 그럼 이만 끊는다.”
에단이 로이마르티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가 통신을 끊었다.
요사스런 빛을 뿜어내던 마법진이 사그라들었다. 에단은 손을 털어 내며 로이마르티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별 거 없었는데?’
큰 기대 없이 온 것 치고 일이 수월했고, 성과도 있었다.
‘일단 연락만 되면 됐지.’
쓸데없는 일들로 진을 빼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에단이 손을 털며 로이마르티를 바라봤다. 로이마르티는 넋이 나간 채 초점 잃는 눈으로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다.
“야.”
“…….”
“대답 안 하냐?”
“……네?”
“억울하지?”
“아, 아닙니다…… 전부 제가 자초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솔직히 억울해서 미치겠잖아.”
“…….”
로이마르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에단의 말대로였다.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어떤 노력을 들여왔는데…….
“근데 별수 있나. 약한 네 잘못이지.”
“…….”
뭐지?
로이마르티가 기막힌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리도 좀 옮기자. 우리 이제 슬슬 돌아가야 되거든? 그리 멀지는 않지만 좀 번거롭잖아. 같이 가자고.”
“어, 어디를 말씀이시죠?”
“어디겠어. 아모드라한테 가야지.”
에단의 말을 듣는 순간 로이마르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 *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오지의 동굴 속.
흑마법사 도미닉은 자신의 연구실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뭐지?’
방금 전의 대화가 너무 얼떨떨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대군주와 접촉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군주와 연락하는 것조차 엄청난 일이었는데 대군주가 관심을 가지다니.
도미닉은 차오르는 고양감을 숨길 수 없었다. 홀로 고독하게 연구한 것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대군주가 강림하는 그날. 도미닉은 불멸의 힘을 얻고, 영화를 얻게 될 것이다.
절대적인 위업을 달성한 위대한 흑마법사 도미닉은 오르번의 이름조차 뛰어넘으리라.
‘……무슨 일이지?’
그런데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도미닉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칙칙하고 음습한 연구실이었다.
“아카데미라고?”
도미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번거로웠지만 감히 대군주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도미닉이 검은 로브를 어깨에 둘렀다. 간만에 외출이었다.
도미닉은 곧장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는 실력 있는 흑마법사였다. 아카데미까지의 거리는 상당했지만, 가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중간에 도적 따위를 마주치기는 했지만, 아무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도적들이 산 채로 녹아내렸다.
도미닉은 아무런 감흥 없는 눈초리로 죽어 가는 도적들을 흘겨봤다.
언데드로 만들 가치조차 없는 자들이다.
그렇게 속력을 낸 지 이틀.
“하아.”
도미닉이 아카데미의 성문을 바라봤다.
피로함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틀이라는 시간 안에 도착하기에는 먼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