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2화] 실체 (3)
“……오늘도인가?”
“그렇습니다.”
“정신나간 새끼들…….”
아모드라가 기막힌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에단과 카무잔이 성에서 머무른 지도 벌써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둘은 미치도록 단순한 일과를 보냈다. 식사 시간과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지하 수련실에서 종일 죽치고 있었다.
아모드라가 직접 마법적 처리를 해 둔 지하실이었지만, 지축을 울려 대는 굉음이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쿠구궁.
이런식으로.
“후우…….”
아모드라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아무리 대군주인 아모드라가 직접 조치를 취해 뒀다고 한들 지하에서 난장판을 피우고 있는 자도 같은 대군주였다.
고작 술식 몇 개로 충격을 모두 상쇄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이곳이 아모드라의 성이기 때문에 충격을 견디고 있는 것이었다.
쿵! 쿠구구구궁―!
후두두둑.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로이드와 아모드라가 동시에 천장을 올려다봤다. 불편한 정적이 내리깔렸다.
루비 같은 동공이 가루가 떨어지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아니요…….”
수백 년을 넘는 시간 동안 이 성에서 지내온 둘이었지만, 돌가루가 떨어지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균열은 안 가서 다행이군.’
대군주가 직접 난동을 부리고 있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리라.
쩌거걱.
그 순간 성 기둥에 갑작스레 커다란 균열이 새겨졌다.
“…….”
“…….”
아모드라와 로이드가 물끄러미 기둥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마주 봤다.
“……조치 좀 취해야겠군.”
“바로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뭐, 별일은 없겠지.”
설령 성이 완전히 무너지려고 들어도 성안에 아모드라가 있는 한 문제는 없었다.
성의 주인이 아모드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유지 보수는 필요해 보였다.
“후…… 그건 그렇고, 정수를 몇 병이나 썼다고?”
“……지금까지 사용한 정수만 하여도 최소 이백 병에 육박합니다.”
“이런 미친…….”
이번에는 진심으로 기막힌 표정을 짓는 아모드라.
피의 정수.
아모드라가 직접 제조하는 엄청난 성능을 지닌 포션이었다.
에단과 카무잔은 그러한 가치의 포션을 물보다 더 가볍게 써 대고 있었다.
성에 보관 중이던 포션의 재고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모드라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후우…… 그 둘, 지금 당장 불러와.”
“……알겠습니다.”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로이드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곤혹스러우면서도 피곤한 표정을 들었다.
‘……두 분이 말을 따라 주시려나.’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 * *
에단과 카무잔의 일과는 단순했다. 체내의 마나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상당히 높아졌다.
‘기존의 마나도 조금 사용할 수 있게 됐고.’
지금껏 에단이 사용해 온 마나는 죽은 마나였다. 기존의 마나는 지하에서 사용하는 데 여러 제약이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무잔과 훈련하면서 에단의 역량은 상승하였고, 마나를 다루는 능력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그러면서 불완전하지만 기존의 봉인된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카무잔은 에단이 사용하는 마나에 대단한 흥미를 보였다.
“전에도 그랬지만…… 독특한 기운을 많이 사용하는군. 그게 세계수라는 나무에게서 흡수한 힘인가?”
“남자한테 받는 관심은 딱히 달갑지 않은데.”
“하하하하! 틀린 말은 아니군. 확실히 그렇긴 하지.”
카무잔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에단의 성장에 대해서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 대련에서 카무잔은 본인의 힘의 절반 정도를 끌어내고 있었다.
에단이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버티는 게 고작이었지만, 대군주를 상대로 버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잠깐 확인해 봐도 되겠나?”
카무잔의 말에 에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거절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카무잔은 에단의 손목을 붙잡았다.
매우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에단의 몸속에 깃든 기운을 엿볼 수 있었다.
“오.”
카무잔은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릇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 안에 도사리는 기운 또한 막강했다.
‘이게 그때 봤던 그 힘이군.’
에단이 내뱉은 불길한 언어. 카무잔은 그 기억을 잊지 않았다.
‘마나의 총량만 따지면 나랑 비슷하거나 위인가?’
카무잔이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20년을 조금 더 산 인간이 이러한 힘을 품고 있다니.
카무잔이 붙잡은 손목을 놓자, 에단이 물었다.
“보니까 어때?”
“대단하군.”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자 카무잔이 피식 웃었다.
“조급해하지 마라. 잠재력은 충분하니.”
에단은 이미 완벽한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압도적인 마나량.
그것만 하더라도 성장에 걸리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해가 안 될 수준이군.’
한낱 인간이 어떻게 저런 기운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일까.
‘뭐 상관없나.’
카무잔은 관심을 접었다.
인간이든, 마족이든, 군주든.
그 외의 무엇이건 카무잔은 딱히 상관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롯이 재미였다. 카무잔이 보기에 에단은 충분히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 그럼 휴식은 충분히 취한 것 같으니 다시…….”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느새 등장한 로이드가 긴장한 표정으로 카무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무잔은 로이드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뭔데.”
“…….”
로이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이러한 반응이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하에서는 힘이 곧 권력이었으니까. 그것은 로이드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포션이 바닥났습니다.”
로이드는 열심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성안에 비축해 둔 포션들의 재고가 모두 떨어져 아모드라가 추가로 제조하려면 재료가 필요하다고.
“그래? 그러면 재료를 구해 오면 되잖아.”
‘이런 ㅆ…….’
로이드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늘 여유로운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아모드라의 표정에 균열이 새겨졌다.
파르르.
안쓰럽게 떨리는 로이드의 입꼬리.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무슨 이런 날강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카무잔의 표정은 태연자약했다.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곁에 있는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팔짱을 낀 채 ‘뭐 어쩌라고.’ 하는 듯한 표정.
로이드가 고개를 돌리자, 산처럼 쌓인 포션의 공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속이 쓰렸다.
로이드는 딱히 재물에 관한 욕심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의 주인은 아모드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아무리 대군주라 하더라도 응당 최소한의 양심이란 게 있지 않느냔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무력행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는 순간 카무잔에게 끔찍하게 살해될 게 눈에 보였다.
로이드는 힘겹게 미소를 유지하며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아모드라 님께서 부르십니다.”
“그 새끼가 날 왜 불러? 볼일이 있으면 지가 와야지.”
“…….”
“그러지 말고 한번 가 보지? 여기서만 있기 좀 답답했잖아.”
“그런가? 음…… 그래 뭐. 기분 전환도 할 겸 역겨운 상판대기나 보러 가야겠어.”
로이드의 말과는 정반대로 에단의 말은 순순히 따르는 카무잔의 모습.
로이드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할 뻔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에단과 카무잔은 로이드의 안내에 따라 지하실을 나서서 아모드라의 알현실로 향했다.
알현실에 들어선 카무잔은 군데군데 새겨진 균열을 보며 표정을 구겼다.
“건물 상태가 왜 이렇게 허접해?”
“…….”
“…….”
아모드라와 로이드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카무잔을 바라봤다.
아무리 대군주라고 하더라도 이렇게나 뻔뻔할 수가 있단 말인가?
“포션을 꽤나 펑펑 써 댔더군.”
“어. 좀 썼어.”
태연하다 못해 뻔뻔한 태도. 아모드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카무잔을 바라봤다.
이것 참 여러모로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살면서 이런 취급을 받게 되다니.
뒷목이 뻐근해지는 이 기분.
아모드라는 한숨을 내쉬며 카무잔을 바라봤다.
“딱히 유세를 부리려는 것은 아니다. 쓸 만한 이유가 있으니 썼겠지. 뭐…… 나름의 의미는 있었나 보군.”
아모드라가 에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에단이 얼마나 많은 성장을 했는지.
‘대체 뭔 짓을 하고 있던 거야?’
아모드라가 카무잔을 바라봤다.
카무잔은 삐딱한 자세로 아모드라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표정만 보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가 느껴졌다.
‘뭘 야려?’
하…….
아모드라가 고개를 저으며 본론을 꺼냈다. 의식을 하면 할수록 손해는 자신만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뭐 언제가 됐건 문제는 그게 아니야. 지상에서 지하로 여는 통로는 생각보다 열기가 수월해. 지하가 왜 지하라고 불리는지 아나?”
“밑에 처박혀 있으니까?”
“말을 해도 꼭…… 그래. 지상보다 아래쪽에 있어서 지하라고 부른다. 문을 여는 것도 같은 맥락이야. 너처럼 툭 떨구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역으로 올라가는 건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필요로 하지.”
“하면 되잖아.”
“너는 그냥 닥치고 있어.”
아모드라가 카무잔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카무잔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면 방법이 없는 건가?”
“없진 않아. 제한적으로는 방법이 꽤나 있어.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일시적인 소환 따위가 아닌 걸로 아는데.”
“그래. 그건 의미가 없지.”
“넌 이미 이 환경에 상당히 동화되어 있어. 본래 지상의 생명체들은 지하에서 살아갈 수 없는 법인데…….”
아모드라의 눈매가 좁혀졌다. 보면 볼수록 묘한 녀석이었다.
“뭐, 이제 와서 그건 중요한 얘기가 아니겠지. 중요한 건 그나마 있는 방법조차 나는 모른다는 거다.”
“모른다고?”
“그래. 애당초 세력이 있는 지하의 군주들은 지상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 대군주쯤 되면 더 그렇고.”
당장 아모드라와 카무잔만 보더라도 지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아모드라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고, 카무잔은 싸움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지상에 올라가 봤자 약해 빠진 놈들만 수두룩할 텐데 뭐 하러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설령 지상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추앙받는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지하의 군주 앞에서는 도마뱀 수준에 불과했다.
카무잔이 흥미를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떨거지들 때문에 그 지랄을 했단 건가?’
순간 허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수 있나.
“그렇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있긴 하다는 건가?”
“그래. 지상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는 군주라면 고유의 루트쯤은 가지고 있겠지. 재료를 얻는 김에 그 녀석도 데리고 와라.”
“언제는 자리를 비우지 말라며?”
“얌전히 있었으면 그랬겠지만…… 여기서 계속 있다가는 전쟁 때문이 아니라, 너희들 때문에 내 성이 무너질 지경이야.”
에단과 카무잔을 응시하는 아모드라의 안광이 섬뜩하게 빛냈다.
“알았으면 빨리 꺼져라.”
축객령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