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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350화 (350/398)

◈ [350화] 실체 (1)

“크으으으!”

칼베리안이 테이블 위에 거칠게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칼베리안은 최근 들어 하루도 빠짐없이 술집에 출석하고 있었다.

‘결국 형님의 뜻대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가.’

크리스토는 황제로 즉위했다.

반발은 모조리 묵살당했다. 감히 정당성 따위의 발언을 내뱉을 수 있는 간 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다.

칼베리안은 차마 전쟁을 지속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전쟁에서 피를 흘리는 건 죄 없는 민초들뿐이다.

일개 개인의 욕망 때문에 전쟁을 이어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살아 있는 걸로 만족해야겠지.’

칼베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블란테가 그의 안전을 지키기 있기 때문이다.

제국 입장에서 칼베리안은 눈엣가시였다. 불온의 씨앗은 제거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제국은 이번 평화협정에서 칼베리안의 인계를 요구하지 않았다.

‘거기 남고 싶으면 원하는 대로 하라고 전해 주시죠.’

크리스토는 칼베리안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칼베리안은 그것이 어떠한 연기도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기랄!’

칼베리안이 이를 갈았다.

분했다.

너무 화가 치밀었다.

블란테라는 든든한 뒷배경을 얻었다.

제국에서 사실상 구금되어 있을 때보다 모든 것이 나아졌다.

자유가 보장되고, 감시도 사라졌다.

숨 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칼베리안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국은 크리스토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에단은 실종되었다. 사실상 사망판정이나 다름없었다.

칼베리안이 술잔을 들었다.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 칼베리안이 다시금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칼베리안은 독주를 즐겼다.

술이 없으면 하루를 견디기 힘들었다. 홀로 방 안에서 적막한 하루를 보내고 있으면 자괴감에 죽고 싶었다.

마치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게 패자의 말로인가.’

칼베리안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그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칼베리안이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합석하고 싶은 생각이…….”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헨리가 있었다.

칼베리안이 멍한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시죠?”

“아, 별 건 아니고. 그냥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길래 왔습니다.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헨리는 손을 들어 능숙하게 술을 시켰다. 헨리가 술을 즐긴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우습지 않습니까?”

“……네?”

칼베리안이 자조적인 말을 시작하자 헨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결국 저는 아무것도 못 하고 말았습니다. 기껏 도망쳐 놓고, 이렇게 술에 절여져서 의미 없이 살고 있죠. 큭큭.”

“아…….”

헨리가 눈을 굴렸다.

뭔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솔직히 헨리는 칼베리안이 불편했다. 칼베리안은 엄연히 황제의 피를 이은 황족이었다.

귀족도 상대하기 껄끄러운데 하물며 황자라니.

헨리가 난처해하든지 말든지, 칼베리안은 말을 이어 나갔다.

“애초에 품은 생각 자체가 헛된 희망이었습니다. 아니, 제 개인적인 욕심이었죠. 능력이 안 되면 겸허히 운명을 받아들이면 될 것을, 제 개인의 욕망으로 인해 수많은 피해자가 생겨났습니다. 에단도…… 마찬가지구요.”

칼베리안이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강하게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헨리는 그런 칼베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에단 님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칼베리안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침묵의 의미가 긍정의 뜻이라는 건 헨리도 알 수 있었다.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욕심이라…….”

헨리가 혼자 중얼거리며 실소를 터트렸다. 과거 일들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제 이야기를 조금 해 드릴까요?”

헨리는 자신의 사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에단을 만나게 되었는지,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시기와 질투를 느낀 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과 없는 말단 직원으로 살아가는 게 여간 고역이었거든요.”

헨리는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 나가는 재주는 없었지만, 진솔하고 솔직했다. 기교가 없어도 괜찮았다.

그런 게 없더라도 술자리가 가진 힘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었다.

칼베리안은 헨리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에단 씨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패악질을 일삼은 구제불능 망나니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죠.”

“망나니라…… 지금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죠.”

“그건…… 흐흐흐. 부정할 수가 없네요.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휴고는 마구간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하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어엿한 블란테의 기사지만요. 가토는 일개 수습 기사 출신이지만, 지금은 마스터를 목전에 둔 재능 넘치는 기사고요.”

“……그 말이 사실입니까?”

헨리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밖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에단 님을 만나서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에요. 에단 님이 죽었을 거라 생각한다 했죠? 전 생각이 달라요.”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죽으실 분이 아닙니다. 저 혼자서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랬다면 수많은 자들이 이렇게 모여 있지 않았을 테니까.”

“…….”

“감정은 이해합니다. 저 같은 주정뱅이의 위로는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너무 술에만 의존해서 사는 건 좋지 않아요. 즐기자고 마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헨리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들고 있던 술잔은 어느새 비워 있었다.

끼이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술집의 문이 열렸다.

문의 틈새에서 편지가 나풀거리며 헨리에게 날아들었다.

편지를 받아 든 헨리가 눈을 끔뻑이며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헨리가 작게 웃으며 들고 있던 편지를 칼베리안에게 넘겼다.

칼베리안은 멍하니 편지를 받아들며 헨리를 바라봤다.

“이건…….”

“읽어 보세요.”

칼베리안이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짤막한 단어가 전부였다.

[준비가 끝났으니 즉시 오도록. ― 오르번.]

이해 못 할 편지의 내용에 칼베리안이 눈을 끔뻑였다.

“이제 에단 님을 찾으러 갈 시간입니다.”

헨리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쾅!

허공을 한참동안 비행한 에단이 벽에 처박혔다. 에단의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옘병.”

에단이 사납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카무잔이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재능이 있어.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야.”

“……그것참 더럽게 기분 좋은 소리야.”

에단이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임시 동맹이 결성된 이후, 에단과 카무잔은 아모드라의 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카무잔의 병력은 불러들이지 않았다.

아모드라에게 필요한 것은 대군주에게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인 카무잔이었지, 사사로운 병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주급 되는 자들이 아무리 모여 봤자, 대군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모드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카무잔의 협력을 원하던 것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자는 단둘.

검은 마녀 아리오나와 페온.

페온의 정확한 무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는 정당한 방법으로 대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였다.

아모드라는 페온을 얕잡아 보지 않았다.

대군주의 자리에 오르기 이전에도 죽은 나무의 가지를 꺾고, 대군주들의 눈을 피해 지상으로 도망치는 것까지 성공한 자가 바로 페온이었다.

그런 이가 힘을 얻고 이번엔 대군주의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아모드라는 오만했지만 우둔하지는 않았다.

오만함에 빠져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카무잔이 협력하기로 했다고 안심하기는 일렀다.

아모드라는 페온을 제외하고도 또 다른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에단을 통해서 들은 그 존재.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지만, 상당히 미심쩍은 존재였다.

아리오나와 페온은 숨을 죽인 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모드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둘이 움직일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카무잔은 아모드라의 성에 잔류해 있기로 결정했다.

물론 결정하면서도 아모드라의 속을 긁는 것은 잊지 않았다.

― 뭐, 내가 없으면 쫄려서 잠도 못 잔다는데 어쩔 수 있나? 이거야 원 계집애도 아니고.

― ……불편한 점이 있으면 따로 말하도록.

― 박쥐 새끼 눈에 띄는 게 가장 불편하거든? 빨리 꺼져 줄래?

― 후우…….

에단은 아모드라가 있을 만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단의 요구는 지상으로의 통로를 여는 것이었다.

아모드라의 힘이라면 통로를 여는 것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올라갈 수는 없지.’

아직 페온의 계략을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두 명의 대군주를 만나본 결과, 원작에서 있었던 지하의 침공은 두 대군주와는 상관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원작에서의 침공은 페온이 저지른 일이란 거겠지.’

미심쩍은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추측들보다 그것이 확률이 높았다.

‘크리스토와도 연관이 있나?’

아직 페온과 크리스토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모호했다. 고민해 봐도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했다.

‘아모드라는 룬어에 대해서 무언가 아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아모드라는 에단에게 모든 것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에단은 아모드라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입장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결국 기다려야 되는 상황인가.’

섣부르게 지상으로 올라가려 들면 오히려 지상이 위험해지는 상황이었다.

에단은 가능하다면 지하에서 다른 일들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아모드라의 성에서 지내면서 빈 시간이 생겨났다.

카무잔은 남는 시간을 지루하게 보낼 생각이 없었고,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는 건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수련이라는 명목의 자비 없는 폭행이 시작되었다.

‘지는 건 언제나 좆같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카무잔은 역시 대군주였다.

에단이 목숨을 걸고 아무리 발악해 봤자 카무잔의 몸에 생채기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의미가 없지는 않군.’

에단은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강자와의 실전이었다.

실시간으로 몸이 걸레짝이 되고 있었지만, 아모드라가 안배해 둔 포션을 마시면 어떠한 상처라도 순식간에 회복이 되었다.

‘대체 포션에 뭔 짓거리를 한지는 모르겠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에단은 지금 이 기회가 얼마나 천금 같은지를 알고 있었기에, 불평 따위는 입에 머금지도 않았다.

“카악, 퉤!”

피를 뱉어 낸 에단은 또다시 카무잔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한 방 제대로 먹여 줄 것을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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