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8화] 협조 (1)
“그러니까, 네가 처맞고 뒈지기 전에 와서 좀 살려 달라 그거 아니야?”
카무잔이 삐딱하게 턱을 괸 채 말했다. 시건방진 말투와 건들거리는 태도에 아모드라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해력이 상당히 부족한 모양이군. 지능이 딸리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저열할 줄이야. 녀석들이 방향을 틀어서 너부터 압박하면 어쩔 셈이지? 이건 서로를 위한 협력 관계야.”
“지랄. 나한테 먼저 올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설령 그러더라도 내가 겁먹을 것 같아?”
꿈틀.
아모드라의 뺨이 꿈틀거렸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잡았다.
저런 수준 낮은 도발 따위에 넘어가 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아모드라가 뜨거운 차를 단번에 들이켠 다음 카무잔을 바라봤다.
보석 같은 붉은 동공과 금빛 안광이 교차했다.
아모드라가 에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움을 갈구하는 눈빛이었다.
에단은 귀찮음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왜 이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듣자하니 틀린 말도 아닌데. 대군주는 원래 이렇게 자존심이 강한가?”
“말에 어폐가 있군. 대군주나 돼서 자존심이 없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하네.”
납득이 되는 소리였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건 넘어가고,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 걔네도 머저리가 아닌 이상 슬슬 준비를 할 텐데 말이야.”
“그게 좀 이상하단 말이지.”
아모드라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놈들의 목적이 뭔지 추측 가는 게 있나?”
“……짚이는 게 없지는 않지.”
이쯤 돼서 예상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타이탄.”
에단이 타이탄을 거론하자 아모드라와 카무잔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타이탄이 되고 싶은 건지, 타이탄을 만들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타이탄과 연관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타이탄이라…….”
아모드라가 팔걸이를 두드렸다.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그 왼손. 장갑을 얻게 된 경위도 그자와 연관이 있다고 했지?”
“어. 생각해 보면 그것도 좀 이상했지.”
원작에서도 후반에나 언급될 떡밥을 너무 초창기에 얻고 말았다.
당시에는 깊게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꺼림칙함은 느끼고 있었다.
“어디부터 손을 썼고…… 어디부터 계획하고 있었는지.”
에단이 실소를 터트렸다.
“신나게 놀아난 꼴이군.”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사납게 일그러진 에단의 표정을 바라본 아모드라와 카무잔이 피식 웃었다.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카무잔, 네 말대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솔직해지자고. 나 혼자서는 두 명의 대군주를 상대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야. 안타깝게도 난 너처럼 싸우다 죽는 걸 바라지 않거든.”
아모드라의 새빨간 동공이 카무잔을 응시했다.
“협력을 하지. 네가 원하는 조건은 최대한으로 맞춰 주겠어. 그리고 다른 것도 얘기를 끝내야겠지.”
아모드라가 에단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목걸이를 꺼내라.”
에단은 묵묵히 카무잔의 말에 따라 목걸이를 꺼냈다. 빛이 바래 있는 목걸이였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건 증표다. 죽은 나무를 만나기 위한 증표.”
“그래.”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은 해야겠지.’
아마 페온이 지하로 향한 목적도 죽은 나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정말 타이탄을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생명의 나무와 죽은 나무.
둘의 상관관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기 힘들었지만, 페온이 무언가를 꾸민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로 인해서 계획이 조금 틀어지기는 했겠지만.’
이왕 틀어버린 계획이다. 할 거면 확실하게 산산조각을 내 버릴 생각이었다.
“우리가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잖아? 천천히 기다리자고.”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데.”
카무잔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출했다. 에단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카무잔을 바라봤다.
“기다리기 정 지루하면 내가 좀 도와줄게.”
“도와준다고?”
“전에 한 제안. 기억 안 나?”
“……하하. 이런 영악한 놈을 봤나.”
“그래서 싫다는 소린가?”
“그럴 리가.”
“……둘이 무슨 대화 중이지?”
아모드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혼자만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남자끼리의 뜨거운 대화 중이니 너는 좀 빠져 있지?”
“…….”
아모드라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 * *
블란테는 제국의 제안을 승낙했다.
제국의 주인인 크리스토와 블란테의 주인인 빈센트가 회담에 직접 참여했다.
빈센트가 싸늘한 눈초리로 크리스토를 응시했다. 빈센트가 내뿜는 강렬한 압박 속에서도 크리스토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회담은 제국에서 이뤄졌다.
블란테 측에서는 마치 무력을 행사하듯 상당한 대군을 대동한 채 움직였다.
“좋은 자리인데 상당히 분위기가 무겁군요.”
“글쎄? 난 딱히 동의하지 못하겠군.”
“하하. 그렇습니까?”
크리스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빈센트의 표정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빈센트는 크리스토의 저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렁이 같은 놈.’
크리스토는 속에 수십 마리가 넘는 구렁이를 품고 있는 남자였다.
“뭐, 자리가 불편해 보이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시죠. 저희의 제안은 단순합니다.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맺도록 하죠.”
“누구 마음대로?”
“하하.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좋겠군요. 원인 제공을 제국이 했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아카데미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제국에서 최대한 지원을 해 드리죠.”
“거절한다면?”
빈센트가 눈매를 좁히며 크리스토를 응시했다.
“하하. 뭐 끝까지 가길 원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생각해 보시죠. 블란테가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한들 제국을 집어삼킬 수 있으시겠습니까? 분명 탈이 날 텐데요.”
블란테는 태생이 무력 집단이다.
통치에 걸맞는 부류가 아니었다. 에단 덕분에 아카데미를 삼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제국까지 넘보는 것은 과욕이었다.
수많은 반발과 부작용이 동반될 것이다.
제국은 너무 큰 먹이였다.
블란테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제국을 적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경고였다.
블란테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
블란테와 견줄 수 있는 세력이라는 카이제르는 이번 사건을 통해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대륙에서 블란테의 아성을 넘을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무이한 검술 가문이었다.
“배상금도 부족하지 않게 해 드리죠. 제국의 이미지에는 적잖은 타격을 입게 되겠지만, 겸허히 감수하겠습니다.”
빈센트는 답하지 않고 크리스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패도적인 기세가 공간을 잠식해 나갔다.
크리스토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바다처럼 푸른 동공이 빈센트를 응시했다.
“…….”
빈센트가 눈을 감았다.
아비로서는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할 제의였다. 하지만 무리의 수장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의이기도 했다.
개인의 욕심으로 전쟁을 지속해 나갈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또.’
빈센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형형한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한 가지 묻지.”
“편히 말씀하시죠.”
크리스토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의 본래 목적이 뭐지?”
“……글쎄요.”
크리스토가 엷은 미소를 띤 채 빈센트를 바라봤다. 빈센트의 싸늘한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제국을 주무르고 아카데미를 설립했지. 신성 왕국에서 몰래 꾸미고 있던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좋은 게 아니라는 건 들었다.”
“…….”
“그렇게까지 해서 뭘 얻고자 하는 거지? 충분한 재능과 황제라는 직위. 더 이상 욕심을 부릴 게 남아 있나?”
“…….”
크리스토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특유의 오만하고 여유로운 미소 대신 차갑고 냉막한 무표정이 빈센트에게로 향했다.
“후우…….”
크리스토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쓸쓸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저도 이제는 뭘 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군요.”
* * *
블란테는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모든 이들이 환호했다.
전쟁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귀족이 아닌 평민들이었다.
블란테에서의 여론은 반으로 갈렸다. 더 이상 피를 흘리기 싫어하는 이들과 끝을 보고 싶어 하는 자들.
시간이 흘러 에단의 죽음은 기정사실화되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에단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제 블란테의 후계자로서 남은 자는 카론뿐이었다. 카론에게 접근하는 이가 부쩍 늘었다.
카론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경멸과 혐오감을 느꼈다.
‘박쥐 같은 새끼들.’
모두 자신이 에단에게 패배했을 때 등을 돌린 자들이다. 카론은 저들의 이중성이 역겹게 느껴졌다.
카론은 더욱 훈련에 매진했다.
기사들은 카론의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카론의 재능은 에단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모룬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성실함만큼은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하앗!”
카론이 날카로운 기세로 목검을 찔러 나갔다. 가토는 가볍게 카론의 목검을 쳐내며 몸을 회전시켰다.
휘리릭―!
쾅!
회전력이 더해진 검격.
카론이 몇 발짝 물러나긴 했지만 안정적으로 가토의 검격을 막아 냈다.
가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카론의 검술 실력이 예상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아직 놀라긴 이르지.”
카론이 사납게 웃었다. 그의 얼굴은 에단과 닮아 있었다.
미소를 본 가토가 마주보며 웃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파바바바박―!
화려한 검격이 오갔다.
카론은 본격적으로 블란테의 검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블란테의 검법은 매우 패도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상대가 대처할 겨를을 주지 않는 것이 블란테의 검법이 지닌 성향이었다.
카론의 신체는 부쩍 커졌다.
매일같이 혹독한 훈련을 소화하면서 몸도 근육질로 바뀌었다.
하지만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가토도 마찬가지였다.
가토는 카론의 격렬한 공격을 모조리 흘리고 있었다.
블란테는 검술 명가로서 뛰어난 검법을 수없이 보유하고 있었다.
일정한 수준을 넘어가면 모두 자신만의 길을 깨우친다.
그리고 가토는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검사였다.
가토는 불필요한 동작을 모두 배제한, 침착하면서도 냉정한 검술을 구사했다.
마치 첸이 연상되는 검술이었다.
툭.
가토가 카론의 경로를 비틀었다.
카론은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흐름이 끊기자 수많은 빈틈이 드러나고 말았다.
파박.
찰나의 순간.
가토가 카론의 가슴팍을 연달아 찔렀다.
카론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제기랄.”
쾅!
카론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분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토는 그런 카론의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봤다.
‘……에단 도련님.’
카론은 에단과 닮아 있었다.
에단이 실종된 지도 벌써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이제 에단이 없다는 것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에단이 죽었다 말할지라도 가토는 에단이 살아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꼭 찾아뵙겠습니다.’
오르번은 이미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