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7화] 요구 (3)
“슬슬 도착했겠군.”
아모드라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을 흔들었다. 와인 잔 안에는 맑은 선혈이 표면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상당히 즐거워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나?”
로이드의 물음에 아모드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상당히 재밌는 녀석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
“재미를 느낄 정도의 긴 대화는 나누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독특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독특하다라……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큭큭.
녀석을 떠올리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짧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놈 같은 부류는 처음 봐서 말이야.”
“상당히 호의적이시군요.”
“그럴 수밖에. 이곳은 지금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어. 격변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은 대군주라고 해도 다르지 않지.”
로이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소 아모드라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모드라는 늘 여유를 잃지 않는 오만한 대군주였다.
“……그자가 협상을 성공시킬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확신하지는 않아. 모든 일에는 언제나 변수는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내가 녀석과 협상을 하려고 드는 것보다는 훨씬 높은 확률로 성사될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
로이드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주군이 그 인간 녀석을 생각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어서 놀란 것이다.
로이드는 아모드라의 측근으로서 카무잔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있었다.
카무잔은 협상과는 거리가 매우 먼 인물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호했다.
카무잔은 정말 투쟁만을 통해 대군주의 자리에 오른, 전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협상은 통하지 않는다.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모드라와 카무잔을 제외한 두 대군주가 손을 잡았다는 것이 기정사실화가 되었을 때, 아모드라는 꺼림칙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모드라가 그 세력에 편승하는 것도 방법 중에 하나겠지만, 그 선택지만큼은 피하려고 했다.
‘결국 가장 먼저 내쳐질 게 빤한데 내가 뭐 하러?’
녀석들은 괘씸하게도 아모드라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아모드라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고작 이제 막 대군주의 자리에 오른 애송이와 얼굴도 잘 비추지 않는 음흉한 뱀이 손을 잡았다고 날 우습게 여기는 건가?
두 대군주의 세력과 아모드라가 정면에서 부딪친다면 아모드라의 승산은 희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이 압도적인 우세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곳은 아모드라의 영역이었다. 아모드라는 설령 패배하더라도 저들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힐 자신이 충분했다.
불리하다고 순순히 목을 내어 줄 만큼 아모드라는 무른 사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상처를 입으면 늑대가 피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녀석들도 그것을 모르진 않았을 터.’
에단을 통해 두 대군주가 가진 자신감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괴물이라.’
지상의 인간 놈들이 만든 미지의 존재.
미지의 존재라고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아모드라는 오랜 세월 군림해 온 대군주였다.
‘경계할 필요는 있겠어.’
그것이 타이탄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경계심을 가져야만 했다.
‘자, 과연 어떻게 나올지.’
그 인간 녀석이 카무잔과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모드라는 기다림이 썩 길게 느껴졌다.
* * *
카무잔은 채비를 갖출 것도 없이 여정에 합류했다. 카무잔이 최대한 존재감을 가렸음에도 말들은 극도로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휴고 생각이 나는데.’
문득 휴고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단은 피식 웃으며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잘 지내겠지.’
최대한 빨리 지하에서의 일들을 정리하고 올라갈 생각이었다.
‘이렇게 된 게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어.’
언제 지하의 침공이 시작될지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정면에서 사태와 직면하는 게 나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직 페온의 정확한 목적은 모르지만.’
결국 조만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어떤 사연이 있든 간에.’
뒤통수를 때린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에단은 곱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쯤이면 괜찮나?”
카무잔이 목청을 높이며 손을 흔들었다.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자 말들도 더 이상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여정이 시작되었다.
거칠 것 없이 이동한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모드라의 도시에 도착했다.
에단이 도시의 성벽을 바라봤다.
박쥐 한 마리가 에단 앞으로 다가왔다.
에단은 품에서 아모드라의 문양이 새겨진 증표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성벽의 문이 열렸다.
“너는 먼저 들어가서 얘네 좀 맡겨 놔.”
에단이 말 위에서 내리며 말하자, 네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이번 여정의 목적은 카무잔과의 협상 때문이다.
아직 카무잔은 꽤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카무잔이 조금만 접근해도 말들이 경기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네빌라가 먼저 말 두 필과 함께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네빌라를 보낸 뒤, 에단은 카무잔과 함께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도시 안으로 들어선 카무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천천히 도시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호오…… 이렇게 생겼군.”
“감상이 어때? 그쪽 도시보다는 꽤나 정돈된 느낌인 것 같은데.”
“감상이랄 게 있나. 그냥 죄다 부숴 버리고 싶긴 하군.”
“성격 참.”
에단과 카무잔이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아모드라의 성 앞까지 도착했다.
아모드라의 성 앞에 도착하자, 검은 연기와 함께 로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이드는 에단과 카무잔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히죽거리며 웃던 카무잔이 손을 들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입니다.”
로이드는 난처해 보이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군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재수 없는 낯짝 오랜만에 보게 되겠군.”
“……언행에 주의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의?”
카무잔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서 같잖음과 경멸이 묻어나왔다.
“네가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건 괜찮고?”
콰드드득.
포악한 투기가 퍼져 나간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로이드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의 뺨에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쯧, 빨리 들어나 가자고.”
로이드의 안내에 따라 에단과 카무잔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화려한 문 앞에 도착하자 로이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로이드는 연기처럼 자취를 감췄다.
“재수 없는 놈.”
카무잔이 로이드가 있던 장소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무잔은 거칠 것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 그대로 문을 밀었다.
쾅!
강렬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문이 열렸다. 문 안에는 에단이 겪은 적 있던 짙은 어둠이 가득했다.
“어이, 음침한 박쥐 새끼. 손님이 왔는데 얼굴도 안 비추냐?”
카무잔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손님은 누가 손님이라는 소리지?”
어둠 너머에서 불쾌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르륵.
횃불에 불이 붙으며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긴 복도 끝 옥좌에 아모드라가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정말 성공했군.”
아모드라가 실소를 흘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나를 보고 싶었다고?”
카무잔이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나갔다.
스스스.
카무잔의 투기가 유형화되기 시작했다.
포악한 맹수처럼 영역을 넓히는 투기가 실내를 잠식해 나갔다.
“무식한 건 여전하군.”
아모드라가 경멸스런 눈빛을 보냈다.
그의 주위에서도 붉은기가 감도는 기세가 뿜어져 나와 부딪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두 대군주의 기세가 부딪치자 불꽃이 튀기기 시작했다.
멀리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에단에게도 적잖은 영향력을 끼쳤다.
‘괴물 새끼가 따로 없군.’
에단도 기세를 끌어올렸다.
저 두 명의 기세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여파가 상당했다.
카무잔이 아모드라가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손이 까딱거렸다.
흥분에 젖은 카무잔의 표정을 본 아모드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놈이랑 어떻게 대화할 수 있던 거지?”
아모드라가 에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에단이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나도 쉽지는 않았지.”
“……후우.”
아모드라가 카무잔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싸우는 게 그렇게도 좋더냐? 대군주의 자리에 앉아서까지 싸움을 추구할 정도로?”
“그것 외에 살아 있을 이유가 뭐가 있지?”
“……하.”
허탈한 웃음을 흘린 아모드라가 한기가 흐르는 눈으로 카무잔을 바라봤다.
“……싸우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 텐데?”
“왜? 막상 나를 보니까 겁이 나나?”
카무잔이 이죽거렸다.
들어도 아무런 감흥 없는, 저렴하고 천박한 도발이었다.
“크게 두렵지는 않군. 그래도 여기는 내 성이니 말이야.”
아모드라가 씨익 웃자, 특유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그 정도 핸디캡은 양보해 줄 수 있는데. 어때? 한번 해볼까?”
“진짜 대화하는 게 지치는군.”
아모드라가 지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 녀석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나?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찬 녀석과는 대화하는 게 영 힘들군.”
“어째 귀찮은 건 죄다 떠넘기는 느낌이 드는데?”
후우.
한숨을 내쉰 에단이 카무잔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일단 대화나 좀 해 보지 그래? 여기서 둘이 치고 박고 싸우면 나도 좀 난감해져서 말이야.”
“그런가? 흐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카무잔이 순순히 투기를 거두자 아모드라가 기막힌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중재 좀 해 달라며?”
“아니! 후우…… 됐다.”
아모드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말이 길어져 봤자 자신의 심력만 소비될 게 빤하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일단 자리나 좀 옮기지.”
딱.
아모드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전에 에단과 아모드라가 대화를 나눴던 응접실이었다.
“흠.”
아쉽다는 듯 콧방귀를 뀐 카무잔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가늘게 뜬 아모드라가 카무잔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둘 사이에 감도는 불편한 기류를 바라보던 에단이 피식 웃으며 카무잔 곁에 앉았다.
“……둘 사이가 꽤나 좋아 보이는데?”
아모드라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카무잔과 에단이 서로를 슬쩍 마주 보며 말했다.
“예상외로 꽤나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딱히 권위적이지도 않더라고.”
“동감이군. 너 같이 재수 없는 박쥐 새끼보다는 이 친구가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지.”
에단과 카무잔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모드라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