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화] 요구 (1)
카무잔의 안내로 에단과 네빌라는 자리를 옮겼다.
아직 완전히 몸을 회복하지 못한 에단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비틀거리는 에단을 네빌라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괜찮은 건가?”
“보면 몰라? 뒈지기 직전이야.”
농담 섞인 에단의 어조에 네빌라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직 덜 맞았나 보군.”
“방금 말은 진짜 좀 열 받는데?”
“열 받으라고 한 소리 맞으니 다행이야.”
에단과 네빌라가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자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래 뭐…… 거기서 살 수는 없었으니까.’
에단이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대군주쯤 되는 이가 제대로 된 집 하나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들어가지.”
카무잔이 거대한 저택의 문을 툭 건드리자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사용인이나 병사는 따로 없나?”
거대한 저택답게 정원의 규모도 상당했다.
관리도 상당히 잘된 모습이었지만 마주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저택은 관리하는 관리자는 몇 명 있어.”
“경호 인력은?”
“그런 게 왜 필요하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카무잔의 표정.
“내가 생각이 짧았군.”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대군주의 저택을 노린단 말인가.
‘이 녀석이라면 그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어.’
에단은 카무잔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권력이나 권위 따위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도시 중심에 있던 성을 폐허로 놔둔 것만 봐도 카무잔의 성향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가 있었다.
“쩝. 저택을 비워 두면 도전하는 녀석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요즘 애들은 영 글러 먹었어.”
카무잔이 복도를 걸으며 투덜거렸다.
‘손가락 하나로 부하를 지워 버리는 놈한테 도전할 정신 나간 새끼가 어딨어?’
에단은 황당함을 삼켰다.
네빌라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도 에단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카, 카무잔 님?”
한참이 지나서야 저택의 관리인으로 보이는 이를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관리인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응? 뭐가 죄송하지?”
카무잔이 눈을 끔뻑였다.
카무잔은 농담을 하거나 질타를 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저분들은……?”
관리인이 에단과 네빌라를 힐긋거렸다.
“내 손님이다. 뭐, 술이라도 마실 텐가?”
“보통은 이럴 때 차를 권하는 게 정상이지 않아?”
“내가 살면서 딱히 차를 마셔본 적이 없군.”
“그럴 거 같았어. 아무거나 줘.”
“그래. 그럼 준비 좀 해 주겠나?”
“네, 넵! 소, 손님이라니…….”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카무잔과 함께해 온 관리인은 카무잔이 손님을 초대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관리인은 어디론가 향해 다급하게 사라졌다.
응접실로 향한 카무잔은 자리에 앉았다.
저택은 깔끔한 편이었지만, 응접실을 잘 사용하지 않았는지 군데군데에 먼지가 소복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카무잔이 권하기도 전에 에단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네빌라는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진짜…… 이 녀석은 제정신인 건가?’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강짜를 부릴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건 카무잔이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는 것이다.
“뭐 해? 앉지 않고.”
에단이 네빌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빌라가 입술을 꽉 깨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카무잔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부 사이인가?”
“……아, 아닙니다.”
네빌라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해명했다.
“너무 단칼에 자르니까 좀 서운한데.”
“그, 그게 지금 무슨……!”
“농담도 못 해?”
“…….”
네빌라가 이를 빠득 갈며 에단을 노려봤다.
어깨를 으쓱거린 에단이 카무잔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저택에는 자주 안 들어오나 봐?”
“여기에 처박혀 있으면 좀이 쑤셔서.”
“그럴 것 같긴하네.”
가뜩이나 지하의 환경은 사람을 축 쳐지게 만들었다.
흐릿한 날씨와 건조한 공기.
탁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했다.
“대군주의 자리를 차지하면 쓸 만한 녀석들이 도전해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카무잔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전자가 없나보지?”
“처음부터 없진 않았어. 몇몇 시원찮은 녀석들이 오긴 했지만 실력도 뭣도 없었지.”
“걔네도 전처럼 지워 버렸나?”
“글쎄?”
카무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저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패배한 이에게는 한줌의 관심도 남기지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네가 처음이었어.”
“뭐가?”
카무잔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를 즐겁게 해 준 녀석이.”
“그거 참…… 더럽게 영광이네. 죙일 얻어터지기만 했는데 그런 극찬이라니.”
“아직 좀 아쉽긴 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니까. 그런 의미에서 어때? 여기서 나랑 지내는 건.”
“……!”
카무잔의 제안에 놀란 건 에단이 아니라 네빌라였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에단을 바라봤다.
대군주의 제안.
그것도 다른 대군주와 다른 순수한 전사라고 할 수 있는 카무잔의 제의였다.
네빌라는 카무잔의 저 말이 대체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지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갑자기 청혼을 당한 기분이군.”
“하하. 결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제안은 고맙지만 아쉽게도 거절해야겠어. 나한테는 시간이 없거든.”
에단이 단칼에 거절했다.
카무잔의 제안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카무잔은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자였다.
‘여기서 지내면서 하루 종일 치고 박자는 소리겠지.’
수하로서 에단을 들이고 싶은 게 아닌, 매일같이 대련을 할 스파링 파트너를 원하고 있었다.
성장은 보장될 것이다.
강자와의 훈련이다. 카무잔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에단이 성장하기를 원할 것이고, 호적수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생활도 편해지겠네.’
대군주의 직계 제자와 같은 포지션이니 감히 에단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자 또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에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시간이 없다라…… 이유를 좀 듣고 싶은데.”
“조금 길어질 텐데 상관없겠어?”
“남는 게 시간 아니겠나?”
카무잔이 씨익 웃자, 에단도 따라 웃었다.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며 관리인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작은 손수레 같은 것을 끌고 왔는데, 수레 위에는 커다란 술병들과 술잔들이 가득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딱 좋을 때 왔어. 따로 안주는 필요한가?”
“내 얘기가 안주가 될 텐데.”
“하하하. 그거 기대가 되는군.”
카무잔이 호탕하게 웃었고, 네빌라는 불안에 떨며 연신 눈치를 살폈다.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관리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자, 한잔 따라 주지.”
카무잔이 에단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알싸하면서도 은은한 향취가 넓게 퍼져 나간다. 색깔과 냄새만 보더라도 좋은 술인 게 느껴졌다.
에단이 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영롱한 액체를 바라봤다.
‘대군주한테 술도 받아 보네.’
어떻게 보면 대단한 영광이었다.
지하에서 대군주의 지위는 지상의 황제보다도 높았으니.
“그쪽도 한잔 받지.”
카무잔이 들고 있던 술병이 네빌라에게 향하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잔을 들었다.
나름 침착함과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잔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네빌라가 수치심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던 카무잔이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네빌라의 잔에 술을 모두 따른 카무잔은 자신의 잔에 남은 술을 따르기 시작하며 말했다.
“이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도록 할까?”
카무잔이 에단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렇게 부담 주지 말라고.”
피식 웃은 에단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단의 이야기는 길었다. 물론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모두 배제시켰다.
책 속에 들어왔다는 둥, 쓸데없는 얘기까지 주절거릴 필요는 없었다.
에단은 내용을 적당히 각색했다.
선수 시절 해오던 마이크 워크나 파랑새를 통한 스토리텔링이 꽤나 도움이 되었는지, 이야기를 재밌게 꾸며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래 내 몸이 어땠는지 아나?”
에단이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설명했다.
“정확히 지금보다 두 배였지.”
“그 정도로 근육질이었나?”
카무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에단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소리야?”
“진심으로 묻는 소린데?”
에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방덩어리로 지금보다 두 배였어. 심지어 그때는 키도 작았지.”
“……그게 정말이야?”
네빌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지금의 에단은 조각같은 몸을 지니고 있었다.
평생을 전사로서 단련해 온 그녀는 에단의 몸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보통 혹독한 훈련이 아니고서야, 지금 에단의 몸을 얻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군살 하나 없어보이는 몸이 과거에는 지방 덩어리였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사람 말을 안 믿네. 더 놀라운 것도 말해 줄까? 내가 원래 지역에서 유명한 망나니였어. 내가 마을에만 내려가면 다들 겁에 질릴 정도로…….”
“흠, 그건 그럴 수 있겠군.”
“……?”
“네가 나태한 돼지였다는 건 전혀 연상되지 않지만 쓰레기 같은 망나니 새끼였다는 건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크흠. 뭐, 일단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책 속에 빙의했다는 얘기는 거론하지 않은 채 다른 계기를 만들어냈다.
“동생한테 얻어터진 후 거울을 보니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더군. 그때부터 나는 달라지겠다고 결심했어. 당연히 쉽지는 않았지. 몸이 어찌나 무겁던지 걷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꼴에 몸뚱이 자체는 쓸 만했는지 뭐 빠지게 뛰어도 관절은 멀쩡하더라?”
에단이 피식 웃으며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설명해 나갔다.
아직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지만, 에단 특유의 말솜씨와 지상의 얘기라는 특수성 때문에 카무잔과 네빌라는 에단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처음 어느 정도 살을 빼고, 나를 후드려 팼던 동생을 만났지.”
“오, 그래서 어떻게 했지?”
에단이 카론을 처음 후드려 팬 이야기를 할 때 카무잔과 네빌라는 마치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 이후에 지나가다가 하인 한 명을 만났는데 말이야. 녀석이 어딘가 심상치 않더라고.”
“어떤 점이 눈에 띄었지?”
에단은 휴고의 대해서 꽤나 자세하게 설명했다. 카무잔이 관심 어린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웨어울프의 피가 섞여 있던 모양이야.”
“오, 그게 정말인가? 지상에도 웨어울프가 있나 보군.”
“그래. 지하의 있는 녀석들이랑 비교하면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내가 키우는 녀석은 꽤나 쓸 만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여 주도록 하지.”
에단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휴고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