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344화 (344/398)

◈ [344화] 대군주 카무잔 (4)

강렬한 반발력.

카무잔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이걸 견뎌?’

커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기대 이상으로 재밌는 녀석이었다.

한 번의 공격을 무마했을 뿐, 카무잔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반면 에단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타이탄의 힘으로 보호받는 것은 왼손뿐이다.

에단의 왼손과 카무잔의 주먹이 맞닿는 순간.

팔꿈치와 어깻죽지가 그대로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다.

에단은 고통을 억눌렀다. 이 정도 충격쯤은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징징거릴 생각은 없었다.

‘떨어지면 붙이면 그만이지.’

사납게 웃은 에단이 크게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카무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에단의 행동을 지켜봤다.

에단이 손을 뻗는다.

[절망]

짧은 순간 내뱉은 룬어.

검은 안개가 세력을 확장하자 칠흑 같은 어둠이 일대를 잠식해 나갔다.

기이하면서도 사특한 언어.

카무잔의 이마에 핏줄이 툭하고 불거졌다.

생각보다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이 감각은 좋지 않다.

꿈틀.

카무잔의 투기가 피어오른다.

검은 먹물처럼 번지기 시작한 어둠을 카무잔의 투기가 밀어냈다.

카무잔에게서 비롯된 강렬한 기운이 [절망]을 밀어낸다.

‘궁금한데.’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운.

본능이 외치는 꺼림칙함과 불길함.

고민하던 카무잔이 투기를 거뒀다.

속절없이 밀려나던 어둠은 금세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카무잔은 저항하지 않고, 어둠을 받아들였다. 순전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검은 돔이 카무잔을 집어삼키자 예민한 감각이 흐릿해진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모든 감각이 뒤죽박죽이다.

“오.”

카무잔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묘하면서 신선한 감각이었다.

입으로 내뱉은 소리조차 무언가에 의해 빨려 가는 기분.

에단은 카무잔에게 다가갔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기술들이 떠올랐다.

‘뭐, 통할 만한 게 없네.’

실소를 터트린 에단이 터덜터덜 걸어가서 카무잔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툭 하고 때렸다.

“한 방 먹인 거다.”

메마른 웃음을 흘린 에단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거라도 쓸까 했는데.’

페온이 보여 준 비기.

완벽한 구사는 아닐지라도 에단은 그것을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이미 몸은 너덜너덜했고, 체력은 한계치에 다다랐다.

이윽고 룬어가 해제되자 어둠이 걷히고, 흐릿한 하늘이 드러났다.

“옘병할.”

에단이 헛웃음을 흘렸다.

왼팔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질 때 지더라도 제대로 한 방 먹일 생각이었는데 역시 쉽지 않았다.

카무잔이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바라봤다.

주저앉은 채 숨을 헐떡이는 에단과 카무잔의 눈이 마주쳤다.

“더럽게 세네.”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투덜거리는 말투에 카무잔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재밌었다.”

“그럼 됐지 뭐.”

피식 웃은 에단이 대자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카무잔의 잘난 척이 영 아니꼬웠지만, 진 건 진 거였다. 에단은 깔끔하게 결과에 승복했다.

짙은 피로감이 엄습해 왔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에 빠질 것 같았다.

“후우.”

한숨을 내쉰 에단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카무잔은 여전히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눈빛이었지만, 티끌 하나 없이 맑고 순수한 눈빛이었다.

“이제 만족이 좀 되나?”

카무잔은 대답 대신 웃었다.

에단은 그 미소의 뜻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 *

에단이 대군주를 만나러 간 이후.

네빌라는 저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강렬한 존재감.

아모드라 때에도 느꼈던 무력감이 또다시 느껴졌다.

네빌라가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근원적인 공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결국은 모두 살기 위해 발악할 뿐이다.

네빌라가 공포를 이겨 내기 위해 했던 모든 행위가 의미를 잃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네빌라는 공포를 이겨 내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대군주와 싸운다고?’

네빌라가 푹 숙였던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그녀는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녀를 집어삼킨 공포가 걷히고, 이성이 돌아왔다.

에단은 지금 대군주와 싸우고 있었다.

마나의 충돌과 포악한 투기가 선명하게 전해진다.

‘마, 말려야 돼.’

네빌라가 몸을 일으켰다.

에단이 강하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에단을 보고 있으면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에단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군주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아모드라를 찾아갔을 때도 네빌라는 얼어붙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그는 당당하게 아모드라와 마주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네빌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살아가던 좁고 작은 세상은 무너졌다.

세상은 넓었다.

네빌라는 전사들 사이에서 인정받았다.

마을과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전사장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자만심이나 오만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네빌라는 훈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의 대한 평가는 늘 엄격했다.

그게 전사들을 이끄는 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했다.

자만하지는 않았지만 전사로서의 자긍심은 가지고 있었다.

전사는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공포를 이겨 내는 자가 진정한 전사였다.

마을과 형제를 지키기 위해 칼에 피를 묻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고, 승산이 희박하다고 한들 그녀가 해야 할 의무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기는 싸움만 좇을 수는 없다.

그녀는 공포를 마주하고 검을 들어야 했다.

그게 바로 전사였다.

‘근데 지금 꼴은 대체 뭐냐.’

네빌라가 이를 갈았다.

빚을 갚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한 것이라고는 겁에 질린 채 벌벌 떠는 것뿐이었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막강한 존재감.

그녀의 자긍심과 용기는 무너져 내렸다.

대적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의 격차.

하지만 에단은 그런 상황에서조차 물러서지 않았고, 부러지지 않았다.

에단을 보고 있으면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에단은 홀로 대군주를 찾아갔다. 네빌라는 안전한 곳에 숨어 에단의 용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게 과연 네빌라가 원하던 전사의 모습인가?

수치심과 자괴감이 치밀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네빌라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키이잉.

그녀가 검을 뽑았다.

정신이 아찔하고 숨이 턱턱 막히고 있었지만,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엄청난 압박감이 휘몰아치며 그녀의 몸을 난도질했다.

네빌라가 이를 악물었다. 죽더라도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 네빌라는 카무잔과 에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투는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카무잔과 에단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네 일행인가?”

카무잔의 시선이 네빌라에게로 향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쟤는 또 왜 왔대. 내 일행 맞아.”

피식 웃은 에단이 대답했다.

네빌라의 파리한 안색을 보아하니 고생을 꽤나 한 모양이다.

파밧.

그 순간 한 신형이 튀어 나갔다. 갑작스레 개입하는 존재감을 느낀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기랄.’

반응이 늦었다.

지금 에단의 몸은 엉망이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민한 반응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무언가가 네빌라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에단이 뒤늦게 쫓으려고 들었다. 하지만 카무잔이 먼저였다.

스윽.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카무잔의 모습이 사라졌다.

쿵.

카무잔이 네빌라 앞에 섰다. 그는 손가락 하나로 거대한 양날 도끼를 가볍게 막아 냈다.

“뭐 하는 짓이지?”

카무잔이 차게 식은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위험한 자들입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지랄이야.”

카무잔이 코웃음을 쳤다.

툭.

손가락을 가볍게 밀어내자 양날 도끼를 휘두르던 전사가 허공을 날았다.

거칠게 튕겨져 나간 전사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카무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아, 아닙니다.”

“아니야. 이건 순전히 내 실수야. 그동안 너무 풀어 뒀던 거 같네.”

뚝. 뚜둑.

즐겁던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카무잔은 지금 꽤나 심기가 좋지 않았다.

카무잔이 뼈 소리를 내며 목을 풀었다. 그가 천천히 자신의 수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왜 뜬금없이 안 하던 짓을 하지?”

카무잔의 부하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 하나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아모드라는 경계해야 하는…….”

“자꾸 좆같은 소리를 하네.”

카무잔의 눈매가 좁혀졌다. 기분이 매우 안 좋아졌다.

사나운 살기가 넘실거린다. 대군주의 살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흉악한 무기였다.

덜덜덜.

부하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했다. 녀석이 정확히 무슨 의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관심도 없었다.

부하가 행한 게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이든 뭐든,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고 불쾌하게 한 것이 중요했다.

카무잔이 손을 들었다. 부하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가 들고 있던 무기를 놓고 무릎을 꿇으려던 순간.

카무잔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그 위력은 이전보다 압도적이었다.

콰앙―!

강한 돌풍이 휘몰아쳤다.

부하의 몸이 흔적조차 없이 증발했다. 그는 죽으면서 살점이나 핏자국 하나조차 남기지 못했다.

“쯧.”

카무잔이 혀를 찼다.

부하를 처리했음에도 짜증이 가시지 않았다.

“이거 면목이 없군.”

카무잔이 몸을 돌려 에단에게 돌아갔다.

방금의 모습으로 에단은 카무잔이 대군주라는 사실을 복기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 판단했군.’

순수함이 선량함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카무잔은 순수한 전사였지만, 잔혹한 대군주이기도 했다.

에단은 카무잔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얼마나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방금 카무잔이 죽인 부하의 경지는 최소 마스터 이상의 강자였다.

그런 자를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서 죽였다. 마치 눈에 거슬리는 벌레를 잡듯이.

부하를 죽인 카무잔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나 씁쓸함 따위의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아직 기분이 나아지지 않은 것인지 이마에 선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카무잔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흐음…… 뭐, 말뿐인 사과는 나도 싫어하니 부탁을 하나 들어주지.”

“오.”

에단이 감탄사를 흘렸다. 생각보다 보상이 후했다.

대군주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게 되다니.

‘어떻게 일은 무사히 끝낼 수 있겠군.’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자 카무잔도 그제야 미소 지었다.

“일단 자리부터 좀 옮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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