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341화 (341/398)

◈ [341화] 대군주 카무잔 (1)

지루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상인과 부하들은 모두 로이드가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손짓 한 번에 그 많은 인원의 시체들이 증발하는 광경은 상당히 진귀했다.

에단과 네빌라의 안내는 로이드가 건넨 박쥐가 대신했다. 작은 박쥐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길을 안내했다.

‘이건 또 신선한 기분이군.’

살다 보니 박쥐한테 길을 안내받는 경험도 할 줄이야. 에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슬슬 말 좀 해 주지 그래?”

네빌라가 짜증 어린 눈빛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갑작스러운 일들에 끌려다니는 것도 한두 번이면 족했다.

“아, 별건 아니고…….”

에단이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사건의 경위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네빌라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

“별거 없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네빌라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둘은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 간의 거리는 상당했기에 조급함을 느끼기보다는 여유로움을 가져야 했다.

“지루하군.”

에단이 모닥불 앞에서 육포를 질겅이며 말했다.

말들도 물과 고기를 뜯고 있었다.

육식을 하는 말이라…….

슬슬 적응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배부른 소리야.”

에단의 맞은편에서 육포를 씹는 네빌라가 삭막하게 대꾸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지루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배부른 소리였다.

‘녀석은 어떠려나.’

대군주 카무잔.

아모드라를 만나면서 대군주가 가진 힘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지하에서 대군주가 가지는 입지와 위세가 신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라는 말이 과장인줄 알았다.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군.’

실제로 대면한 대군주의 기세는 에단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드래곤을 앞에 두고도 얼어붙지 않던 에단이었지만, 아모드라 앞에서는 몸이 찢기는 듯한 경험을 했었다.

같은 대군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만큼 카무잔도 아모드라에게 뒤지지 않는 힘을 지녔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에단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늘 최강의 자리에 앉아 있던 에단에게는 낯설면서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파닥파닥.

날개를 파닥이는 박쥐가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에단은 혹시나 싶어 육포 조각을 조금 뜯어 휙 하고 던지니 박쥐가 날렵하게 받아먹었다.

“……신기하네.”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금 지루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지하의 모든 대륙을 돌아본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비춰본다면 비옥한 땅은 극히 일부였다.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곧바로 다시 황량한 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 참.’

에단이 헛웃음음을 지었다.

지하도 지상과 마찬가지로 힘이 있어야지만 좋은 땅을 얻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낮과 밤의 경계가 없는 터라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에단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로가 쌓이면서 말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네빌라와 주고받던 시시콜콜한 농담들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멀리서 목적지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성벽.

에단이 눈매를 좁히며 정면에 있는 성벽을 바라봤다.

“저곳인가?”

성벽을 지그시 바라보던 에단이 박쥐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박쥐는 대답하듯이 날개를 파닥였다.

파닥파닥.

박쥐가 지나온 길을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할 일이 끝나자 복귀하는 것 같았다.

에단과 네빌라는 멀어지는 박쥐를 잠시 바라보다 성벽을 향해 다가갔다.

도시의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성벽은 높고도 웅장했다.

아모드라의 도시인 록스의 성벽과 비견해도 그 위용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관리 상태가 정말 형편없었다.

에단이 눈살을 찌푸리며 성벽을 훑어봤다.

군데군데 깨지고 금이 간 성벽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고 있었다.

성벽은 그야말로 완전히 방치된 모습이었다.

“버려진 성벽을 보는 것 같군.”

“…….”

버려진 성벽을 본 적이 없는 네빌라는 공감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말없이 성벽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멈춰라.”

거칠고 낮은 목소리와 함께, 지진이 난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에단과 네빌라의 말이 놀라서 앞발을 치켜들었다.

“무, 무슨 일이지?”

당황한 네빌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말 위에서 내린 에단이 성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성문 앞 바닥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바닥에서 치솟기 시작한 거대한 덩치의 남자.

일반적인 기준의 덩치를 아득히 뛰어넘은, 그야말로 거인이라고 불릴 법한 남자였다.

흙바닥에서 치솟은 거인을 바라보던 에단이 묘한 감상을 느꼈다.

‘비슷한 녀석이 있었지.’

아카데미에 처음 입성할 때 에단의 앞을 가로막은 녀석도 이만한 덩치의 거인이었다.

“……너, 누구냐.”

잠시 상념에 젖어 있던 에단을 향해 흉흉한 시선을 보내던 거인이 물었다.

“아, 미안.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고. 이상한 놈들은 아니고 용무가 있어서 왔어.”

“……용무? 그게 무슨 뜻이지?”

거인을 바라보던 에단이 기막힌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혹시 단어가 어려워서 이해를 못 하는 거냐?”

“……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거인의 일그러지는 얼굴. 한눈에 봐도 분개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표정에 에단이 실소를 터트렸다.

“무시는 아니고. 그냥 음…… 너네 대장 만나러 왔다고. 카무잔? 걔 좀 보자.”

“……!”

거인의 눈이 터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심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길 좀 비켜 주지? 나도 좀 바쁜 몸이라.”

거인의 동공이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슬픈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들어가라.”

“오, 고마워.”

흔쾌히 길을 비켜 주는 거인의 모습에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이 애달픈 눈빛으로 성문을 지나가는 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손가락을 빨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안쓰러워 보였다.

에단은 거인의 눈빛을 무시한 채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

도시 안에 입성한 네빌라가 침음을 흘렸다.

성벽을 보면서 느낀 감상을 도시 안에서도 똑같이 느낀 것이다.

카무잔의 도시는…… 엉망이었다.

아모드라의 도시를 겪은 후라 더 많이 비교되고 체감되었다.

도시의 관리나 보수는커녕 약탈당한 직후의 모습처럼 보였다.

에단이 천천히 도시를 둘러봤다.

엉망인 도시 상태. 곳곳에서 벌어지는 싸움들.

일반적인 취객들의 주먹다짐이 아니었다.

싸움을 벌이는 자들은 모두 흉측한 무기를 꺼내 들고 죽일 듯이 싸우고 있었다.

‘야만인의 도시를 온 기분이군.’

이곳 역시 심상치 않은 기운들이 느껴졌다. 군데군데 벌어지는 이들의 싸움조차도 수준이 매우 높았다.

지상의 경지로 따진다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 저렇게 무식하게 싸우고 있었다.

‘카무잔은…… 굳이 찾지 않아도 어디 있는지 알 것 같군.’

도시에 들어선 순간부터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세.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강렬하면서도 폭력적인 기운.

대군주라는 직위에 걸맞은 포악한 지배자의 힘이었다.

부르르.

네빌라가 가늘게 몸을 떨며 에단을 바라봤다.

“이, 이건…….”

“그래. 힘들 게 찾지 않아도 되겠네.”

에단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빌라는 그런 에단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압도적인 기운을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평생을 동료들과 형제들을 위해 칼을 들어온 네빌라조차 견디기 힘든 기세 속에서도 에단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덜덜덜.

타고 있는 말들이 거칠게 몸을 떨자 에단과 네빌라는 말에서 내렸다.

“너는 얘네랑 여기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

“하지만…….”

“걔네들을 두고 갈 수는 없잖아?”

“…….”

네빌라가 자괴감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에단은 피식 웃으며 네빌라를 뒤로한 채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기운이 거세진다.

머리털과 함께 전신의 털들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호흡이 낮아지고 근육이 잠에서 깨어난다.

에단의 몸은 이미 전투에 들어설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에단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검은 기운이 에단의 주위에서 타오르듯 피어올랐다.

드래곤의 피어와 뒤섞인 에단의 기운.

이 또한 대단히 포악하고 폭력적인 힘이었다.

에단이 발을 옮겼다.

도시의 중앙에 있는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들.

무너져 내린 폐허의 중심에는 옥좌가 하나 있었고, 그 옥좌에 앉아 있는 거만한 표정의 남자가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긴 은발과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 유려한 외모.

언뜻 보면 잘생긴 미청년이라고 느낄 법한 외모였지만, 황금색으로 빛나는 동공에서는 그가 얼마나 포악하고 압도적인 우두머린지가 느껴졌다.

‘저 녀석이 카무잔.’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아모드라와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기세의 소유자가 대군주가 아니면 대체 뭐겠는가.

어깨를 짓누르는 기세.

다가갈 때마다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에단은 고통을 참아 내며 카무잔을 향해 다가갔다.

카무잔은 처음과 다름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무심한 눈길로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이한 놈이군.”

가만히 에단을 바라보던 카무잔이 말했다.

카무잔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질리도록 듣던 말이라 에단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자주 듣는 말이야.”

이제는 조금 식상할 정도로 자주.

피식.

에단의 반응에 카무잔 또한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무잔이 송곳니를 살짝 드러냈다.

크릉.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살기가 에단을 덮쳤다.

마치 수백 마리의 거대한 맹수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감각이었다.

에단은 반사적으로 칼자루 위에 손을 얹었고, 카무잔은 언제 살기를 방출했냐는 듯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제 더러운 냄새는 좀 사라졌군.”

“……더러운 냄새?”

에단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묻자, 카무잔미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뱀파이어의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들어온 이후부터 더러운 피 냄새가 진동하더군.”

“아…… 그것 때문인가.”

수긍한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아모드라의 부하인가?”

카무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지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는 것뿐이었지만, 심장을 쥐어뜯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에단은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꾸했다.

“부하는 아니고…… 협력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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