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화] 목적 (2)
에단이 도시를 떠나기 전의 아모드라의 궁전.
아모드라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머금었다. 고요하면서도 폭력적인 시선이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아모드라의 입에서 부드러운 미성이 흘러나왔다.
“조건이라 하면?”
“나 혼자서 리스크를 짊어질 수는 없지. 카무잔 그 무식한 새끼가 뭐 때문에 나를 적대하고 있는지, 가서 이유를 알아 와. 협력을 할 수 있게끔 만들면 더 좋고.”
“…….”
에단이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아모드라는 지금 또 다른 군주의 협력을 따내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산 넘어 산이네.’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쉽게 가는 일이 없었다.
거부할 수도 없는 제안이었다. 솔직히 지금 에단의 제안이 아모드라에게 메리트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승산이 희박한 쪽에 배팅하지 않겠다는 건가.’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결과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성공하는 게 좋을 거야. 그곳에서 실패하면 죽을 테니까.”
“초 치지 말지?”
“하하.”
아모드라와 에단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아, 부탁이 아직 남아 있는데.”
“……또 뭔데?”
“별건 아니고, 최근 도시의 물을 흐리는 놈들이 있어서.”
“벌써부터 귀찮을 것 같은데.”
“겸사겸사 해결할 만한 일이니 그러지 말라고. 내 수하들을 보내도 되지만 이미 내 수하들은 얼굴이 모두 팔린 상태라서 말이야.”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지.”
이성을 잃은 웨어울프가 지하도에 출몰했다.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사태일 확률은 없었다. 필히 협력자와 주동자가 있을 터.
“웨어울프를 풀은 걸로 추정되는 놈들이 최근 도시를 빠져나갔다고 하더군. 확실한 증거로 삼으면 협상에서 꽤나 유리하지 않겠어?”
아모드라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인상을 찡그린 에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놈들은 지금 어디 있는데?”
* * *
스르륵.
가죽 주머니의 마개가 열리며 한 줄기의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피는 아모드라의 주위를 맴돌다가 그가 들고 있던 와인 잔에 담기기 시작했다.
아모드라가 와인 잔에 담긴 피를 천천히 흔들었다. 바실리스크의 피는 아모드라한테도 상당히 귀한 것이었다.
천천히 향을 음미하던 아모드라가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음, 역시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아모드라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큭큭.’
바실리스크의 피를 음미하던 아모드라가 웃음을 흘렸다. 문득 에단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재밌고 맹랑한 녀석이었다.
막강한 힘과 권세를 누리는 군주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 앞에서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인간 놈은 끝까지 기가 꺾이지 않았다.
조금 진심으로 살기를 방출해 봤지만 격렬하게 저항할 뿐, 녀석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가능할 수도 있겠어.’
확률은 희박했다.
자신과 앙숙이라고 할 수 있는 카무잔 그놈은 협상이라는 단어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쭙잖은 객기를 부리다가는 한순간에 불귀의 객이 될 것이다.
‘결과에 따라서.’
지금까지의 상황은 얼마든지 뒤집질 수 있었다.
아모드라는 지금 이 상황이 썩 즐거웠다.
* * *
로베로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너무 황당한 나머지 순간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눈을 끔뻑이며 에단과 네빌라를 번갈아 바라보던 로베로가 대뜸 웃기 시작했다.
“큭큭큭큭큭. 아, 그런 거였나?”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 그랬다면 말이 되지.
“둘이 그런 사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돼. 물론 용서해 준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말이야.”
로베로의 혀가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에단과 네빌라는 생리적인 혐오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 새끼는 계속 뭐라는 거야…….”
에단이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더 이상 저 음탕한 눈길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시궁창에 몸을 담근 것 같은 불결함과 찝찝함에 휩싸였다.
에단의 행동이 되도 않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는지, 로베로가 손짓했다.
그러자 호위병들이 에단과 네빌라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사과한들 이미 늦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아, 그렇다고 쉽게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크르르.
로베로가 재차 손짓하자 호위병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야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에단에게는 낯설지 않은 기운이었다.
“뭐…… 이 정도면 증거로는 충분하겠지.”
큭큭 거리며 웃은 에단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소를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베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대군주 아모드라를 상징하는 증표가 에단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증표를 흔들었다. 이건 곧 신분과도 같았다.
“이제 좀 정신을 차리겠냐?”
에단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에단의 목소리는 로베로의 귀에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로베로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 손에 들려 있는 아모드라의 증표.
‘덜미가 잡혔나?’
만일 그랬다면 도시에서 이미 붙잡혔을 것이다.
‘뭐가 됐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로베로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에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주 끝까지 매를 버네.”
“전부 죽여!”
로베로의 말이 끝나기 전에 에단이 먼저 달려들었다.
호위병들의 골격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뒤틀리고 있었다. 몸집이 비대해지며 더욱 흉악한 외향으로 돌변하게 됐다.
에단은 그것을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았다.
뻐억!
에단의 발이 호위병의 복부에 꽂혔다. 상체가 젖혀지는 순간 에단의 주먹이 녀석의 턱에 꽂혔다.
우지끈.
턱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즉사했다.
에단이 손에 묻은 잔해와 오물들을 털어 내며 사납게 웃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빨리 끝내자고.”
교전이 시작되자 에단은 살기를 넓게 퍼트렸다.
드래곤의 피어와 뒤섞인 포악한 살기가 일대를 집어삼켰다. 거친 야성을 흘리며 달려들던 호위병들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에단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뽑았다.
현재의 아슬란은 단순한 날붙이에 불과하지만, 이 녀석들을 상대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에단이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거칠고 우악스러운 검격이 호위병들의 두꺼운 뼈와 가죽을 끊어 내고 목을 잘랐다.
에단의 안광이 번뜩였다. 녀석들이 점차 살기에 적응하고 있었다.
‘어쭈.’
일이 귀찮아지지 않으려면 녀석들이 완전히 적응하기 전에 모두 끝내야만 했다. 에단이 바쁘게 움직였다.
에단이 있던 장소에 흐릿한 잔상이 남자, 노려보던 호위병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딜 보냐?”
그때 한 호위병의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지만 이미 그의 목은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에단은 완전히 적진을 헤집고 있었다.
네빌라도 뒤늦게 싸움터에 합류했다. 그녀도 칼을 뽑아 들고 적들을 베기 시작했다.
에단의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지만, 그녀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네빌라는 홀로 다수의 호위병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전세가 순식간에 기울었다. 호위병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야수화 따위로는 에단을 막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로베로의 입이 벌어졌다. 여기서 놈들을 죽여 입막음을 하고 도주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내, 내가 잘못 판단했어.’
이 녀석들은 죽여서 입막음을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죽기 싫어.’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오기 시작한다. 벌써 열이 넘는 호위병이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로베로는 저런 꼴이 되어 죽고 싶지 않았다.
로베로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치를 살피다 몸을 돌려 내달렸다.
뒤뚱뒤뚱.
로베로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한창 싸우고 있던 에단이 도망치는 로베로를 바라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저 새끼 지금 어디 가냐?”
“…….”
에단과 치열하게 싸우던 호위병들도 순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로베로를 바라봤다.
“허탈하지 않냐?”
“…….”
호위병들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만큼은 동료를 죽인 에단보다 로베로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기다려 봐.”
타닷.
지면을 박차며 달려 나간 에단이 순식간에 로베로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
“히, 히익!”
로베로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비대한 지방이 와들와들하며 떨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우스웠다.
“온갖 허세는 다 처부리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김빠지게.”
에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가자 로베로가 뒤로 물러났다.
“사, 살려줘. 나, 나는 시킨 것만 했을 뿐이라고.”
“누가 죽인데? 나도 딱히 너를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그냥 좋게 좋게 가면 좀 좋아? 왜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서 그래.”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로베로는 그 미소가 악마의 미소처럼 느껴졌다.
“미안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어.”
에단이 아슬란을 치켜들었다. 피를 잔뜩 머금은 칼날이 차갑게 빛났다.
“끄아아아아악―!”
칼날을 바라보던 로베로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끔찍한 비명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또 지랄이네.”
에단이 인상을 와락 구기며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에단의 귓가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작은 박쥐 한 마리가 에단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박쥐는 가만히 에단을 응시하다가 순식간에 모습을 뒤바꿨다.
박쥐의 정체는 로이드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로이드는 에단을 향해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일 처리 하나는 정말 빠르시군요. 설마 성에서 나가자마자 미꾸라지들을 잡을 줄이야.”
“……다 보고 있던 거냐?”
“전부 본 것은 아니고, 중간부터 봤습니다.”
“같은 소리잖아.”
에단이 눈살을 찌푸리자 로이드가 죄송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일 처리를 하시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실례했습니다.”
“취향이 고약하네.”
“하하.”
에단과의 짧은 대화를 끝낸 로이드가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채 로베로를 바라봤다.
그 순간 로베로의 떨림이 멎었다.
그는 눈꺼풀조차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마치 뱀 앞에 선 쥐처럼.
포식자를 마주한 피식자는 아무런 행동도, 저항도 하지 못했다.
로이드의 피처럼 붉은 동공이 로베로를 응시했다. 로이드의 눈빛에는 선명한 경멸이 느껴졌다.
“이 자는 제가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음…… 좀 곤란한데. 그쪽 군주가 준 약도로는 길을 찾기가 좀 힘들어서 말이야.”
“그렇다면 제가 다른 안내원을 붙어 드리죠.”
딱.
로베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박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박쥐는 에단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길 안내는 이 친구가 맡아 줄 겁니다.”
“……이걸 왜 지금 해 줘?”
에단의 물음에 로이드가 대답 대신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