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화] 도박 (2)
사라졌던 빈센트가 돌아왔다.
옷이 군데군데 찢어지고 먼지가 묻어 있었다. 네이드는 아무 말 없이 새로운 의복을 가져왔다.
“……미안하군.”
빈센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이드는 동그래진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네.”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주님을 책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약뿐인 자리가 의미가 있단 말인가?”
빈센트가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는 마른 얼굴을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늘 중후한 기세가 담겨 있던 동공은 공허했다.
“제국을 찾아갔네.”
“그렇군요.”
“황제가 나오더군. 여전히 앳된 얼굴이었지. 20대를 갓 넘긴 얼굴. 그래선 안 되겠지만 감정을 자제하기가 힘들었네.”
“……황제를 죽이셨습니까?”
네이드의 물음에 빈센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빈센트는 자조가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검을 뽑았네. 대단히 감정적인 행동이었지.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대단히 감정적인 행동.”
“…….”
“그 순간 나는 진심이었네. 진심으로 녀석을 죽이려고 들었지. 광오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베려고 마음먹으면 능히 베지 못할 게 없으리라 여겼네. 나는 마스터라는 벽을 넘었다고 생각했으니.”
“설마…….”
“대단히 위협적인 녀석이었어. 손속에 사정을 두고 상대할 녀석이 아니었지. 어리다고 얕잡아 보다가는 역으로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알렉스 그 녀석이 어째서 패배했는지 알 것 같더군.”
빈센트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결국 놓쳤네. 과장하지 않고 내 모든 걸 끄집어냈지만 놓치고 말았지.”
“…….”
네이드는 침묵했다.
그는 빈센트를 보좌하는 집사로서 빈센트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괴물인지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오만한 기사일 뿐이었네. 한 무리의 수장에는 걸맞지 않는, 일개 기사.”
스릉.
빈센트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매끈한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란테의 가주가 쓰는 검답게 훌륭한 명검이었다.
“네이드.”
“네, 가주님.”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나.”
“……도련님은 살아 계십니다.”
“확실할 수 있나?”
빈센트가 네이드를 응시했다.
빈센트의 동공에서는 더 이상 웅혼한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대한 산을 마주보는 것 같은 온몸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세 대신, 자식을 잃은 아비의 눈을 하고 있었다.
피로하고 지친, 아버지의 눈.
네이드는 차마 빈센트의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도련님.’
네이드의 머릿속에 순간 에단의 모습이 떠올랐다. 늘 예상을 뛰어넘은 천재를 넘어선 괴물 같던 모습들.
에단의 죽음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죽음을 직접 목도한 것이 아니라면 네이드는 끝까지 에단의 죽음을 부정할 것이다.
네이드가 고개를 들어 빈센트와 눈을 마주쳤다.
“네, 확신합니다.”
“……그렇군.”
빈센트는 이미 아들을 한 번 잃었다.
그것도 본인의 손으로 아들의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 에단이 함정에 빠져 사라졌다. 이미 대다수의 여론은 에단이 죽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론을 바꾸기에는 그 광경을 지켜본 눈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에단과 가까이 지내고, 에단을 알고 있는 자들은 모두 에단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당장 오르번과 마법사들도 지하로 통하는 문을 열기 위해 연구에 들어섰다.
죽음을 확신했다면 그러한 비효율적인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사는 그 어떤 족속보다 효율을 추구하는 이들이었으니까.
그 순간 네이드가 몸을 돌렸다. 문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이드가 ‘어떻게 할까요?’라는 의미를 담은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보자, 빈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십시오.”
네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가신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제국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사절들은 평화 협정을 맺고자 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네이드와 빈센트의 눈매가 좁혀졌다.
* * *
오르번과 에르미온, 데아티르는 잠조차 거른 채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신성 왕국의 지하에 있던 시설들과 의식에 사용된 재료들을 모두 연구실로 옮겼다.
의식에 사용된 문양.
재료로 사용된 생명체들, 뼈와 혈흔.
연구는 오르번이 주도했다.
이러한 의식에 가장 익숙한 것은 흑마법사인 오르번이었기 때문이다.
오르번은 정리한 노트를 천천히 훑고 있었다.
역시 오르번의 예상대로 이들은 지하와 연관이 있었다.
이들은 수인들의 사체를 이용하여 무언가를 제조하고 있었다.
‘어째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위였다. 죽은 마나를 다루는 흑마법사를 가장 경계하는 세력이 신성 왕국이었다.
신성력과 죽은 마나의 성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두 기운은 완전한 상극이었다.
죽은 마나를 다루는 흑마법사에게 신성력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성기사들은 그 자체만으로 재앙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신성 왕국은 흑마법을, 정확히 말하면 고대의 흑마법을 깊이 파기 시작했다.
키메라의 연성.
지하의 문.
‘다른 성질을 띠는 마나를 하나로 만들려고 한단 말인가?’
오르번은 훼손된 연구 일지를 읽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실험을 걸친 연구였다.
흑마법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오르번이 보기에도 놀라운 성과였다.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는 연구 일지를 보자마자 인상을 구기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자행한 실험 자체가 대단히 비인륜적이고 잔혹했기 때문이다.
“미친 새끼들…….”
사랑과 자애, 용서의 상징인 신성 왕국이 뒤에서는 이러한 만행들을 저지르고 있었다.
“잠깐만…….”
에르미온이 무언가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곧장 연구실을 떠나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짜고짜 한 학생을 잡아 질문을 던졌다.
“드레이는 지금 어디 있지?”
“……아마 연무장에 있을 거예요.”
그녀는 곧장 드레이가 있을 연무장으로 날아갔다.
쾅!
이내 연무장에 도착한 에르미온이 문을 열어젖히자 진한 땀 냄새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연무장 안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땀에 절은 드레이와 함께, 휴고와 가토도 함께해 있었다.
“드레이!”
“……에르미온 님? 여기는 무슨 일로.”
“이쪽으로 와 봐.”
에르미온의 다급한 손짓에 드레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갔다.
“너, 도시 한복판에 있었던 일 기억하지? 네가 용사로 칭송받은 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을 어찌 잊는단 말인가. 드레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그날 에단이 라오나드를 죽였을 때 수첩 하나 얻지 않았어?”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에르미온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시죠?”
“그런 게 있어. 훈련 열심히 하고. 난 간다.”
갑자기 나타난 에르미온은 갑자기 사라졌다.
드레이가 눈을 끔뻑거리며 에르미온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 * *
에르미온은 에단이 사용하던 집무실과 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부터 시작해서 이곳저곳을 닥치는 대로 뒤지자 노트 몇 개를 찾을 수 있었다.
노트를 촤르륵 넘기며 내용을 확인한 에르미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찾았다.”
성기사단장의 노트뿐만 아니라, 레벨린의 노트도 손에 넣은 에르미온이 방을 나서 연구실로 향했다.
마법을 통해 움직인 탓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연구실에 들어선 에르미온을 오르번이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지?”
오르번의 물음에 에르미온이 씨익 웃으며 노트 두 개를 건넸다.
“라오나드와 레벨린의 노트야. 연관이 있다며. 읽어 보면 뭔가 짚이는 게 있겠지.”
“…….”
오르번과 데아티르가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에르미온을 바라봤다.
노트를 받아든 오르번이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레벨린의 노트는 상당히 개인적인 내용들이 많았고, 라오나드의 노트는 미래에 대한 계획들이 많았다.
“…….”
오르번이 천천히 레오나드의 노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버림받았다.
신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신성력이라는 힘은 과연 신앙심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신앙심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들에게 그토록 많은 신성력이 주워졌단 말인가?
방법을 갈구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도태될 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그 이후에는 라오나드와 신성 왕국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들이 가득했다. 오르번은 천천히 그 행위를 곱씹으며 고민했다.
‘예상이 맞았군.’
오르번의 예상대로 신성 왕국은 마나와 신성력, 그리고 죽은 마나를 배합하여 무언가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기운을 융합하는 것이 아닌, 생명체도 함께 뒤섞으려 했다.
인간과 수인, 엘프, 그리고 지하의 마족들.
‘대체 뭘 위해서?’
라오나드의 노트에는 구체적인 목표에 대한 건 적혀 있지 않았다.
‘대의’를 위해서라는 모호한 말이 전부였다.
이번엔 레벨린의 노트를 펼쳤다.
그녀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오르번이 노트를 읽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라오나드의 노트에 있던 대의니 뭐니 하는 것보다 레벨린의 노트의 쓰인 것들이 훨씬 와닿았다.
‘부활이라.’
사랑하던 이를 부활시키는 것. 그것이 레벨린의 목표였다.
‘가장 순수하면서도 실현하기 어려운 욕망이군.’
신과 같이 전능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 것인가?
지하의 군주들도 죽은 자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언데드로서 부활시키는 것은 진정으로 되살렸다고 볼 수 없었다.
사령술은 죽은 이의 신체를 일시적으로 재구축한 게 전부였으니.
‘둘 모두 지하와 꾸준히 소통을 하고 있었군.’
심지어 군주급 존재들이다.
신성 왕국과 아카데미, 그리고 제국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쌓아올린 경험과 지식이 바탕이 되니 그런 준비도 할 수 있었겠지.’
제국의 황제가 파뒀던 함정.
지하와 통하는 문.
오래된 흑마법사인 오르번조차 엄두를 내지 못할 행위였다.
‘살아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지하는 한낱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이라면…….
오르번이 보기에 에단은 이미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자였다.
‘오랜만에 승부욕이 생기는군.’
어린 황제가 성공한 것을 자신이 못할 리가.
피식 웃은 오르번이 노트를 덮었다.
노트 안에 든 연구는 이미 머릿속에 모두 담았다.
라오나드의 노트보다 마법사인 레벨린의 노트가 훨씬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석의 여유는 충분하고.’
문을 열고, 열린 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죽은 마나가 필요했다.
단절된 공간을 강제로 여는 무식한 행위였다.
오르번이 쥐고 있던 노트를 에르미온과 데아티르에게 건넸다. 그들도 천천히 노트를 훑어보더니 눈을 빛냈다.
이 둘 모두 각 분야에 있어 정점에 오른 대마법사였다.
오르번과 함께한 연구와 노트의 정보가 합쳐지자 복잡하던 지식들이 하나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할 수 있겠어.’
지하의 문을 열 방법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