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화] 뱀파이어 로드 (4)
“나뭇가지?”
내가 흡수한 힘이 고작 나뭇가지 하나라고?
“왜? 쉽게 믿지 못하겠나?”
아모드라가 피식 웃으며 묻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얘기는 지금 처음 듣는 소리거든.”
“흐음…… 그렇단 말이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아모드라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죽은 나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거의 없어. 시체나 마족, 마수 따위한테서 마나를 추출할 수 있다는 것 빼고는.”
“하하하.”
아모드라가 재밌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보아하니 힘을 꽤나 키운 것 같은데, 대단하군.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칭찬은 고맙게 듣겠어.”
“그래, 엄연한 칭찬이네. 그만큼 죽은 나무의 힘이 커졌는데 아직 잡아먹히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그렇고. 그래서 궁금하단 말이야. 정말 인간이 맞나? 어지간한 군주라고 해도 죽은 나무를 탐내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하지. 애초에 손에 넣기도 힘들 테지만.”
“인간은 맞아. 최근 같은 질문을 몇 번 듣는지 모르겠군.”
“흐음…… 그렇단 말이지. 드래곤의 힘도 조금 느껴지고…… 그것도 죽은 나무의 힘으로 뽑아 먹었나?”
“티가 좀 나나?”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에단의 몸에서 드래곤의 기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래. 개인적으로 드래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피는 좀 좋아하지만.”
“확실히 좋아하긴 하더라고.”
“흐음? 자세히 듣고 싶은데?”
에단의 의미심장한 말에 아모드라가 관심을 보였다.
‘눈치 빠르기는.’
피식 웃은 에단이 지상에 있던 벨몬트에 대해 설명했다.
반쪽짜리 뱀파이어 일족과 사실상 멸족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그것참 흥미로우면서도…… 운이 좋은 녀석이군.”
아모드라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묘한 표정을 보니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았지만, 에단은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지금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에단이 을이었다.
“아직 듣고 싶은 것은 많지만 본래의 목적에 대해서 먼저 들어야겠어. 자,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온 이유는?”
아모드라가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약아빠진 녀석.’
에단은 아모드라가 생각보다 영악하다는 것을 느꼈다.
저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녔으면 힘으로 모든 것을 찍어 누르려고 들어도 놀랍지 않을 텐데, 철저히 계산적으로 접근해 왔다.
‘내가 저항할 거라는 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본래의 성향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운 건 에단 쪽이었다.
에단이 아모드라에게 건네줄 수 있는 건 녀석의 호기심을 끌 수는 있어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아니었다.
“지상으로의 복귀.”
“흐음…… 예상했던 바로군.”
“한 가지 더 있어.”
“호오, 그런가?”
“블란테라는 이름에 대해서 알고 있나?”
블란테를 언급하는 순간 아모드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그 이름을 언급하는 이유는?”
아모드라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 단순한 감정의 변화였을 뿐인데도 숨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에단은 일말의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녀석의 이름은 원래 블란테가 아니야.”
“그거 흥미로운데.”
다행히도 아모드라가 먼저 관심을 보였다. 에단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죽은 나무를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 궁금한가?”
에단이 페온과 처음 조우했을 때를 설명했다.
짧은 조우, 그리고 자신의 몸속에서 지내온 삶들.
길게 풀면 긴 이야기였지만, 에단은 최소한 간소화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설명하는 와중에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들은 제외하면서.
“이것 참 놀라운 이야기군.”
“어때, 만족스럽나?”
“그래, 상상 이상의 수확이야. 설마 도망친 녀석이 그런 방법으로 힘을 회복했을 줄이야. 정말 영악해. 아리오나 그 뱀 같은 년은 그런 주제에 모른 척했단 건가? 하하하, 정말이지 찢어 죽여 버리고 싶군.”
아모드라의 유형화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살기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에단은 같이 피어와 기세를 끌어올리며 아모드라의 살기에 저항했다.
“아, 실수했군. 방금 일은 사과하지. 민망하게도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어.”
아모드라가 살기를 거두며 순순히 사과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사과를 받아 줬다.
“이제는 내가 설명을 들었으면 하는데?”
“그래. 좋은 얘기를 들었으니 나도 말을 해 줘야겠지. 네가 가지고 있는 죽은 나무가 고작 나뭇가지 하나라고 했지?”
“그랬지.”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고작 나뭇가지 하나라고 우습게 여길 건 아니지. 죽은 나무의 힘은 우습게 여길 게 아니거든. 작은 나뭇가지도 잘만 다루면 충분히 거대해지지. 네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야.”
에단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아모드라가 말을 이어 나갔다.
“죽은 나무는 지금껏 네 명의 군주들이 관리했어. 그건 그 누구도 독점해서는 안 되고 독점할 수도 없는 것이지. 애초에 아무리 군주라고 한들 죽은 나무를 흡수할 수는 없어. 그런데 말이야…… 어떤 간 큰 녀석이 몰래 죽은 나무가 있는 곳까지 접근했더라고.”
아모드라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었다. 살기가 흐르는 미소였다.
“단독행위가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어. 네 명의 대군주가 관리하는데, 몰래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할 수 없으니.”
아모드라는 광오한 말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감히 대군주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녀석은 성공했단 말이지.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보란 듯이 나뭇가지를 꺾고 도망쳤어. 내가 곧바로 추적했지만 놓치고 말았지. 대부분의 힘을 잃고 도망친 녀석이 어떤 방식으로 힘을 회복할지는 예상되지 않나?”
“……죽은 나무의 힘을 쓰겠군.”
“그래. 감히 죽은 나무를 다룰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법은 그것뿐이지. 그런데 설마 지상으로 도망치는 것을 택할 줄은 몰랐군. 얘기를 들어보니…… 모든 게 계획대로였던 것 같고.”
아모드라가 웃었다.
분명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협력자가 있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자, 군주들은 결국 서로를 의심했지. 가진 건 힘밖에 없는 머저리 같은 놈들이 되도 않는 협잡질과 선동 따위에 당해서 경계하는 동안 블란테, 아니, 페온이라고 했던가? 그 녀석이 돌아와서 군주의 자리를 얻었지. 그래서 지금 꼴이 아주 가관이 됐어. 아리오나 그년과 새로 군주의 위에 오른 놈, 그리고 머저리 같은 돌대가리 하나. 큭큭큭.”
아모드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퍼즐이 좀 풀리는군. 그래…… 그랬단 말이지.”
아모드라는 혼자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모드라의 이야기를 듣던 에단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해도 괜찮나?”
“말해 봐.”
“페온은 어째서 본인이 직접 죽은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나를 이용한 거지? 본인이 직접 사용했다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말이야.”
“지하에서 지상으로 도망치는 데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가?”
아모드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군주를 만난 적 있나? 여기 말고 지상에서 말이야.”
“……어, 있어.”
“녀석들의 특징에 대해서 말해 봐.”
“녀석들은 전부…… 무언가를 숙주 삼아서 오긴 하더군.”
베오드라도도 인간의 뼈를 숙주 삼아서 왔었고, 블란테의 영지에서 만난 군주 녀석도 모룬의 몸을 숙주 삼아서 강림했다.
“내 기준에서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지만, 그래도 군주의 자리에 오른 놈들이지. 그런 놈들조차 그런 제약과 대가를 감수하고 지상으로 기어 올라간다. 그런데 힘을 잃은 페온이란 놈이 직접 죽은 나무를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렇군.’
아모드라에게 모든 진상에 관해 전해 듣자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애당초 날 속일 작정이었단 말이지.’
에단의 입꼬리가 찢어졌다.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말해 줘서 고맙군.”
“별말씀을. 나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었어. 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나?”
에단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다른 질문을 했다.
“지상에서 어떤 놈들이 만든 게 있어.”
“말해 봐라.”
에단은 신성 왕국이 만든 괴물을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녀석을 페온이 데려갔다는 것 또한.
“그건 꽤나 관심이 가는데…….”
“알지는 못하겠나?”
“글쎄? 듣기만 해서는 감이 잡히지 않는군. 나도 따로 알아봐야겠어.”
“무언가 알게 되면 나한테도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기꺼이 그러지. 오늘 재밌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으니.”
아모드라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이 하나 있다.”
“지상으로 가게 도와달라고? 안타깝지만 그건 힘들어.”
아모드라의 단호한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문을 열려고 드는 건 대놓고 협정 위반일뿐더러 리스크가 따른다. 이미 놈들이 협정을 위반했다고 나도 냉큼 위반하면 순식간에 표적이 될 명분을 제공하는 꼴이야. 새로 대군주의 자리에 앉은 놈이 어떤 저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군주 자리를 빼앗을 정도라면 적어도 지금의 너랑은 비교도 안 될 수준의 힘을 지니고 있겠지.”
아모드라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지금 대군주들이 하는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맞지만, 세 명의 대군주들에게 표적이 될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아모드라의 입장을 들은 에단이 눈살을 좁히며 생각하던 것들을 말했다.
“결국 이대로 가면 입지가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흐음…… 지금 지껄이는 말이 주제넘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모르겠군. 내가 웃으면서 상대해 주니 우습게 보이나 보지?”
아모드라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끌어올린 입꼬리가 흉흉했다.
응접실 안이 순식간에 아모드라의 존재감으로 가득 찼다. 가히 압도적인 기세였다. 기세만으로도 몸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에단은 아모드라의 압도적인 기세에도 전혀 굽히지 않았다. 아모드라를 향해 마주보며 웃었다.
키에에에엑―!
죽은 마나가 귀곡성을 토해 내며 드래곤의 피어가 모두 개방된다.
더불어 이전에 흡수한 바실리스크와 군주의 기세까지 더해졌다.
쿠구구구궁―!
두 괴물의 기세가 서로 격돌한다.
유형화된 기세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세력을 다퉜다.
에단은 긴장을 삼키고 있었다.
아모드라가 적당히 손속에 사정을 두고 상대해 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만일 그가 진심을 내비친다면 에단이 뿜어낸 기운은 순식간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이건 도박이다.
어차피 이 도박이 먹히지 않으면 에단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에단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도박에 재능이 있었다.
리스크가 클수록, 판돈이 커질수록, 돌아오는 리턴도 커지는 법이다.
지금 에단이 내건 판돈은 자신의 목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