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화] 지하 (14)
네빌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에단이 정말로 군주를 쓰러트렸다.
‘어떻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됐다.
잘린 머리를 보고 불길함이 치민 그녀는 곧바로 행동했다.
꿈틀.
그 순간 네빌라는 똑똑히 봤다.
잘린 머리의 눈이 굴러갔다. 네빌라가 품에서 검붉은색을 띤 보석을 꺼냈다.
그것은 전사장의 증표이자 일족의 보물이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불태워라!”
보석이 불꽃으로 변화했다. 검붉은 불꽃이 잘린 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화르르륵-!
머리를 집어삼킴과 동시에 맹렬하게 타오르는 검붉은 불.
크아아아아아-!
잘린 머리가 입을 벌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 냈다. 네빌라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이 자리에서 저걸 완전히 처리해야만 했다.
그녀가 불타는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지독하고도 끔찍한 반복 행위였다. 네빌라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하아.”
잘린 머리는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져졌다.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단은 고개만을 돌려 네빌라를 바라봤다. 에단이 혀를 내두르며 네빌라를 바라봤다.
“대단하네.”
“……내가 할 말이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에단의 모습에 네빌라는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 * *
네빌라는 남은 시체도 불로 완전히 태우고 나서 에단을 부축한 채 전사들이 퇴각하던 장소로 향했다.
처음에는 군말 없이 네빌라에게 부축받던 에단은 금세 기력을 회복해 두 다리로 걸었다.
네빌라로서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군주를 쓰러트린 직후라고는 믿을 수 없는 회복력이었다.
에단이 상대한 자가 군주라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사악하고 압도적인 그 기운을 느낀 당사라면 결코 의심할 수가 없었다.
에단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몸 상태는 이미 진즉에 회복되었다. 네빌라의 부축을 받은 이유는 바뀐 몸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군주의 기운은 다른 조무래기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세계수의 힘을 통째로 흡수했을 때보다는 못했지만, 한 개인에게 허용된 힘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죽은 마나 자체의 양도 무시무시했지만, 그로 인한 변화에 더 집중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군.’
죽은 마나를 추출했다고, 꼭 신체의 특별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 리치를 상대로 죽은 마나를 흡수했을 때에는 별다른 신체의 변화가 없었다.
‘너무 많이 바뀌는 것도 좋지는 않아.’
큰 거부감은 없었지만, 인간에서 점차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마냥 달갑지는 않았다.
‘차차 알게 되겠지.’
바뀐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변화했다는 느낌은 들었다.
에단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막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몸이 터지지 않은 게 놀라울 지경이다.
‘이제는 내가 군주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군.’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운이 좋았다. 지하에서의 군주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조금이라도 상황이 틀어진다면 에단은 감히 군주에게 다가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하단 말이야.’
대체 뭐지 그 녀석은?
에단의 머릿속에 크리스토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은 에단이 발현시킨 모든 룬어를 파훼시켰다.
‘상황으로 봐서는 같은 룬어를 쓴 것 같은데.’
철저한 대비.
에단은 크리스토가 준비해 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를 상기하자 절로 이가 갈렸다.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돌아간다면.’
크리스토의 얼굴에 만연하는 웃음기를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에단의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자 네빌라가 흠칫 놀라며 에단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 그러지?”
“아니야.”
에단이 살기를 갈무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앞에 닥친 일에 집중해야 했다.
네빌라와 에단이 전사들과 합류했다. 전사들이 커다래진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네, 네빌라 님.”
전사들의 수치심과 자괴감이 공존하는 표정을 바라본 네빌라가 고개를 저었다.
“명령이었으니 쓸데없는 소리 마. 오히려 내 명을 거역했다면 벌을 피하지 못했을 거야.”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전사들은 고개를 깊게 숙이며 사과했고, 네빌라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남은 잔당들은 정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미 놈들의 본거지는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제대로 된 인력과 전사들이 없는 녀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수의 먹이가 될 터였다.
네빌라의 말에 수긍한 전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굳이 비효율적인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에단과 일행들은 무사히 마을로 복귀할 수 있었다. 명백하고도 압도적인 승전이었다. 전사들이 목청을 높이며 우렁찬 함성을 내뱉었다.
우오오오오오―!
마을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뱉었다.
승리의 환희가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오늘은 전사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전투의 피로를 풀기 위한 연회가 벌어질 것이다.
“……같이 가겠는가?”
네빌라가 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전사들의 수장으로서 유론다에게 찾아가 있었던 일들을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롭게 나눠서 갈 필요는 없었다.
“둘 모두 들어오거라.”
네빌라가 따로 청하기도 전에 유론다의 허락이 떨어졌다.
네빌라와 에단이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론다의 혼탁한 회백색 동공이 에단을 가만히 응시했다.
에단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마주 보고 있었다.
“……정말이었군.”
그녀는 에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쉰 유론다가 에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네빌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사들을 지켜 줘서 고맙네.”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에단이 유론다의 감사를 덤덤하게 넘겼다.
천천히 고개를 든 유론다가 네빌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있었던 일들을 조금 상세하게 듣고 싶은데.”
네빌라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유론다에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그것을 전투라고 칭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상대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했고, 네빌라와 전사들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을 유린해 나갔다.
그 학살의 현장에 있을 필요가 없는 에단은 단독 행동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주의 존재는 단순한 기우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안일한 생각을 한 순간, 패도적이고 막강한 기운에 전사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과 용기를 지녔다고 자부하는 전사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네빌라는 그 기운을 느낀 순간 그 자리에 군주가 강림했다고 직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말하지.”
에단이 군주와 싸운 상황을 최대한 축약하여 설명했다.
룬어니, 죽은 나무니, 자신의 패를 모두 꺼낼 필요는 없었다.
에단은 결국 본인의 힘으로 군주를 쓰러트리는 데에 성공했다.
“쓰러트린 군주의 외향은 어땠지?”
유론다가 눈을 빛내며 물어 왔고, 에단은 기억나는 외향을 설명했다.
하얀 걸 넘어선 창백한 피부.
그리고 붉은 동공.
거만하고, 오만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눈빛.
전투가 끝난 직후 에단이 자른 머리.
머리가 잘렸음에도 살아 있는 질긴 생명력.
“잘린 머리는…… 제가 불태웠습니다.”
“증표를 사용했느냐?”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하지? 너는 전사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깟 보석 쪼가리가 귀해 봤자 마을의 존속과 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증표는 증표일 뿐이야. 살아남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옳은 판단이었어.”
유론다의 말에도 네빌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유론다가 다시 에단을 바라봤다. 그녀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모르겠구나.”
“뭐 때문이지?”
“자네는 이제 떠날 생각이지?”
“그래. 여기가 나쁘지는 않지만…… 언제까지고 지체할 수는 없지.”
“내가 본래 제시해 줄 방향은…… 이쪽이었네.”
네빌라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향해 가리켰다.
“이쪽 방향으로 쉼 없이 나아가면 도시가 하나 나온다네. 그곳은 이곳처럼 황폐하지 않은, 풍요로운 땅이지. 주인만 없다면 탐이 날 정도로.”
“그런데 뭐가 문제지?”
“자네가 죽인 게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자네가 죽인 것은 뱀파이어. 그중에서도 로드 아모드라의 일족을 죽인 것 같네.”
“뱀파이어?”
순간 에단의 머릿속에 벨몬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론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들은 혈족에 대한 애정이 없다네. 모든 것들은 철저한 수지 타산 끝에 행동하지. 하지만 지금은 정세가 심상치 않지 않은가? 무소불위의 권력도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지.”
유론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섬뜩한 웃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네가 권속을 죽였네. 분노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지만…… 자네의 목적은 군주 중 하나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 아니던가?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는 콧대 높은 아모드라라도 선택지가 없을 터.”
“결국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 거 아닌가?”
유론다가 긍정하는 미소를 지었다. 피식 웃은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결국 달라진 건 없네. 녀석이 격분해서 나를 곧장 죽이려고 들든, 아니면 아쉬운 놈이 손을 뻗게 되든. 뭐, 죽이려고 든다고 해 봤자 쉽게 죽어 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에단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유론다와 네빌라는 그런 에단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감히 대군주를 거론하고 있음에도 에단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네빌라는 궁금해졌다.
평생을 전사로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용맹함으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에단의 끝없는 자신감은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출발할 거면 빨리 출발하는 게 좋을 거야.”
유론다가 에단을 바라보며 웃자 자글자글한 주름이 더 많아졌다.
“궁지에 몰린 쥐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궁지에 몰린 쥐라…….”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유론다를 바라봤다.
유론다는 아는 게 많은 노파였다.
긴 수명을 영위하는 다크 엘프가 이 정도로 늙은 모습이 되었다면 과연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일까.
‘음흉한 노인네.’
시꺼먼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에단이 빛바랜 목걸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래도 즐길 건 즐기고 가야지.”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좋은 생각이네.”
에단과 유론다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럼 난 먼저 간다.”
에단이 먼저 유론다의 천막을 나섰고, 그 모습을 멀뚱거리며 지켜보던 네빌라도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유론다 님.”
유론다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과 네빌라가 천막을 나서자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