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지하 (13)
룬어가 내뱉어지고 분위기가 돌변했다. 녀석이 형체를 갖추기도 이전이었다.
불길한 뱀이 녀석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형체가 안정화되며 녀석이 눈을 떴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피부의 남자였다. 에단이 생각하던 군주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놈이 눈을 뜨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몸을 휘감은 룬어가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뭘 놀라?”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절망]이 전개되며 에단의 몸 주위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기운은 순식간에 에단과 바로 앞에 있는 군주를 휘어 감았다.
형성된 검은 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모든 감각이 차단되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에단에게는 더없이 친숙하고, 익숙했다.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뜬 기분이다.
어둠이 에단의 또 다른 눈과 귀가 되었다. 우두커니 서서 상황을 관조하는 녀석이 느껴진다.
‘시간은 얼마 없고.’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조급하게 굴어서는 안 됐다.
에단은 먼저 반응을 지켜볼 생각으로 녀석에게 다가갔다.
근처까지 다가갔음에도 별다른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에단이 맹수처럼 달려들어 녀석의 뒤를 잡았다. 에단의 팔이 녀석의 허리를 뱀처럼 휘어 감았다.
후웅!
녀석의 몸을 공중에 붕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닥에 메다꽂았다.
콰앙!
꽤나 강한 충격에 휩싸였을 텐데도 녀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으로 녀석의 얼굴을 내려찍었다.
쾅―! 쾅―! 쾅―!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에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이내 녀석은 몸을 일으켰다.
[좌절]을 통해 제약이 있을 텐데도 실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어쭈.’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생오라비 같은 외모와 달리 힘 하나는 확실히 인정이었다.
하지만 행동이 미숙했다. 에단의 손이 녀석의 목과 팔을 휘감았다.
아나콘다 초크.
녀석이 저항하려하자 다시 한번 에단의 포지션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다스 초크.
서브미션은 에단이 애용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키에에에에엑!
죽은 나무가 요사스런 울음을 토해 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에단은 아직 녀석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타격을 가한 당사자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두 룬어를 모두 소진했다.
룬어의 지속 시간이 끝난다면 에단에게 방법이 없었다.
죽은 마나의 양은 충분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녀석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에단에게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립이 완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죽은 나무가 녀석에게 뿌리를 내렸다.
키에에에엑―!
죽은 나무가 환희에 찬 목소리를 토해 내며 양분을 빨아들인다. 양분은 당연히 죽은 마나였다.
움찔.
반응이 달라졌다.
죽은 마나를 갈취 당한다는 것을 인지한 녀석이 처음으로 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에단의 목에 굵은 핏대가 올라왔다.
그립을 완성시킨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냥…… 곱게 좀 뒈지지?”
이곳은 에단의 영역이었다. 더군다나 상대에게는 제약이 걸려 있었다.
지금 기회에 끝장을 봐야만 했다.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완성된 그립을 풀 방법은 없었다.
노련한 그래플러라면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 빠져나올 수도 있었지만, 녀석은 그저 무식하게 힘만으로 빠져나오려고 들었다.
에단은 힘에 자신이 있었다.
더불어 지속적으로 죽은 마나가 공급되어 빨리 지치지도 않았다.
“스읍.”
에단이 호흡을 들이마신 다음 가뒀다. 녀석은 확실히 군주다웠다.
현재 에단의 그릇은 매우 거대했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선 결과였다.
죽은 나무가 엄청난 기세로 죽은 마나를 추출하고 있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미친 새끼들.’
그전에 상대했던 군주들이 얼마만큼의 페널티를 지니고 있었는지 이제야 좀 체감이 되었다.
녀석이 본 모습을 드러내기 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지체하거나 망설였더라도 승산이 희박했을 것이다.
쭈왑. 쭈왑. 쭈왑.
죽은 나무가 쉴 새 없이 죽은 마나를 뽑아냈다.
녀석의 반응이 점차 느려진다.
무어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녀석이 내뱉은 소리는 모두 암흑 속에서 흩어지고 말았다.
꽈아아아악―!
에단은 몸에 힘을 더했다.
원래라면 진작 기절하고 이미 뒈졌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었다.
저항이 약해진 것일 뿐, 녀석은 아직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어디서 고고한 척을 해.’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처음 마주했던 녀석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른하고 권태로운 표정.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
녀석은 자신들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온 것 자체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
에단은 녀석의 그 표정이 엿같이 느껴졌다.
‘지금의 낯짝을 못 보는 게 아쉽네.’
시간이 흘렀다.
이제 유지 시간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허무하다면 허무한 결말이다.
하지만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은 채 녀석을 쓰러트린다면 그것만 한 이득이 없었다.
이건 싸움이 아닌, 사냥이다.
에단은 공정함을 원하지 않았다. 군주들이 지닌 힘 자체가 불공정의 극치였다.
녀석의 반응이 약해져 감에도 에단은 끝까지 그립을 놓지 않았다.
스스스.
칠흑같은 어둠이 흔들렸다.
마치 안개가 바람에 흩어지듯 천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장막이 거둬지고, 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단은 끝까지 녀석을 붙잡고 있었다. 죽은 나무는 아직 양분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 기세는 전보다 약해졌지만 여전히 방대한 양이었다.
그 말인즉 아직 이 녀석의 숨통이 붙어 있다는 소리였다.
‘진짜 황당할 지경이군.’
에단이 흡수한 기운을 느꼈다.
아무리 군주라고 한들 일개 개인이 지닐 수준의 힘이 아니었다.
바실리스크에게서 흡수한 죽은 마나도 충분히 막대하다고 느꼈지만,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양이었다.
사전에 그릇을 확장하지 않았다면 몸이 터져 죽는 건 에단이었을 것이다.
흡수하는 양이 점점 줄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저항은 완전히 멎었다.
꽈아악.
에단이 탈진할 것 같은 몸을 다그쳐 마지막 힘을 짜냈다.
그립이 조여지며 녀석의 목에서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렸다.
우드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
이미 축 늘어진 몸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에단은 그제야 그립을 풀었다.
오랫동안 가했던 힘을 풀자 팔다리가 덜덜덜 떨렸다. 에단이 떨리는 팔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재수 좋았네.”
조금만 타이밍이 늦었거나, 녀석이 방심하고 있던 게 아니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살아남은 게 실력이지.’
에단이 실소를 터트렸다.
짙은 탈력감이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쓰러질 수는 없었다. 에단이 허리춤에 매달아 둔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서늘한 금속음과 함께 뽑힌 아슬란이 어슴푸레한 빛을 머금었다.
에단이 역수로 쥔 검을 그대로 녀석의 목을 향해 내려찍었다.
푸욱!
칼이 박히며 피가 흘러나왔다.
상당한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에단이 칼자루에 힘을 주자, 녀석의 머리가 떨어졌다.
‘이제 한계다.’
여기서 갑자기 머리통이 둥실 떠오르며 되살아나면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체력의 한계였다.
에단이 바닥에 발라당 자빠지며 숨을 토해 냈다.
“더럽게 힘드네.”
오늘따라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 * *
네빌라와 전사들은 전장을 헤집었다. 예상대로 녀석들의 병력은 보잘것없었다.
대부분의 전사들이 이전 매복 때 쓸려 나갔으니 당연한 상황이었다.
매복은 불명예스럽고 치졸한 행위였다. 전사들은 분을 토해 내듯 더욱 잔혹하게 칼을 휘둘렀다.
이미 승기는 확실히 잡았다. 이제 남은 잔당들만 정리하면 끝이다.
‘역시 기우였나.’
군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만일 정말 이들이 군주와의 협력 관계에 있었다면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때까지 지켜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전사들이 학살을 멈췄다. 네빌라도 움직임을 멈췄다.
무형의 기운이 그들을 휘어 감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호흡조차 통제당했다.
누군가를 지정한 살기도 아니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전신이 옥죄이는 느낌이었다.
공포라는 감정이 머릿속을 헤집었고,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한 말은 똥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당장 퇴각을 명령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입만 뻐금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전사들이 모두 얼어붙어 있을 때 그들을 짓누르던 포악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어?”
전사들이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사태를 바로 인지하지 못한 것은 네빌라도 마찬가지였다.
네빌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지금 그녀가 내리는 판단이 합리적인지조차 인지가 안 됐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퇴각해―!”
네빌라가 목청을 올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전사들이 하나둘 말고삐를 잡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막바지에 벌어진 어이없는 퇴각이었지만, 반발하는 전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도 방금 느꼈던 기운을 기억하고 있었다.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섬뜩해지는 그 기운을.
네빌라는 퇴각하는 방향과 반대되는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은 에단이 대기하던 장소였다.
불길했다.
당장에라도 멀어지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그건 매우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포를 억눌렀다.
히이이잉―!
말이 비명을 토해 냈다.
날 때부터 전장을 함께해 온 말이 지금처럼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네빌라가 말 위에서 내렸다.
“……먼저 가 있어.”
네빌라가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말이 구슬픈 눈망울로 네빌라를 바라봤다. 마치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표정이었다.
쓰게 웃은 그녀는 에단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뛰어난 전사답게 빠른 발걸음이었다.
달리는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돌릴까?
내가 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에단라도 그런 괴물의 상대가 된다고?
이미 끝났을 거야…….
그렇다면 느껴지던 기운은 어째서 사라진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네빌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온갖 상념들을 털어 냈다.
네빌라는 머리를 비우고 달렸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서 도착한 그곳에는.
서걱.
어떤 이의 머리를 베고 그대로 쓰러지는 에단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