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화] 지하 (12)
네빌라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도박이란 단어는 전사와는 상극이었다. 자고로 전사라고 하면 죽음의 공포를 외면하지 않는 이였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에게 두려움을 산다.
언젠가는 네빌라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빌라도 그때가 되면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명의 전사이기 이전에, 한 무리의 수장이었다.
그녀의 긍지와 명예는 뒷전이다.
그 감정이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전사 개인의 긍지보다 동료들의 목숨이 무거울 뿐.
네빌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에단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위는 파렴치한 행위였다.
승산은 있었다. 상대의 전력은 일전의 전투로 괴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빌라가 판단하기에 매복하던 전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남은 자들은 조무래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만일.
배신자들의 주장이 사실이었다면.
녀석들이 군주라는 뒷배를 믿고 그런 짓을 벌였다면.
전멸하는 것은 이쪽이었다.
‘군주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
네빌라가 착잡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뛰어난 전력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범주하에서다.
그녀 또한 군주의 무력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었다. 입을 타고 전해지는 말들로 전해 들은 것뿐이다.
‘과장되었다고 한들.’
들리던 것들의 절반만 사실이라도 승산은 전무였다.
네빌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깨문 부위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결국은 힘이었다.
힘이 없으면 이룰 수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료의 목숨, 마을의 존망과 그녀 개인의 자존심.
저울질할 가치가 없는 내용이다.
마을 사람과 전사들은 모두 그녀의 가족이었다. 그들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그녀의 자존심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고개를 숙이고 에단에게 손을 뻗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외지인이었다.
그리고 마을의 손님이었다. 수많은 위기에서 자신과 전사들을 구원해 준 구원자이기도 했다.
제대로 된 보답도 하지 못했다. 유론다가 내건 보상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론다의 보상이었다. 네빌라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감사 인사가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사지로 내몰라고?’
파렴치한 것도 정도껏이다. 네빌라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팔장을 낀 채 물끄러미 네빌라를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뭔 근심이 그렇게 많아?”
“……뭐?”
“도움이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말해. 설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건 아니지?”
“너는…… 군주에 대해서 모른다.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너 실제로 군주 본 적이나 있냐?”
“…….”
네빌라가 인상을 쓰며 에단을 바라봤다. 마치 ‘너는 봤냐?’라는 시선이었다.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나는 두 번이나 잡았어.”
“……잡았다고?”
네빌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에단이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군주는 다른 문제였다.
“내 말이 거짓말 같아?”
에단이 웃음기를 지우고 네빌라를 응시했다.
에단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고요한 에단의 동공은 끝없는 심연을 보는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치던 네빌라는 오싹함을 느꼈다.
“지레 겁먹지 마. 결정하는 게 부담스러운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계속 고민만 해서는 끝도 없다는 거.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군주와 싸워서 이겼다는 거. 정말인가?”
“나는 거짓말은 안 해.”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네빌라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수장 실격이군.’
네빌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보다 단단하여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할 전사장이 누군가를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전사장으로서 실격이었다.
“……부탁하지. 우리와 함께 싸워 줘.”
네빌라가 에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굳은살과 상처, 흉터로 가득한 투박한 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손은 아름다웠다.
묘한 미소를 머금은 에단이 네빌라의 손을 맞잡았다.
* * *
에단의 참전이 결정되었다.
전사들의 사기는 절정에 치달았다. 네빌라는 전사들이 과도한 흥분에 휩싸이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이건 전쟁이다! 이 머저리들아! 혼자 대열을 이탈하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할 시 내가 그 잘난 모가지를 베어 버릴 테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네빌라가 사나운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말이 전사들을 더욱 자극했는지 전사들이 호쾌하게 웃어 재꼈다.
“전사장! 무슨 걱정입니까! 에단까지 함께하는 데 말입니다! 크하하하!”
“군주는 개뿔. 오늘 놈들의 피로 칼칼한 목을 좀 축여야겠습니다!”
전사들은 전투 전 고양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야만적이고 사나웠지만, 이게 그들이 긴장감을 이겨 내는 방식이었다.
에단은 피식 웃으며 전사들을 관망하고 있었다. 신선한 광경이었다.
하는 행동들은 영락없는 용병들인데 몸의 선은 유려하고, 얼굴은 아름다웠다.
피부만 조금 까무잡잡할 뿐이지 영락없는 엘프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아름다운 얼굴을 한 채 걸걸한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으니 묘한 이질감과 함께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준비는 간소했다.
전사들은 모두 말 위에 올라섰다.
전사들처럼 말 위가 익숙하지 않은 에단은 네빌라의 뒷자리에 앉았다.
전사들의 무장은 전과 같았다. 등에 매단 활과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칼.
두 개가 무장의 전부였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바실리스크의 부산물들로 갑옷과 무구를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건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빠르게 상대를 급습해야 할 시기였다.
여유를 줘서 상대가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남겨서는 안 됐다.
“출전 준비!”
네빌라가 목청을 높였다.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던 전사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우리에게 칼을 들이민 놈들에게 알려 주자고. 감히 누구를 건드렸는지 말이야.”
우오오오오오―!
네빌라가 스산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고, 전사들이 동시에 커다란 함성을 내뱉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혼을 울리는 우렁찬 함성 소리였다. 순간 대지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네빌라가 안장 쪽에 매달려 있던 뿔 나팔을 들었다.
뿌우우우―!
이제 전쟁의 시작이었다.
네빌라를 필두로 전사들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말발굽이 지면을 박차자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적들은 멀리 있지 않았다.
네빌라는 탐색병으로 보이는 이를 발견하자 곧장 활시위를 당겼다.
끼이익!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비명을 흘렸다. 네빌라의 동공은 끝까지 차분했다.
탕!
네빌라가 활시위를 놓았다. 작은 호선을 그리던 화살이 정확히 정찰병의 목에 꽂혔다. 참으로 놀라운 활솜씨였다.
“오.”
에단이 탄성을 내뱉자, 네빌라가 피식 웃었다.
별것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을까지에 거리는 크게 떨어져 있지 않았다. 네빌라와 전사들은 내달렸다. 그러자 지평선 근처에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을 발견하자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나 네빌라의 마을과 다를 바 없는 조악하고 초라한 목책이 눈에 보였다.
“우회한다!”
네빌라는 전사들을 배분했다. 한쪽은 좌익, 다른 한쪽은 우익으로 움직였다.
큰 원을 그리며 언덕을 누비며 이동했다. 확실히 기동력 하나만큼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말들이 작정하고 내달리자 순식간에 마을 근방까지 다가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네빌라가 활시위를 당겼다.
별다른 수신호가 없었음에도 진영에 함께하고 있던 전사들과 맞은편 전사들도 동시에 활시위를 당겼다.
아직 화살이 닿기에는 꽤나 먼 거리였기에 화살촉이 향하는 장소는 하늘이었다.
“쏴라―!”
네빌라가 소리쳤다.
그녀가 가장 먼저 붙잡아 두던 활시위를 놓았고, 그 뒤에 바로 전사들이 시위를 놓았다.
파바바박!
혼탁한 하늘이 화살로 수놓아졌다.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적들이 비명을 토해 냈지만, 대부분은 전사들이 아닌 민간인들이었다.
전쟁은 잔혹하다.
전사들의 전쟁은 더욱 그랬다. 실량과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척박한 환경에서 포로는 사치였다.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은 둘 중 하나는 몰살당한다는 뜻이었다.
한차례 화살 세례를 쏟아부은 네빌라가 놈들의 대응을 가만히 지켜봤다.
기다려 봤지만 놈들의 움직임에서 특별한 것은 감지하지 못했다. 그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바둥거릴 뿐이었다.
‘기우였나?’
군주가 있다면 벌써 이전부터 대응을 시작했을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네빌라가 뿔 나팔을 들고 힘차게 불었다.
우오오오오오오―!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전사들의 함성소리.
말을 탄 전사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실로 포악하면서도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돌격! 모두 쓸어버려!”
네빌라도 목청을 올렸다.
에단은 마을에 진입하기 이전에 네빌라의 말에서 내렸다.
‘감이 좋지 않은데.’
에단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감각이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좋지 않은 감각에 휩싸일 때면 대부분 적중하고는 했다.
에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황은 압도적이었다.
상대는 제대로 된 방어선도 구축하지 못한 채 네빌라와 전사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승리를 향해 전세가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불쾌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에단이 가만히 상황을 관조하고 있을 때.
쿵.
에단의 심장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피가 차갑게 식어 갔다.
차게 식은 피가 전신에 돌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하아.”
에단은 저도 모르게 끈적한 숨을 토해 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부릅뜬 눈이 굴러갔다.
‘저기다.’
에단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저 장소에서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다.
파밧!
에단이 내달렸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순간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될 것이다.
에단은 저기서 느껴지는 기운의 정체가 군주라는 것을 확신했다.
군주가 아니라면 이렇게 꺼림칙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기운을 풍길 수 없었다.
전사들은 아직 지금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눈치챈 것은 에단과 죽은 나무뿐.
키에에엑―!
죽은 나무가 잠에서 깨어나며 귀곡성을 토해 냈다.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좋냐?’
키에에에에에엑―!
죽은 나무가 흥분한 어조로 화답했다. 바실리스크에게서 양분을 흡수한 죽은 나무는 활기가 가득했다.
피식 웃은 에단이 손을 뻗었다.
에단이 응시하는 방향에 땅이 칠흑처럼 검게 물들었다. 마치 찰흙이 움직이는 것처럼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대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면에서 솟아오른 무언가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의 형체와도 같았다.
에단은 녀석을 바라보며 주저 없이 가진 것들을 꺼냈다.
[절망]
[좌절]
에단의 입에서 불길하고 삿된 단어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