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화] 지하 (11)
살벌한 광경이었다.
배신자들의 시체는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형제를 배신한 자들에게 예우를 차릴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두려움과 욕망 때문에 배신을 했다.
적대 관계에 있는 마을이 군주와 손을 잡았다는 게 배신의 이유였다.
‘그럴 리가.’
네빌라는 배신자가 지껄이는 소리가 헛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근방은 황폐했다.
식량도 식수도, 아무것도 없었다.
씨앗을 심어도 싹이 나지 않았고, 비도 내리지 않는다.
사냥과 약탈을 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군주’나 되는 영주가 이딴 황무지를 눈독 들일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유론다의 생각은 달랐다. 유론다는 측근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했구나.’
부족장의 덕목인 현명함과 총명함이 흐려졌다. 탁한 동공으로는 이제 진실을 엿보기가 힘들었다.
‘멍청이가 아니라면.’
군주를 운운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나름의 근거가 있기에 마을을 배신한 것일 터.
여기서 아무리 고민해 봤자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추론에서 그친다.
유론다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더 이상 전사가 아니었다.
안전한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위치.
역겨움 따위의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은 사사로운 것에 불과했다.
부족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무는 마을의 존속이었다.
보고는 모두 들었다.
여기서 아무런 조치조차 취하지 않은 채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마을의 사기는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당한 게 있으면 갚아줘야 한다. 그것이 전사들의 규칙이었다.
단순하지만 합리적인 규칙.
유론다가 감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흐릿한 동공이 앞에 앉아 있는 네빌라를 바라봤다.
“……전쟁을 준비하자꾸나.”
“네.”
네빌라가 주저함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전쟁은 이미 시작했다.
“우오오오―!”
전사들이 목청을 올리며 전쟁을 준비했다. 물자는 단순했다.
이들의 가장 큰 무기는 기동력이었다.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거의 모두 놓고 움직였다.
이들의 싸움 방식은 단순했다.
첫날에 모든 것을 끝낼 작정으로 싸운다.
어찌 보면 미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자원이 부족한 탓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네빌라와 전사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에단은 홀로 유론다의 천막에 찾아가 독대했다.
“일은 끝낸 것 같은데.”
“감사부터 전하지.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네.”
“별말씀을.”
에단의 태연한 반응을 보고 엷게 미소 지은 유론다가 품에서 목걸이를 꺼내서 건넸다.
빛이 바래 있는 목걸이.
화려함이라거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디자인이었지만, 묘한 고아함이 느껴졌다.
‘역시 비슷하군.’
에단이 목에 걸려 있는 세계수의 목걸이와 대조해 봤다. 흡사한 모양새.
‘기운은…… 모르겠군.’
빛이 바란 목걸이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론다가 에단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라면……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겠지.”
“가치?”
“이미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것 아닌가.”
유론다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뭐, 그렇다고 해 주지.”
“전에도 말하지 않았는가. 나이가 먹으면서 느는 것은 눈치밖에 없다고. 끌끌.”
유론다가 끌끌거리며 웃자 에단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런 것치고는 측근의 배신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나?”
“……아픈 곳을 아무렇지 않게 찌르는군.”
“양심은 살아 있네.”
에단과 유론다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뭐, 아직 이건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고. 당장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에단은 지하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다.
한참을 방황하다가 간신히 발견한 게 네빌라와 이 마을이었다.
홀로 방랑했다면 오랜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근처에 도시가 있네.”
“도시?”
“그래. 도시라고 할 만한 곳은 몇 군데 없긴 하지만.”
유론다가 작게 웃으면서 에단을 바라봤다.
“대군주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가?”
“아니,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군주에 대한 정보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수많은 군주가 존재하고, 그중에는 대군주라는 존재가 존재한다네. 밖이 분주해 보이니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겠네.”
“나도 그게 편해.”
“대화가 통해서 좋군. 끌끌, 지하의 대군주는 총 넷.”
포악한 전사 카무잔.
뱀파이어 로드 아모드라.
검은 마녀 아리오나.
그리고 새로운 대군주 블란테.
“블란테와 검은 마녀 아리오나는 동맹을 맺은 것으로 알고 있네. 방랑자에게 들은 이야기라 확신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끌끌끌.”
“그 정도로 충분해.”
“도시를 찾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네. 일반적인 마족이라면 자네의 정체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군주급 존재라면 말이 다르지.”
유론다의 회백색 동공이 에단을 응시했다.
“이 늙은 노파도 눈치챈 사실을 군주나 되는 존재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게나.”
“그러면 골치 아프게 됐는데.”
“더군다나 지하는 넓지. 수많은 군주들과 그들을 통치하는 네 명의 대군주. 지리에 능숙한 자가 돌아다녀도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될지 도통 감이 안 오는군. 끌끌.”
유론다의 말에 에단이 인상을 팍 구겼다.
“암울한 소리만 해 대는군.”
“방법이 하나 있는데. 어떻게 들어 볼 텐가?”
“뭐,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서로 시간도 없는데 지체하지 말자고.”
에단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유론다를 응시하자 유론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잡이를 쓰는 것이네.”
“길잡이?”
“그래. 이번 전쟁을 도와준다면 네빌라를 붙여 주지. 내 전사라서 옹호하는 게 아니라네. 네빌라는 총명하고 현명한 전사야. 추후 부족장 자리에 올라도 이상할 게 없지.”
“원래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예뻐 보이는 법이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상관없겠나?”
에단이 유론다를 가만히 바라봤다.
네빌라는 마을의 전사장이었다. 전사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고, 마을의 모든 전사들이 네빌라를 따랐다.
지금으로써는 네빌라의 대체제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다네.”
“……호오.”
“전사들은 네빌라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어. 훌륭한 전사기는 하지만 전사라 함은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라네. 이번 전쟁…… 상대 전사의 피해가 크다고 한들, 사상자는 발생하겠지. 그게 네빌라가 될 수도 있는 일이네. 네빌라가 죽으면 전사들은 자립할 수 없어. 너무 뛰어난 수장에게 의존하면 전사들은 자립심을 잃는 법이라네.”
에단은 말을 들으며 유론다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핑계로밖에 안 들리는데.”
“……이거 참 눈치가 빠르군.”
유론다가 쓰게 웃었다. 피식 웃은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어차피 들어보니까 선택지도 없는데. 그쪽 말대로 혼자 떠나려고 해 봤자 황무지에서 방황하게 될 운명인 것 같고.”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소리인가?”
“그래. 나도 이대로 떠나면 영 찝찝해서 말이야.”
에단이 기지개를 켜듯 몸을 풀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도와주고 갈게.”
에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전쟁 준비가 한창일 때, 에단이 네빌라 곁으로 다가갔다. 네빌라가 다가온 에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도와준 것은 고맙지만 과한 참견은 안 했으면 좋겠군.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문제니까.”
“누가 뭐래? 나도 내 일이 있어서.”
“일?”
네빌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 노인네한테 의뢰를 받아버려서 말이야.”
“부족장에 무례한 말투는 여전하군.”
“네 부족장이지, 내 부족장은 아니잖아?”
씨익 웃으면서 대꾸하는 에단의 모습에 네빌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전력…….’
네빌라는 에단의 참전이 가지는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일전의 전투에서 네빌라는 에단의 신위를 두 눈으로 지켜봤다.
그야말로 압도적.
일당십, 아니, 일당백의 무력을 가진 게 에단이었다.
만일 상대 마을이 군주와 손을 잡은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역으로 아군이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조급한 출정이었다.
상대의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에단이 참전하기로 하자, 안도감이 느껴졌다. 네빌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에단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걸 보상으로 약속받았지?”
네빌라가 물었다.
에단과 같은 고급 인력을 사용하는 대가였다. 큰 값을 치르더라도 불만은 없었다.
애당초 에단이 없었다면 일전 전투에서 전멸하는 것 그녀 쪽이었을 터다.
에단이 눈을 끔뻑이며 네빌라를 바라봤다. 네빌라가 에단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에단의 손가락 끝이 네빌라를 가리켰다. 네빌라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가 붉게 달아올랐다.
“……뭐라고?”
에단은 대략적인 상황들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네빌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후 사정을 똑바로 말해라.”
“무슨 오해를 했길래?”
에단이 음흉한 미소를 짓자 네빌라가 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말을 말지. 하지만 그러한 조건이라면 승낙할 수 없어. 나는 마을의 전사장이다. 마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는 없어.”
“유론다는 그게 문제라고 하던데?”
“……뭐?”
“전사들이 너를 너무 과도하게 의존한다고. 뭐, 나는 어디까지나 외지인이라 아직 잘 모르겠지만…… 틀린 말인 것 같지는 않군.”
“…….”
네빌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한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부심을 가지는 건 좋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이번 전쟁처럼 쉽게 여길 건 아니잖아? 군주와 협력한 게 헛소문이라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
“전멸은 어떻게 막을 수 있더라도 복구하기 힘들 정도의 피해를 입는 것 아닌가?”
에단이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고작 저딴 목책을 가지고 수성전을 벌일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말이야. 군주의 무력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저 허름한 목책은 손짓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날 것 같은데?”
“…….”
네빌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능청스러운 모습만 보이던 에단이었지만, 그는 이미 마을에 대한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잘 선택해. 네가 하는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지. 너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마을을 지키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제안을 거절한다면 너는 어쩔 셈이지?”
“여기서 기다리겠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에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 냉막함에 네빌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되도 않는 잔머리 굴리지 말고, 지금 여기서 선택해. 나를 고용할 것인지, 아니면 전사들의 목숨으로 도박을 해 볼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