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화] 지하 (9)
지루한 이동이 계속되었다. 전사들도 피로 때문인지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전사들 중 오직 네빌라만이 처음과 같은 자세를 유지 중이었다.
그녀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뛰어난 전사라고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고생하네.’
하지만 에단 본인의 일은 아니었기에 에단이 눈을 감았다.
잠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느릿하게 가는 시간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인원이 줄었고, 보급품은 충분하다.
전사들은 기사들과 달리 따로 시종을 두지 않는다.
자신이 먹을 식량은 안장에 매달아 두고 그때그때 꺼내 먹는다.
하릴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목적지에는 별 탈 없이 도착했다.
“별일 없네?”
부산물은 그 자리 그대로 묻혀 있었다. 후각이 좋은 몬스터들도 땅을 헤집지는 않았다.
에단이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자 네빌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사들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이런 황야에서는 언제 어떻게 위협이 들이닥칠지 예상할 수 없었다. 네빌라가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네빌라보다 그런 점에 있어 무딘 다른 전사들이 껄껄거리며 부산물을 짐수레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워낙 사체가 거대했던 터라 옮기는 것만 해도 대작업이었다.
전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사체를 옮겼고, 에단도 거들었다.
“잠깐.”
사체들을 옮기던 도중 에단이 동작을 멈췄다.
다른 전사들은 에단이 농담을 한다고 여겼다. 에단은 이동할 때에도 실없는 농담을 종종 던지곤 했다.
하지만 에단의 표정과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네빌라는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전투 준……!”
쐐애액―!
화살들이 날아오는 걸 본 에단이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나 혼자라면 충분히 대처가 가능하다.’
불시의 습격.
화살의 숫자는 수십이 넘는다.
매복하던 적들이 타이밍을 재고 습격한 것이다.
최소 한 명은 죽는다. 그것이 에단의 판단이었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에단이 손을 뻗고, 세계수의 목걸이에 깃든 마법을 발현시켰다.
쩌엉―!
반투명한 장막이 전개된다.
방어막의 견고함은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에단의 예상보다 방어막의 범위가 좁았다. 형성된 방어막도 위태로웠다.
‘젠장, 지하라서 그런가?’
세계수의 목걸이는 마나로 가동된다.
죽은 마나로 어느 정도의 대체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불안정함은 감수해야 했다.
에단은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승패가 갈리는 전투에서는 그 정도 변수면 대응하기 충분했다.
화살이 장막에 가로막힌다.
네빌라와 전사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모든 공격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검은 장막의 범위는 수레까지 뻗지 못했다.
그리고 수레 근처에는 부산물을 옮기고 있던 네빌라의 부관과 말들이 있었다.
파바바박―!
부관 또한 뛰어난 역량의 전사였다. 재빠르게 검을 빼들고 쳐냈지만 모든 화살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커헉!”
결국 몇 발의 화살이 부관의 몸통에 꽂혔다.
“록카라―!”
네빌라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런 이름이었어?’
부관의 이름을 처음 들은 에단이 장막을 해제했다.
에단에게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록카라를 어떻게든 구출하는 것과 상대의 진형을 흔드는 것.
그 순간 록카라와 에단의 눈이 마주쳤다.
록카라가 부릅뜬 눈으로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전까지 에단을 노려보던 시선과는 결이 달랐다.
‘그래.’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질주한 곳은 화살이 쏘아진 방향.
에단은 보이지 않는 속도로 상대의 진형에 도달했다. 에단이 칼을 뽑아 들었다.
땅에 반쯤 묻혀 있는 전사들은 어림잡아 서른.
반면 에단은 혼자.
하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반갑다. 개새끼들아.”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죽여―!”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은신해 있던 전사들이 몸을 일으키며 칼을 빼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언가를 채 하기도 전에 수장은 에단의 검에 목을 꿰뚫렸다.
“커, 커헉!”
관통 부위와 입에서 피가 울컥거리며 세어 나왔다. 녀석을 응시하는 에단의 눈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다.
촤악!
에단이 검을 뽑았고, 그대로 녀석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가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녀석의 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덮쳐―!”
우두머리가 죽은 걸 목격한 한 전사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전사들이 에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사들의 살기에 피부가 저릿했다.
에단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전장 한복판에 들어온 순간부터 짜릿한 감각이 온몸에 휩싸였다.
생사의 갈림길. 목숨을 건 줄타기.
위험했지만, 그만큼 중독적이기도 했다.
에단이 날뛰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도끼와 칼날들. 녀석들이 빼내 든 검에는 검은색 기운이 맺혔다.
아무리 에단이라도 오러가 둘러진 검을 튕겨 내지는 못한다.
유일하게 튕겨 낼 수 있는 부위는 왼손뿐이다.
에단이 고개를 젖히며 칼날을 피해 냈다. 스친 부위에서 피가 살짝 흘렀다. 에단의 사나운 안광이 공격한 적에게 향했다.
“위험하잖아.”
뻐억―!
에단의 발이 적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적의 입이 쩍하고 벌어지며 몸이 허물어졌다.
그 순간 빈틈도 훤히 드러났다. 에단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촤악!
에단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우악스러운 검격이었지만 검 끝의 궤적은 깔끔했다.
적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에단이 상체를 숙였다. 에단의 머리가 있던 곳에는 적이 칼이 있었다.
“미친!”
녀석이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눈앞에서 믿기지 않는 광경이 벌어졌다.
“미친은 욕이고, 이 시발새끼야!”
에단이 몸을 회전시키며 그대로 칼을 찔러 온 녀석의 정강이를 후려갈겼다.
빠아악―!
“크아아아악!”
녀석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단 일격에 정강이뼈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에단은 놈이 주저앉는 순간에 그대로 무릎을 차올렸다.
빠각―!
녀석의 얼굴이 완전히 부서졌다.
휘익!
에단은 왼손으로 다가오는 칼날을 움켜쥐었다.
콰드드드드득―!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자루를 쥐고 있던 적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괴, 괴물…….”
“괴물은 아니고.”
에단의 검 끝이 그대로 녀석의 가슴을 관통했다. 적의 입에서 피가 울컥거리며 세어 나온 걸 본 에단이 검을 뽑았다.
아직 적들의 숫자는 많았다.
“하하.”
에단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네빌라는 쓰러진 록카라를 향해 달려갔다.
록카라가 네빌라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빌라!”
피가 섞여 탁한 고함 소리에 네빌라의 발이 멈췄다.
“당신이 올 곳은 이쪽이 아니오. 당장 전장에 합류하시오!”
록카라의 입에서 피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복부와 가슴팍, 그리고 어깨와 허벅지에 박힌 화살들이 보였다.
화살촉이 깊은 곳까지 틀어박혀 있었다.
조치하기에는 늦었다. 네빌라는 전사들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수장이라는 자리는 때때로 냉혹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였다.
“……내가 실수했군.”
네빌라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록카라가 힘겹게 웃었다.
“……빨리 가시죠.”
“그래. 복수는 해 주마. 그리고…… 버텨라.”
네빌라가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현실적으로는 힘겨운 요구였다. 화살이 박힌 장소가 좋지 않았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만 봐도 그랬다.
그러나 록카라는 네빌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약한 소리를 내뱉지도 않았다.
네빌라도 록카라를 위로하지 않고 그대로 말 위에 올라탔다.
남은 전사들이 연민의 눈으로 록카라를 슬쩍 바라봤다. 그들 또한 말 위에 올라타고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전부 죽여라!”
“우오오오오!”
네빌라와 전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이미 녀석들의 전열은 아비규환이었다.
에단은 적진을 헤집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바닥에 피를 뿌리며 죽어 간 전사들의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걸 모두 혼자서 했다고?’
네빌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에단이 괴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에단의 안광이 번뜩였다.
피 칠갑을 한 에단은 아직 지치지 않고, 적을 참살하고 있었다.
녀석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놈들은 매복을 위해 말들을 포기했다.
기병과 보병의 전력 차이는 확연하다. 숫자는 아직 놈들의 우세였지만 흐름은 넘어왔다.
콰직!
에단이 적 한 명의 얼굴을 후려쳤다. 녀석은 그대로 얼굴이 박살 나며 즉사했다.
에단에게 다가가는 전사들을 그야말로 갈려 나가고 있었다. 에단이 하는 모든 공격들은 적들을 즉사시킬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에단이 몸을 비틀며 그대로 검을 휘두르자 뒤를 잡으려던 적의 몸이 그대로 두 동강 났다.
에단이 다시 한번 전사의 피를 뒤집어썼다.
“이것밖에 안 돼?”
에단의 몸에서 압도적인 기세가 흘러나왔다.
드래곤의 피어와 뒤섞인 기세는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적이었다.
적들은 더 이상 에단을 향해 접근하지 못했다.
전사들이라고 공포를 못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지닌 공포를 억누르며 싸워 나가는 것뿐이지.
녀석들이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놈들의 시선이 에단에게 팔린 사이에 네빌라와 전사들은 적들의 목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네빌라와 전사들이 와해된 적진을 다시 한번 헤집었다. 놈들은 제대로 된 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죽어 나갔다.
“괴, 괴물…….”
적 전사 중 한 명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다 죽었다.
전투가 끝났다.
주변은 온통 시체 천지였다.
스읍, 후우―
에단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깨와 흉곽이 들썩였다. 시뻘겋게 충혈된 에단의 눈은 아직 번들거렸다.
달아오른 몸에서 김이 흘러나왔다.
에단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칼에 묻어 있던 피를 털어 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검집에 밀어 넣었다.
“…….”
전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지금 에단의 모습과 풍기는 분위기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포악하고 감각이 예민한 말들도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상황을 정리하는 것도 좋은데. 살아 있나 확인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에단이 말하자, 네빌라가 말고삐를 움켜쥐고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록카라가 있는 장소로 달렸다.
전사들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지는 말과 그녀를 바라봤다.
전사들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고, 그만큼 동료를 잃는 경험이 많았다.
전사들이 보기에 록카라가 살아남을 확률은 희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