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화] 지하 (8)
에단은 놀라지도, 동요하지도 않고 물끄러미 유론다를 바라봤다.
하지만 유론다의 탁한 동공은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에단의 감정을 읽어 냈다.
고요한 분노.
유론다는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 또한 운명인가.’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기에 유론다는 오랜 세월을 살아올 수 있었다.
유론다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하늘은 천막에 막혀 있었다.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곳은 언제나 답답했고, 맑은 하늘은 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유론다가 쓰게 웃었다.
“들었던 이름은 페온 블란테. 그가 새로운 군주로 자리 잡았다고 했네. 혹시 아는 바가 있나?”
“……알지.”
아주 잘.
에단이 실소를 터트렸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페온은 본래부터 지하에 자리 잡은 자였다.
‘죽은 나무와도 연관이 있겠군.’
에단이 잠재되어 있는 죽은 나무의 기운을 느꼈다.
생각이 얼추 정리되었다.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도시로 향해야겠어.’
“떠날 생각이군.”
유론다가 말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야. 그리고 정보 고마워.”
“끌끌, 고맙긴. 마을을 위해서 힘써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유론다가 탁한 눈으로 가만히 에단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 목걸이는…….”
에단의 목에 있는 목걸이.
최근 들어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위급 시에는 여분의 목숨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목걸이였다.
에단이 작게 웃으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못 줘.”
“내가 그렇게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네.”
유론다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도 목걸이의 형태였다.
금이 가고 빛이 바래 있는 목걸이.
에단은 유론다가 꺼내 든 목걸이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유론다를 바라봤다.
“뭐야, 지금 자랑하는 거야?”
“그럴 리가. 다만 부탁할 게 있어서 말이지.”
“부탁?”
“자네의 도움으로 우리 부족이 많은 은혜를 입었네. 그래서 또 다른 부탁을 하기 미안하지만, 마을의 책임자로서 안면몰수할 때도 필요하단 것을 이해해 주면 하네.”
“흐음…….”
에단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주름지고 노회한 유론다의 얼굴에서는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들어는 보지.”
“저희 마을의 가장 큰 위협은 타 부족이네. 어쩔 수 없는 순리지.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본론만 말하지.”
“바실리스크의 사체를 숨겨 뒀다고 들었네. 곧 사체를 옮기기 위해 전사들을 보낼 생각인데 함께해 줄 수 있나?”
“보상은?”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 목걸이가 전부라네.”
유론다가 엷게 웃었고,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낡아 빠진 목걸이가 왜?”
“자네가 차고 있는 목걸이. 세계수와 연관되어 있지 않나?”
에단이 눈매를 좁혔다.
“이제 일일이 지적하기도 힘들군.”
에단의 반응을 본 유론다가 웃었다.
“늙으면 여러 가지를 알게 되는 법이야. 과거에는 우리 부족도 풍요로움이란 것을 알던 때가 있었다고 하네. 이 목걸이는 그때의 상징이자 증표, 그리고 열쇠이기도 하지. 자네가 메고 있는 목걸이와 마찬가지로.”
“…….”
에단은 말없이 유론다를 응시했다. 시선이 얽혔다. 입을 연 것은 에단이었다.
“쯧, 이번이 마지막이야.”
“감사하네.”
아단의 답변에 유론다가 웃었다.
에단이 천막 밖으로 나섰다.
마을은 숙취로 인해 비틀거리는 전사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분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에단은 그것이 사체를 옮기기 위한 사전 준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사들 사이에서 네빌라의 모습이 보였다.
에단이 네빌라가 있는 곳으로 향해 다가가자 네빌라가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군. 족장님이랑 무슨 대화를 나눈 거지?”
“너희들이 못 미더워서 같이 따라가라고 하더라고.”
“뭐?”
네빌라의 인상이 일그러지자 에단이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인데 뭐 어쩌라고.
“…….”
못마땅한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보던 네빌라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에단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큰 전력이었다.
이 척박한 땅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사들의 목숨은 하나하나가 매우 소중했다.
이번 원정에서 만일 사상자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을에는 엄청난 타격이 있을 테다.
마을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네빌라는 자존심을 접어 두고 현실과 타협했다. 이미 에단의 무력은 그녀를 포함해 모든 전사들이 알고 있었다.
“방해나 되지 말도록.”
“튕기기는.”
피식 웃은 에단이 전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술자리를 한 번 가져서인지 전사들은 에단을 호의적으로 대했다.
단 한 명.
네빌라의 부관을 제외하고.
‘귀여운 새끼.’
에단이 전사들을 돕자, 순식간에 준비가 끝났다.
이들의 습성은 유목민족과 흡사했다. 다른 게 있다면 말이 육식을 하고 조금 사납다는 것?
‘그래도 보다 보니까 귀엽네.’
에단이 말의 갈기를 만지작거렸다.
말은 눈을 감고 에단의 손길을 즐기며 투레질을 했다.
“허, 정말 신기하군.”
다른 전사들이 놀란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자신들의 말들은 매우 흉포했다.
말 하나를 길들이고 유대를 쌓기 위해서는 억겁의 노력이 필요했다.
마을에서 말을 다루지 못하는 전사는 없었다. 말을 다루지 못하면 전사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사의 자질이 있어도 말과의 교감은 다른 문제였다.
마을 구성원 중에서는 전사의 자질은 충만했지만, 말을 다루지 못해 전사가 되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전사들은 정립된 방법으로 말과의 교감을 시도했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 내려온 경험들과 관록이었다.
그렇게 해도 실패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에단은 그러한 노하우나 기술 같은 것도 사용하지 않은 채 말과 교감했다.
전사들이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네빌라가 물끄러미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에단이 고개를 돌려 네빌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뭐야.’
싱겁기는.
헛웃음을 지은 에단은 또다시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리니 네빌라의 부관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네.’
에단이 실소를 터트렸다.
* * *
원정대가 빠르게 꾸려졌다. 길에 오르는 전사들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은 토벌이 아닌 부산물의 회수였기 때문이다. 에단이 함께하니 전사들의 부담도 적었다.
전사들은 에단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외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에단을 신용했다.
에단은 조금 떨떠름한 느낌이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지루한 행군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전사는 적었다.
그들은 아직 지쳐 있었고, 결과적으로 부산물을 회수하기 위해서 꾸려진 전사들은 에단과 네빌라를 포함해 열도 채 되지 않았다.
원정에 참여하는 전사들도, 마을에 잔류하는 전사들도 표정이 좋았다. 심적 부담이 덜어졌기 때문이다.
바실리스크를 토벌한다는 행위 자체는 명예로운 일이었지만, 마을의 안위를 챙길 수 없었다.
있는 전사들을 모두 투입한다고 한들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마을을 돌볼 수 없었다.
만일 전사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타 부족이 습격해 온다면 그대로 전멸이었다.
전사들이 가지는 심적 부담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녀오지.”
네빌라와 에단, 그리고 전사들이 여정에 올랐다.
“적응되는 것도 엿 같네.”
황량한 대지를 바라본 에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부터 진저리가 나기 시작했다.
“불평하지 마라.”
네빌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여정에 오르면서 전사들의 숫자는 줄었지만, 반대로 말과 자원은 풍부했다.
부산물을 옮기기 위해서는 짐수레가 많이 필요했다.
에단은 수레에 걸터앉아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네빌라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에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늘어지게 누워서 머리를 괸 채 앞을 바라봤다.
‘지상이 그립군.’
시간은 흐르지만 할 게 마땅히 없었다.
풍경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해도 주변에는 온통 감수성이 피폐해지는 황폐한 땅이 전부였다.
에단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낮잠이라도 잤으면 했지만 좋아진 체력 탓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지루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마법이 편하긴 해.’
이곳에도 마법은 있을 것이다.
지하의 군주들은 마법을 사용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에단과는 별다른 연이 없었다.
전사들은 마법을 전혀 다루지 못했다.
마법을 다룰 수 있었으면 작금의 문제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휴고나 가토라도 있으면 놀리기라도 하는데.’
지상에서 이렇게 먼 길에 오를 때는 그래도 형편이 좋았다.
여정이 길어지면 지루해지기는 했지만 둘은 놀리는 맛이 있었다.
시답지 않은 것들로 티격태격하는 것만 봐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사들의 시시콜콜한 농담은 에단의 취향이 아니었다.
생긴 거는 영락없는 샌님인 놈들이, 하는 대화는 야만적인 전사나 다름없었다.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저열한 농담들이 재밌을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몇 번 반복하자 재미가 없었다.
‘야, 키아나.’
― 왜.
‘평소에는 그렇게 말이 많더니 뭐가 문젠데? 페온의 관해서 말이라도 좀 해 봐.’
― ……나도 이제는 잘 모르겠어. 그 빌어먹을 새끼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 그리고…… 이제는 한계야. 여긴 나랑 상극이야. 지금까진 어떻게 버텼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왜 약한 소리야? 공기가 조금 탁한 것 말고는 다를 것도 없는데.’
― 그건 네가 이상한 거고, 미친 새끼야. 난 아슬란에 깃들어 있는 존재야. 내가 활개 칠 수 있는 이유는 신성력이라고. 네 기운들이 묶여 있는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야.
‘그럼 뒈진다고?’
― 말 좆같이 할래? 난 이미 한 번 뒈졌어. 두 번 죽을 생각은 없어. 그냥 잠들 뿐이야. 지상으로 돌아가거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면 눈을 뜰 수 있겠지.
‘진짜 도움 안 되네.’
― ……너는 진짜 씹새끼야. 페온 그 빌어먹을 새끼 죽탱이는 돌리고 싶었는데…… 제기랄…….
키아나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져 나갔다. 에단은 그녀의 말이 장난이나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죽탱이는 내가 돌리고 후기 남길 테니까, 피곤하면 잠이나 자.’
― ……하, 새끼…… 기대할게.
키아나의 의식이 끊어졌다. 에단은 칼집을 들어 가만히 아슬란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기대해도 좋아.’
에단은 반드시 페온의 얼굴을 후려치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