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4화] 지하 (7)
“어, 고마워.”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고맙다고 말했다. 네빌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전의 일은 사과하지. 변명하지 않겠다.”
“됐어, 끝난 일인데. 나도 원하는 게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말했잖아.”
“지상으로 돌아가는 일 말인가?”
“그래.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어.”
네빌라가 눈살을 찡그렸다.
“욕심은 화를 불러오는 법이다.”
“그 화가 나를 피해 가는 것 같더라고.”
에단이 히죽 웃으며 말을 넘겼다.
날은 저물지 않았다.
지하는 지상과 달리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했다.
흐린 날씨가 계속됐다. 그러다 보니 낮과 밤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흘렀는지도 잘 모르겠군.’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고개를 드니 흐린 하늘이 보였다. 기분이 묘하게 찝찝했다.
마을의 중심에서는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사들과 마을 마족들이 모여 전사들이 가져온 바실리스크의 고기와 피를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었다.
에단이 먹어 본 바실리스크의 고기는 딱히 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맛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배가 고프니 먹을 수 있는 수준.
하지만 불에 익히니까 꽤나 그럴듯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에단의 코끝이 움찔거렸다.
에단과 네빌라가 연회가 벌어지는 곳 중심으로 향했다.
전사들과 마을 사람들이 네빌라를 보자 반갑게 맞이했다. 함께 온 에단에게도 선뜻 다가왔다.
에단은 커다란 모닥불 앞에서 구운 바실리크의 고기와 피를 먹었다.
적당히 양념을 했는지 이전보다 훨씬 먹을 만했다.
에단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기를 우물거리자 네빌라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전보다 입에는 맞는 모양이군.”
“어, 역시 불은 문명화의 상징인 것 같아. 비교할 수가 없는 수준인데.”
에단의 말이 재밌었는지 네빌라가 작게 웃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지상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거야. 수많은 군주들의 목표가 지상을 정벌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지상으로 올라간 군주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아. 그만큼 올라가는 방법도 한정되어 있다는 소리겠지.”
에단은 고개를 돌려 네빌라를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 배려해 주는 거냐?”
“……오지랖이라고 생각해라.”
에단이 고기를 마저 뜯으며 말했다.
“방법이 없다는 건 아니네. 나도 돌아가기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그만큼 왕래하기가 수월했다면 이미 지상은 쑥대밭이 되었겠지. 네빌라, 너는 전사들을 이끄는 수장이지?”
“그래. 나는 전사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전사장이다.”
네빌라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엿보였다. 에단은 그 모습이 썩 괜찮게 느껴졌다.
“나도 그런 애들이 있어. 내가 없어도 어련히 잘할 놈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체할 수는 없잖아.”
“…….”
에단의 말을 들은 네빌라가 동그레진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가만히 에단을 응시하던 네빌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또 실수했군.”
“사과할 건 없어. 그것도 그거고…… 여긴 나랑 잘 안 맞아. 목이 계속 칼칼하다고.”
목이 칼칼하다는 말에 네빌라가 잔을 내밀었다.
“견뎌라. 전사라면 앓는 소리를 함부로 내면 안 된다.”
“꼰대 같기는.”
피식 웃은 에단이 피를 마셨다.
역시나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피비린내와 끈적한 농도 탓에 갈증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에단이 혀를 쭉 내밀었다.
“여긴 따로 마실 건 없나? 이제 이거 못 마시겠는데.”
“……배부른 소리를 하는군. 설마 너는 우리가 바실리스크를 사냥하는 이유가 순전히 식량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뭐, 비늘이나 뼈도 쓰려고 했겠지.”
“……바실리스크의 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 근방의 마수들은 모두 끔찍한 독을 지니고 있지. 해독제가 있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독들은 마땅한 해독제도 없어. 하지만 바실리스크의 피를 마시면 그 독에 내성을 지니게 되지.”
“오, 그렇다고?”
“그래. 그것뿐이 아니야. 신체 능력과 면역력도 상승하고, 노화도 늦추지. 주술자들의 말로는 다른 효능도 많다고 하지만 내가 아는 건 이 정도 수준이군.”
“그 정도면 뭐…….”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들이 큰 위험을 감수하고 바실리스크를 사냥하러 다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에단은 바실리스크를 사냥하기 전 이미 그 정수를 흡수했다. 죽은 나무로 생명력과 마나를 흡수하면서 어지간한 특성들도 함께 흡수했을 것이다.
그것들을 구태여 내색할 필요는 없었기에 에단은 묵묵히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네빌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같이 마수들이의 피를 마시는 건 아니야.”
네빌라가 몸을 일으키고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커다란 항아리를 짊어지고 왔다.
“오늘은 연회다! 마음껏 먹고 마셔라!”
네빌라가 바가지로 항아리 안에 든 액체를 퍼 에단에게 따라줬다. 풍기는 향이 꽤나 괜찮았다.
‘술인가?’
에단이 냄새를 몇 번 맡다가 액체를 들이켰다.
에단의 예상대로 항아리에 담겨 있는 액체는 술이었다. 독하거나 역한 것도 아니고, 맛도 괜찮았다.
“처음 먹는 피는 관습 같은 거다. 좋은 술은 우리에게도 귀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도 아낄 수는 없는 노릇.”
네빌라가 호쾌하게 웃었고, 에단도 마주 웃었다.
어느 정도 흥이 오르자 마을 사람들이 일어나 모닥불 주위를 서성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에단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물었다.
“군주들이 지상을 노리는 이유가 있나?”
“글쎄? 그 괴물들의 심리는 이해하는 게 의미가 없어.”
“그런가.”
“힘이 있으면 해소하고 싶은 게 당연한 법이지. 우리도 이번에 힘을 얻었어. 바실리스크를 직접 처치하지는 못했지만, 그 살과 피를 먹게 되었지. 곧 이 소식은 주변에 퍼지게 될 거고 다른 마을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거야.”
네빌라가 말을 이어 나갔다.
“보다시피 이곳은 척박해. 풍요롭지 못하지. 지상에도 이런 곳이 있나?”
“어.”
“그럼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알겠군. 우리에게 약탈은 생존이야. 강하면 살아남고, 약하면 죽는 거지. 그곳이 이곳의 순리고, 모든 전사들과 마을 사람들은 그 순리를 원망하지 않아.”
“세력을 확장할 생각인가?”
“아니, 몸집을 불리면 둔해질 뿐이야. 이 정도면 충분해. 우린 순전히 경쟁자를 줄일 뿐이야.”
네빌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에단은 네빌라의 행동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이들에게는 이들의 삶이 있는 것이다.
에단 또한 누군가에게서 빼앗는 삶을 살아오며 여기까지 올라왔다.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에단은 모종의 시선을 느꼈다.
슬쩍 눈을 돌리니 네빌라의 부관이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끼.’
에단이 피식 웃었다.
대충 무슨 생각을 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난 이만 들어가 자련다.”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네빌라도 따라 일어났다.
“지내면서 머무를 곳을 안내해 주지.”
“딱히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아니야.”
“그런 배부른 소리는 내가 용납 못 해.”
네빌라의 눈매가 좁혀지며 에단을 데리고 천막으로 향했다.
에단은 네빌라가 안내해 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은 조촐했다.
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침대 하나가 있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면 된다.”
“정말 뭐가 없는데?”
“잠자리는 가리지 않는다고 한 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
에단이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생각보다 튼튼한 것 같았다.
‘편하지는 않군.’
그래도 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았다. 에단이 눈을 감고 말했다.
“잔다.”
“그래.”
네빌라가 천막을 빠져나갔다. 에단은 눈을 감고 생각들을 정리했다.
‘군주들이라.’
에단은 먼저 군주들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지하는 에단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조금 성향이 과격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었지만, 그건 이들이 살아오는 환경 탓이 컸다.
‘결국 이곳도 누군가 살아가는 곳이군.’
가진 자는 더 많은 것들을 가지려고 하고, 없는 자는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것은 지상이나 이곳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문명화가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빛이 드리우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강하면 모든 것을 얻지만, 약하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
에단이 눈을 감았다. 얕은 잠이었다.
* * *
눈을 떴다.
길게 자지는 않았다.
에단의 몸은 가벼운 잠으로도 효율적으로 피로를 해소시켰다.
에단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아슬란을 바라봤다. 키아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에단이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나가자 불 꺼진 모닥불 주위에서 술에 취한 마족들이 늘어져서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살 만한가 보군.”
피식 웃은 에단이 하늘을 바라봤다.
여전히 흐릿한 잿빛의 날씨였다. 에단은 유론다의 천막으로 향했다.
에단이 천막의 입구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유론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어깨를 으쓱한 에단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앉아 있는 유론다가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회는 즐거웠는지 모르겠군.”
“나쁘지 않았어. 잠깐 잤다고 피로도 풀렸고.”
에단이 팔을 붕붕 휘저으며 말하자 유론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무슨 용무가 있어서 이 노파를 찾아온 건가?”
“슬슬 본론을 꺼내야 될 것 같아서.”
“비록 가진 거라곤 낡아빠진 지식이 전부지만 최대한 도와주지.”
“그래 주면 고맙지. 혹시…… 페온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
질문을 들은 유론다가 가만히 에단의 눈을 응시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렇다고 하기에는 반응이 조금 묘한데.”
“그 페온이라 이는 혹시 인간인가?”
에단이 잠시 고민하듯 턱을 매만졌다.
“글쎄? 나랑 좀 비슷한 상태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추측되는 자는 있군.”
“오, 그래?”
에단이 눈을 빛냈다.
유론다를 바라보는 에단의 눈에는 적의와 살의가 넘실거렸다.
유론다는 눈빛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보고만 있어도 소름이 끼치는 살기였다.
“지하는 넓다네. 수백이 넘는 군주들이 각자 자신의 영토를 지니고 있지. 이곳처럼 아무도 가지지 않는 버림받은 땅은 매우 드물고.”
유론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얼마 전, 소문이 들려왔네. 물론 확실하지는 않아. 지나가다 마을에 들른 방랑자가 전해 준 이야기였으니까.”
“상관없어. 듣고 싶군.”
“……한 인간이 군주의 자리에 올라섰다고 하더군. 군주의 자리에 오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지. 군주를 죽이고 그 왕위를 찬탈하면 되니까 말이야. 왕위를 빼앗긴 군주는 군소 영토의 군주였지. 다른 군주들은 그를 비웃었다고 하더군.”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인간 출신 군주는 지금 넷밖에 되지 않는 대군주의 자리에 올라섰다네. 인간으로서는 최초로 지하를 호령하는 맹주로 자리 잡은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