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323화 (323/398)

◈ [323화] 지하 (6)

“인간이라고?!”

네빌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마을의 전사장으로서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점처럼 보이는 마수들의 정체를 판별할 수 있었고, 짙은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네빌라는 에단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단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영락없는 마족이었다. 그가 쓰던 기운도 죽은 마나였다.

네빌라가 적의를 드러내려고 하자 에단이 볼을 긁적였다.

“그래서 뭐, 해보자고?”

순식간에 기세가 바뀌었다.

천막 안이 사나운 위압감으로 잠식되었다. 에단은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에단은 분위기의 주도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전부 상대하는 건 힘들 수 있어도.’

제 한 몸 빠져나가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에단은 이미 이들의 수준을 파악했다.

에단의 눈이 가늘어지자, 부족의 수호 전사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감히!”

“야.”

에단이 수호 전사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무저갱 같은 에단의 동공을 바라본 수호 전사의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에단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너, 그거 뽑으면 죽는다.”

이건 경고였다. 과장이 조금도 첨가되지 않은 경고.

저자가 검을 뽑는 순간,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여기를 휩쓸 생각이었다.

일이 조금 귀찮아질 수는 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휘둘리는 건 무조건 피해야 한다.’

모든 상황이 에단에게 불리했다.

에단은 지금 가진 것도 없었고, 정보도 없었다. 여기서 저 노인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순간, 에단은 주체성을 잃어버린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에단의 흉흉한 기세에 네빌라가 이를 갈았다.

“……나를 속인 건가?”

“뭘 속여. 애당초 내가 인간인 걸 물어보기나 했던가?”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에단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네빌라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에단은 언제라도 아슬란를 휘두를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감각이 쭈뼛하고 곤두섰다.

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조심했다. 전투의 결과는 찰나에 결정지어질 것이다.

“…….”

아무런 미동도, 동요도 없던 족장, 유론다가 엷게 웃었다.

“넘겨짚은 건데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군. 클클.”

“……뭐?”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순간 목이 뻐근해지며 머리가 뜨거워졌다. 놀아나지 않으려고 했건만 놀아난 건 자신이었다.

‘멍청했군.’

에단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그리고 기세를 더욱 발산했다.

이미 천막 안에는 무형의 기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네빌라와 수호 전사는 숨 쉬는 것도 버거워했다.

하지만 유론다는 가만히 앉아서 묵묵히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고요했고,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먼저, 넘겨짚은 건 미안하네. 나도 확신을 할 수 없던 일인지라. 일단 기운을 거두는 게 어떤가.”

“거절한다면?”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 이상 놀아나는 건 사양이다.

상황을 반전시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판을 뒤집는 행동이다.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 협박만으로는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네.”

유란다의 부드러운 어조.

에단이 하, 하고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천막을 가득 채운 기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단이 기운을 갈무리했다.

“고맙네.”

“후, 그래서. 짐작하게 된 계기는?”

“유추했을 뿐이네. 여러 상황이 이질적이라고 느꼈으니까.”

“확실히 내가 좀 그렇긴 하지.”

에단이 빈정거렸다.

네빌라와 수호 전사가 매서운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봤다.

“목적이 있다는 것도 단순한 유추인가?”

유론다가 긍정의 미소를 지었다. 에단이 인상을 팍 구겼다.

“뭐, 부정하지는 않겠어. 나도 자원봉사자는 아니거든 사실 은원을 따지고 보면 대뜸 칼을 들이민 건 얘들이기도 하고.”

수호 전사와 유론다가 동시에 네빌라를 응시했다.

에단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네빌라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내 사냥감을 탐낸 것도 모자라서, 내 목까지 위협한 놈들이 뭐가 예쁘다고 퍼 주겠어. 원하는 건 당연히 있지.”

“그 원하는 것은 지상으로 돌아가는 건가?”

“……노인네가 눈치가 빠르군.”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는 건 눈치밖에 없더군. 이렇게 추한 모습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비법이기도 하지.”

유론다가 쓸쓸하게 웃었다. 유론다가 가만히 에단을 응시하며 말했다.

“적의가 없다는 것은 확인했네. 확실히 지상에서 온 이가 우리를 이유 없이 학살하거나 핍박할 이유는 없을 테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우리에게는 재산도 보화도 없다네.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런 황량한 땅이 아닌, 중심지로 향하는 게 맞을 테니까.”

“중심지?”

“이런, 지상 사람인 걸 깜빡했군. 끌끌.”

유론다의 말에 헛웃음을 지은 에단이 눈썹을 긁적였다.

“역시 연륜은 못 당하겠군. 순순히 인정하겠어. 나는 아무런 지식이 없어. 적의를 보인 건 사과할게. 하지만 내 상황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처음 만난 녀석이 이런 날강도 녀석들이라 어쩔 수 없었으니까.”

“…….”

네빌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단을 쏘아봤지만, 에단은 가볍게 무시했다.

에단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너희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어. 듣기로는 바실리스크인가 뭔가가 꽤나 가치 있는 물건이라며? 하지만 나한테는 별로 쓸데없는 물건일 뿐이야.”

“사체를 넘겨준다는 말인가?”

“그래. 대신 조건이 있어. 나는 정보가 필요해. 어차피 그쪽도 날 여기서 내보낼 수는 없을 거 아니야?”

생각이 바뀌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가장 중요한 생존과 탈출에서, 이곳의 정보를 습득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침공은 예정된 미래야.’

지상에서는 잃을 게 많았다.

에단이 조급하게 움직인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에단은 함정에 빠져 지하에 홀로 떨어지게 되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내가 가지 않았다면.’

다른 녀석들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에단은 수많은 생명을 책임지고 있었다. 각자마다 돌아갈 고향과 가정이 있었다.

에단은 그들을 사지로 밀어 넣을 생각이 없었다.

타인이라면 상관없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에단을 믿고 목숨을 건 자들이었다.

에단은 가슴이 갑갑했다.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단 한 번도 이런 부담을 느낀 적이 없었었다.

그렇다고 앓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은 에단이었다.

에단은 병사들의 지주였다.

지휘관이 흔들리는 순간 병사들은 불안에 빠지기 시작한다.

불안에 빠진 전사들이 와해되는 것은 한순간일 터.

그렇기에 에단은 홀로 나섰다.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겠군.’

이곳은 상대의 본거지였다.

대책 없이 들이박는다면 아무 승산이 없었겠지만, 에단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조급해한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지상에서 입은 피해라고 해 봤자 실종된 자신뿐.

블란테의 차기 계승자이자, 지휘관이라는 직책이 있었지만 아직 블란테의 주인은 빈센트였다.

‘아버지가 어련히 하겠지.’

아직 에단은 빈센트의 무력이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했다.

‘아마 괴물 그 자체겠지.’

크리스토는 에단의 예상보다 위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의 크리스토가 아무리 발악해 봤자 빈센트는 넘을 수 없었다.

‘걸리는 건 있지만.’

원작에서 빈센트는 사망하고, 블란테는 몰락한다.

에단은 그 내막을 알지 못한다.

‘아버지와 첸, 그리고 네이드까지 있는데 전멸이라고?’

믿기지 않는 상황.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에단이 나서서 예견된 미래를 비틀어 버렸지만, 아직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지하와 연관된 것은 확실하다.

확증은 없었다.

‘감이지.’

그리고 에단은 자신의 감을 꽤나 신용하는 사람이었다.

에단이 유론다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유론다가 눈을 감고 작게 웃었다.

“네빌라.”

“…….”

네빌라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자네는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마을을 위해 힘을 썼으니 말이야.”

“……죄송합니다.”

“사과도 그만 듣고 싶네. 자, 본론으로 돌아가서. 자네의 이름은 뭔가? 통성명이 우선일 것 같은데. 이 늙은이의 이름은 유론다라고 하네.”

“에단.”

에단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굳이 성까지 붙여서 말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협상을 받아들이겠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만. 네빌라와 전사들에게 선처를 해 주어서 고맙네.”

유론다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딱히 감사 인사를 받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거부하지는 않겠어.”

“호탕한 친구로군. 자, 먼저 무사히 돌아온 전사를 위해 연회를 열자꾸나. 자네도…… 여독은 좀 풀어야 하지 않겠나?”

에단이 유론다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급해서 좋을 건 없었다.

*   *   *

에단과 네빌라가 천막 밖으로 나갔다.

네빌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에단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삐지기는.’

에단은 굳이 네빌라의 감정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먼저 그 옷부터 갈아입어라.”

네빌라가 에단을 천막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확실히 지금 에단이 입고 있는 옷들은 너무 눈에 띄었다.

에단의 차림새는 전쟁 당시 그대로였다.

에단은 갑옷을 입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몸과 감이 둔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급 상황에는 언제든지 보호막을 전개할 수 있는 목걸이가 있었다.

에단이 세계수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에단은 블란테의 정복과 서코트만을 걸친 채 전쟁에 참전했다. 멀끔하던 정복은 지금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피식 웃은 에단이 옷을 갈아입었다.

에단은 이곳의 전사들이 입는 옷을 입었다. 가죽과 천을 엮어서 만든 의상이었다.

‘내구성은 나쁘지 않군.’

전사들의 의복인 만큼 움직이기도 괜찮았다. 옷을 모두 입은 에단이 아슬란을 바라봤다.

“또 뭐 때문에 꿍해 있어?”

네빌라와 접촉한 직후부터 키아나는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 ……시끄러.

키아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에단이 키아나에게 뭐라 물으려다가 말았다. 키아나가 이런 반응을 보인 이상 따진다고 달라지는 게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에단이, 아슬란이 착검되어 있는 검집을 허리에 매달았다.

거울은 없었지만 옷매무새에 신경 쓸 상황은 아닌지라 그대로 천막 밖으로 나섰다.

천막 밖에는 네빌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눈매를 좁히고 에단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었다.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돌아라.”

“왜?”

“잔말 말고 몸이나 돌려.”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리자, 네빌라가 에단의 입은 옷의 매듭을 다시 묶었다.

“……옷 하나 제대로 못 입으면 전사들이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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